관평원 ‘유령청사’ 막을 기회 4번 있었다

입력 2021.05.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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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반곡동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에는 '관세평가분류원'이라고 쓰여 있지만, 텅텅 비어있다.

나랏돈 171억 원을 들여 지은 이 건물은 관평원의 이전이 무산되면서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유령 청사'로 남게 됐다.

정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 황당한 사건에는 최소 4개의 중앙부처가 개입돼 있다. 개입된 기관이 많다는 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그만큼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관평원 사태' 역시 막을 기회가 최소 4번은 있었다.



■ 관세청, 고시 모른 채 이전 추진

중앙부처 등의 세종시 이전은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줄여서 행복도시법을 근거로 이뤄진다.

행정안전부는 이 법에 따라 '중앙행정기관 등의 이전계획'을 고시한다. 2005년 처음 만들어진 이 고시에 관세청과 그 산하기관은 모두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으로 명시돼 있다.

세종시가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만든 곳이기 때문에 비수도권인 대전에 있는 관세청이나 관평원 같은 기관들은 이전 대상이 아니었다.

고시가 처음 만들어지고 10년이 지난 2015년 관세청은 관평원 세종 이전을 추진했다. 이때 고시 내용을 알았다면 이전 추진을 하지 않았거나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했을 텐데 관세청은 고시 내용을 몰랐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이전을 막을 첫 번째 기회가 사라졌다.


■ 행복청, 관세청 요청에 적극 응답

관평원 이전을 결정한 관세청은 제일 먼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줄여서 행복청)부터 찾았다.

행복청에 관평원 신축 부지 검토 요청 공문을 보냈고, 행복청은 적정부지를 검토하고 있으며, 도시 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관세청이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실에 보낸 답변서를 보면, 행복청도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이라는 고시 내용을 몰랐다.

관세청이 이 고시를 모른 것과 행복청이 모른 것은 무게감이 다르다. 행복청은 각 기관의 세종시 이전 등 세종시 건설 관련 업무를 위해 만들어진 전담 기관이다. 누구보다 관련 규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청은 고시 내용을 몰랐고, 관평원 이전을 막을 두 번째 기회도 이렇게 없어졌다.



■ 기재부, 171억 원 예산 편성

행복청과 기초 협의를 끝낸 관세청은 기획재정부에 예산을 신청했다. 설계비와 공사비 등 171억 원 규모였다.

기재부 역시 고시 내용을 몰랐고, 심사를 통해 예산을 배정해줬다. 기재부는 관평원이 세종으로 간다는 것보다 왜 가는지를 중심으로 검토했다고 밝혔다. 지금 쓰고 있는 건물이 얼마나 낡았는지, 얼마나 좁은지, 직원들은 얼마나 늘었는지 등을 따졌다는 설명이다.

주로 수도권에 있는 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하기 때문에 세종시에서 차로 20~30분 거리인 대전에 있는 기관이 세종으로 오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도 기재부는 세종 이전에 의문을 갖거나, 관세청과 행안부가 협의했는지 등을 살펴보지 않았다. 관평원 이전을 막을 세 번째 기회도 이렇게 날아갔다.

이런 업무 처리를 두고는 기재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금 와서 보면 (당시에) 관련 규정을 다 꼼꼼히 챙겼어야 한다"고 말했다.



■ 행안부, "이전 제외" 답하고도 조치 안 해

관평원 세종 이전을 막을 마지막 기회는 2018년 초에 있었다. 당시 행복청은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이라는 고시를 뒤늦게 알고 관세청에 알렸다.

행복청은 "관세청 및 산하기관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으로 명시돼 있어, 세종시 이전 추진을 위해서는 관련 기관의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전했다.

관세청은 이에 대해 2018년 2월 '행안부 청사관리본부 검토 결과'라며 "고시 개정 시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대상 기관에 포함되도록 긍정적으로 검토 후 반영할 예정이라는 의견임"이라고 행복청에 공문을 보냈다.

행안부가 관평원의 세종시 이전을 허용하겠다는 얘기였는데, 행안부가 한 달 뒤인 3월에 보낸 공문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행안부는 "관평원은 비수도권(대전)에 위치해 이전 제외기관으로 고시됐고, 이후 기능·명칭 등이 변경되지 않았으므로 변경 고시 대상이 아님"이라고 답했다.

행안부가 관세청에 전한 내용과 관세청이 행복청에 전한 내용이 180도 다른 건데, 관세청이 행안부의 의견을 왜곡해서 전달한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문제는 더 있는데, 행안부가 공문을 보낸 이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안부가 관세청에 '이전 제외 유지'라는 공문을 보낸 2018년 3월 이후 6개월이 지난 2018년 9월 관평원은 실제 공사를 시작했다. 이전을 실제 추진하고 있는 건지, 어디까지 추진됐는지 알아볼 시간이 6개월이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행안부는 가만히 있다가 공사가 절반가량이나 진행된 2019년 하반기에서야 관세청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관평원 이전은 이렇게 관세청에서 시작해 행복청, 기재부, 행안부 등 여러 부처를 거쳤지만 마치 일부러 짠 것처럼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박수정 행정개혁시민연합 사무총장은 "관련 기관들이 요만큼씩 잘못한 것들이 모여서 결과로는 국민 세금이 날아가고 '유령청사'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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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평원 ‘유령청사’ 막을 기회 4번 있었다
    • 입력 2021-05-22 09:06:01
    취재K

세종시 반곡동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에는 '관세평가분류원'이라고 쓰여 있지만, 텅텅 비어있다.

나랏돈 171억 원을 들여 지은 이 건물은 관평원의 이전이 무산되면서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유령 청사'로 남게 됐다.

정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 황당한 사건에는 최소 4개의 중앙부처가 개입돼 있다. 개입된 기관이 많다는 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그만큼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관평원 사태' 역시 막을 기회가 최소 4번은 있었다.



■ 관세청, 고시 모른 채 이전 추진

중앙부처 등의 세종시 이전은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줄여서 행복도시법을 근거로 이뤄진다.

행정안전부는 이 법에 따라 '중앙행정기관 등의 이전계획'을 고시한다. 2005년 처음 만들어진 이 고시에 관세청과 그 산하기관은 모두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으로 명시돼 있다.

세종시가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만든 곳이기 때문에 비수도권인 대전에 있는 관세청이나 관평원 같은 기관들은 이전 대상이 아니었다.

고시가 처음 만들어지고 10년이 지난 2015년 관세청은 관평원 세종 이전을 추진했다. 이때 고시 내용을 알았다면 이전 추진을 하지 않았거나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했을 텐데 관세청은 고시 내용을 몰랐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이전을 막을 첫 번째 기회가 사라졌다.


■ 행복청, 관세청 요청에 적극 응답

관평원 이전을 결정한 관세청은 제일 먼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줄여서 행복청)부터 찾았다.

행복청에 관평원 신축 부지 검토 요청 공문을 보냈고, 행복청은 적정부지를 검토하고 있으며, 도시 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관세청이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실에 보낸 답변서를 보면, 행복청도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이라는 고시 내용을 몰랐다.

관세청이 이 고시를 모른 것과 행복청이 모른 것은 무게감이 다르다. 행복청은 각 기관의 세종시 이전 등 세종시 건설 관련 업무를 위해 만들어진 전담 기관이다. 누구보다 관련 규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청은 고시 내용을 몰랐고, 관평원 이전을 막을 두 번째 기회도 이렇게 없어졌다.



■ 기재부, 171억 원 예산 편성

행복청과 기초 협의를 끝낸 관세청은 기획재정부에 예산을 신청했다. 설계비와 공사비 등 171억 원 규모였다.

기재부 역시 고시 내용을 몰랐고, 심사를 통해 예산을 배정해줬다. 기재부는 관평원이 세종으로 간다는 것보다 왜 가는지를 중심으로 검토했다고 밝혔다. 지금 쓰고 있는 건물이 얼마나 낡았는지, 얼마나 좁은지, 직원들은 얼마나 늘었는지 등을 따졌다는 설명이다.

주로 수도권에 있는 기관이 세종시로 이전하기 때문에 세종시에서 차로 20~30분 거리인 대전에 있는 기관이 세종으로 오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도 기재부는 세종 이전에 의문을 갖거나, 관세청과 행안부가 협의했는지 등을 살펴보지 않았다. 관평원 이전을 막을 세 번째 기회도 이렇게 날아갔다.

이런 업무 처리를 두고는 기재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금 와서 보면 (당시에) 관련 규정을 다 꼼꼼히 챙겼어야 한다"고 말했다.



■ 행안부, "이전 제외" 답하고도 조치 안 해

관평원 세종 이전을 막을 마지막 기회는 2018년 초에 있었다. 당시 행복청은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이라는 고시를 뒤늦게 알고 관세청에 알렸다.

행복청은 "관세청 및 산하기관이 세종시 이전 제외 기관으로 명시돼 있어, 세종시 이전 추진을 위해서는 관련 기관의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전했다.

관세청은 이에 대해 2018년 2월 '행안부 청사관리본부 검토 결과'라며 "고시 개정 시 관평원이 세종시 이전 대상 기관에 포함되도록 긍정적으로 검토 후 반영할 예정이라는 의견임"이라고 행복청에 공문을 보냈다.

행안부가 관평원의 세종시 이전을 허용하겠다는 얘기였는데, 행안부가 한 달 뒤인 3월에 보낸 공문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행안부는 "관평원은 비수도권(대전)에 위치해 이전 제외기관으로 고시됐고, 이후 기능·명칭 등이 변경되지 않았으므로 변경 고시 대상이 아님"이라고 답했다.

행안부가 관세청에 전한 내용과 관세청이 행복청에 전한 내용이 180도 다른 건데, 관세청이 행안부의 의견을 왜곡해서 전달한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문제는 더 있는데, 행안부가 공문을 보낸 이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안부가 관세청에 '이전 제외 유지'라는 공문을 보낸 2018년 3월 이후 6개월이 지난 2018년 9월 관평원은 실제 공사를 시작했다. 이전을 실제 추진하고 있는 건지, 어디까지 추진됐는지 알아볼 시간이 6개월이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행안부는 가만히 있다가 공사가 절반가량이나 진행된 2019년 하반기에서야 관세청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관평원 이전은 이렇게 관세청에서 시작해 행복청, 기재부, 행안부 등 여러 부처를 거쳤지만 마치 일부러 짠 것처럼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박수정 행정개혁시민연합 사무총장은 "관련 기관들이 요만큼씩 잘못한 것들이 모여서 결과로는 국민 세금이 날아가고 '유령청사'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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