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경 실은 채 도주하는 중국 어선들…‘황금어장’ 황폐화

입력 2021.05.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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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일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촬영한 중국어선 영상

■ 연평도 부근 새카맣게 떠 있는 '중국 어선'

바다 위로 배들이 새카맣게 몰려있다. 어림잡아도 50척 가까이 돼 보인다. 지난 9일 오후,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연평도 어민이 촬영한 영상이다.

연평도에서 촬영했으니 우리나라 어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두 중국 어선들이다. 서해 북방한계선, NLL 근처에서 진을 치고 불법 조업을 하고 있다.

연평도 코앞에서 중국어선이 관측되는 게 다소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연평도 어민들에겐 일상이다. 이미 서해 NLL 일대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불법 조업을 한지 최소 10년은 넘었기 때문이다.

서해 NLL에서 중국어선이 가장 기승을 부리는 시기는 봄철 성어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5월까지. 특히 꽃게잡이 철이 시작되는 4월에 정점을 찍는다. 이후 여름이 되면 다소 활동이 뜸해지지만, 가을철 성어기인 9월부터 다시 중국어선의 숫자가 늘어난다. 이런 패턴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 중국 어선, 하루 평균 180척까지 몰려들어

그런데 올해는 유독 중국 어선이 서해 NLL에서 많이 관측되고 있다. 3월부터 하루 평균 100척 넘는 중국 어선이 출몰하더니, 4월에는 하루 평균 180척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했을 때, 3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최근 5년 통계를 봐도 올해 유독 눈에 띄게 늘었다.



이렇게 서해 NLL에서 중국 어선이 급증한 원인은 뭘까?

해양수산부와 해경은 우선 올해 2월부터 중국 내부에서 무등록 어선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점을 이유로 꼽는다. 중국 당국의 단속으로 중국 해안에서 조업할 수 없으니 서해 NLL 쪽으로 넘어와 불법 조업을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우리 해경이 지난해 동안 나포 대신 퇴거 위주의 이른바 '비대면' 단속을 했다는 점을 노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코로나 장기화로 조업이 어려워져 수산물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 "잡을 테면 잡아봐라"...여유 넘치는 중국 어선들, NLL 넘나들어

취재진이 지난 17일 연평도를 찾았을 때도, 중국 어선이 무리 지어 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구를 내리고 그물을 끌고 가며 수산물을 어획하는 식이었다.

연평도 앞 바다에 떠 있는 중국어선연평도 앞 바다에 떠 있는 중국어선

아예 빨래를 널어놓고 조업을 준비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이런 풍경은 24시간 내내 이어졌다. 불법 조업을 해도 자신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여유가 느껴졌다.

실제로 이들을 단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 해경이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은 NLL 남방 3.7km까지로 제한되기 때문에, 중국 어선이 NLL 경계 선상에서 조업하더라도 눈 뜨고 바라봐야만 한다. 사실상 NLL이 중국 어선의 안전지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 "해경 싣고 그대로 NLL 북쪽으로 도주"

NLL 이남으로 깊숙이 넘어와야 그나마 단속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과거에는 해경이 불법 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에 대해 나포에 나서면, 흉기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하는 식이었는데, 요새는 이른바 '묻지 마 36계 전술'을 쓰기 때문이다.

실제 연평도 일대에서 중국 어선 불법 조업 단속 임무를 수행하는 해경 서해5도 특별경비단 송주현 경사는,

"예전에는 쇠창살 등 승선 방해물을 이용해서 단속 요원들의 승선을 방해하거나 칼, 도끼 등을 이용해서 승선 요원들이 중국 어선에 승선하는 것을 방해하는 형태였다면, 최근에는 조타실 및 기관실을 폐쇄해서 신속하게 NLL 이북 지역으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불법 조업 중국 어선에 승선해 잠긴 철문을 절단기로 자르는 해경 단속요원불법 조업 중국 어선에 승선해 잠긴 철문을 절단기로 자르는 해경 단속요원

송 경사는 특히 중국 어선에 올라탄 해경 단속요원들이 조타실이나 기관실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철문으로 2중, 3중 걸어 잠그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해경 단속요원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 문을 걸어 잠그고 북측으로 도주하는 중국 어선을 신속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NLL을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경 단속요원은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에 승선해서 제압을 완료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10분 안에 마쳐야 한다. 중국 어선들도 이런 시간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


■ 황폐화되는 황금 어장

남북 간 군사적 긴장감이 늘 감도는 NLL이라는 특수성을 너무나 잘 아는 중국 어선들 때문에 서해 황금어장은 황폐화되고 있다.

박태원 서해5도평화운동본부 대표(前 연평도 어촌계장)은 "연평도 주변 해역은 한강, 예성강, 임진강에서 내려오는 3개의 물줄기가 교차점이 되는 지역"이라며 "플랑크톤이 많이 형성되고, 많은 어자원이 모여 산란을 하는 등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런 연평도에서 중국어선이 형망을 이용해 물에 떠 있는 고기부터 수면 아래 펄 속에 있는 각종 어패류를 싹 긁어내는 식으로 조업하고 있다"며 "중국어선의 조업 때문에 생태계가 이미 교란되기 시작했는데 바뀌는 게 없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 쓰레기마저 마구 버리는 중국 어선들

중국어선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페트병중국어선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페트병

문제는 또 있다. 최근 연평도 해변에서는 중국어 라벨이 붙어 있는 페트병이나 플라스틱 제품 등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중국 어민들이 쓰다 버린 것이라는 게 연평도 어민들의 얘기다.

싹쓸이식 불법 조업으로 황금어장은 점점 황폐화되고, 여기에 더해 연평도 일대는 중국어선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주중대사관과 외교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다음 달 한·중 어업지도단속 실무회의에서도 불법 조업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중국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조업 나가는 어선을 일일이 단속하는 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어민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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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경 실은 채 도주하는 중국 어선들…‘황금어장’ 황폐화
    • 입력 2021-05-23 08:00:23
    취재K
지난 5월 9일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촬영한 중국어선 영상

■ 연평도 부근 새카맣게 떠 있는 '중국 어선'

바다 위로 배들이 새카맣게 몰려있다. 어림잡아도 50척 가까이 돼 보인다. 지난 9일 오후,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연평도 어민이 촬영한 영상이다.

연평도에서 촬영했으니 우리나라 어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두 중국 어선들이다. 서해 북방한계선, NLL 근처에서 진을 치고 불법 조업을 하고 있다.

연평도 코앞에서 중국어선이 관측되는 게 다소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연평도 어민들에겐 일상이다. 이미 서해 NLL 일대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불법 조업을 한지 최소 10년은 넘었기 때문이다.

서해 NLL에서 중국어선이 가장 기승을 부리는 시기는 봄철 성어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5월까지. 특히 꽃게잡이 철이 시작되는 4월에 정점을 찍는다. 이후 여름이 되면 다소 활동이 뜸해지지만, 가을철 성어기인 9월부터 다시 중국어선의 숫자가 늘어난다. 이런 패턴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 중국 어선, 하루 평균 180척까지 몰려들어

그런데 올해는 유독 중국 어선이 서해 NLL에서 많이 관측되고 있다. 3월부터 하루 평균 100척 넘는 중국 어선이 출몰하더니, 4월에는 하루 평균 180척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했을 때, 3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최근 5년 통계를 봐도 올해 유독 눈에 띄게 늘었다.



이렇게 서해 NLL에서 중국 어선이 급증한 원인은 뭘까?

해양수산부와 해경은 우선 올해 2월부터 중국 내부에서 무등록 어선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점을 이유로 꼽는다. 중국 당국의 단속으로 중국 해안에서 조업할 수 없으니 서해 NLL 쪽으로 넘어와 불법 조업을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우리 해경이 지난해 동안 나포 대신 퇴거 위주의 이른바 '비대면' 단속을 했다는 점을 노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코로나 장기화로 조업이 어려워져 수산물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 "잡을 테면 잡아봐라"...여유 넘치는 중국 어선들, NLL 넘나들어

취재진이 지난 17일 연평도를 찾았을 때도, 중국 어선이 무리 지어 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구를 내리고 그물을 끌고 가며 수산물을 어획하는 식이었다.

연평도 앞 바다에 떠 있는 중국어선
아예 빨래를 널어놓고 조업을 준비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이런 풍경은 24시간 내내 이어졌다. 불법 조업을 해도 자신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여유가 느껴졌다.

실제로 이들을 단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 해경이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은 NLL 남방 3.7km까지로 제한되기 때문에, 중국 어선이 NLL 경계 선상에서 조업하더라도 눈 뜨고 바라봐야만 한다. 사실상 NLL이 중국 어선의 안전지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 "해경 싣고 그대로 NLL 북쪽으로 도주"

NLL 이남으로 깊숙이 넘어와야 그나마 단속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과거에는 해경이 불법 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에 대해 나포에 나서면, 흉기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하는 식이었는데, 요새는 이른바 '묻지 마 36계 전술'을 쓰기 때문이다.

실제 연평도 일대에서 중국 어선 불법 조업 단속 임무를 수행하는 해경 서해5도 특별경비단 송주현 경사는,

"예전에는 쇠창살 등 승선 방해물을 이용해서 단속 요원들의 승선을 방해하거나 칼, 도끼 등을 이용해서 승선 요원들이 중국 어선에 승선하는 것을 방해하는 형태였다면, 최근에는 조타실 및 기관실을 폐쇄해서 신속하게 NLL 이북 지역으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불법 조업 중국 어선에 승선해 잠긴 철문을 절단기로 자르는 해경 단속요원
송 경사는 특히 중국 어선에 올라탄 해경 단속요원들이 조타실이나 기관실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철문으로 2중, 3중 걸어 잠그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해경 단속요원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 문을 걸어 잠그고 북측으로 도주하는 중국 어선을 신속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NLL을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경 단속요원은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에 승선해서 제압을 완료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10분 안에 마쳐야 한다. 중국 어선들도 이런 시간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


■ 황폐화되는 황금 어장

남북 간 군사적 긴장감이 늘 감도는 NLL이라는 특수성을 너무나 잘 아는 중국 어선들 때문에 서해 황금어장은 황폐화되고 있다.

박태원 서해5도평화운동본부 대표(前 연평도 어촌계장)은 "연평도 주변 해역은 한강, 예성강, 임진강에서 내려오는 3개의 물줄기가 교차점이 되는 지역"이라며 "플랑크톤이 많이 형성되고, 많은 어자원이 모여 산란을 하는 등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런 연평도에서 중국어선이 형망을 이용해 물에 떠 있는 고기부터 수면 아래 펄 속에 있는 각종 어패류를 싹 긁어내는 식으로 조업하고 있다"며 "중국어선의 조업 때문에 생태계가 이미 교란되기 시작했는데 바뀌는 게 없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 쓰레기마저 마구 버리는 중국 어선들

중국어선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페트병
문제는 또 있다. 최근 연평도 해변에서는 중국어 라벨이 붙어 있는 페트병이나 플라스틱 제품 등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중국 어민들이 쓰다 버린 것이라는 게 연평도 어민들의 얘기다.

싹쓸이식 불법 조업으로 황금어장은 점점 황폐화되고, 여기에 더해 연평도 일대는 중국어선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주중대사관과 외교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다음 달 한·중 어업지도단속 실무회의에서도 불법 조업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중국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조업 나가는 어선을 일일이 단속하는 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어민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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