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지킴이’ 마지막 가는 길, 해군 예비역들이 배웅했다

입력 2021.05.30 (09:13) 수정 2021.05.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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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지킴이'로 알려진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의 장례식이 오늘(5월 30일) 오전 열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8일 만입니다. 고인은 그동안 가족이나 친척 등을 찾지 못해 무연고 사망자가 될 뻔했습니다. 지인들이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미국에 거주하는 조카뻘 친척들을 찾은 후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고인은 5월 11일 밤 잠자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빈소는 사후 보름이 훌쩍 지난 어제(5월 29일)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외국인 지인들과 이웃들이 빈소를 찾았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조문객들은 진해기지사령부 해군의장대 출신 예비역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빈소에서 상주 역할도 맡아 다른 조문객을 맞이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를 운구하는 일도 이들 몫이었습니다.

생전에 고인이 해군의장대와 어떤 인연을 맺었기에 예비역들이 줄지어 추모하고, 나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을까요?

맨 앞줄 넥타이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피터 바돌로뮤 씨. 2009년 2월 20일, 해군의장대 후원인 자격으로 진해기지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진제공: 해군)맨 앞줄 넥타이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피터 바돌로뮤 씨. 2009년 2월 20일, 해군의장대 후원인 자격으로 진해기지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진제공: 해군)

■ 해군의장대와 37년 인연…자신의 집에 35년째 숙식 제공

고인이 대한민국 해군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84년,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었습니다. 상주 역할을 맡은 진해기지사령부 해군의장대 모임인 해의회 소속 전대식(58) 씨는 1983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복무했습니다. 전 씨는 고인이 1984년 의장대 시범행사를 본 뒤 절도 있는 모습에 반해 의장대 장병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합니다.

고인이 1986년부터는 진해 해군의장대에서 전역한 예비역 장병들을 자신의 집에 무료로 기거하도록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제대하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준비하려 했지만, 마땅히 지낼 곳이 없던 예비역들을 평균 6명 정도씩 함께 지내도록 했다는 겁니다 . 바로 그 서울 동소문동 자신의 한옥에서입니다.

고인은 2009년 KBS 프로그램 <한국, 한국인>에 출연해 해군의장대 전역자들에게 자신의 한옥을 내준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지난 30여 년 동안 고인의 동소문동 한옥에 함께 기거했던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은 줄잡아 100명이 넘습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까지 머물렀습니다. 기반을 닦은 사람이 나가고 빈자리가 나면 지낼 곳이 필요한 사람이 다시 들어오는 식이었습니다. 고인이 세상을 뜨던 바로 그 날까지도 제대한 해군의장대 출신 6명이 한옥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철웅(46) 씨는 1995년 12월, 해군의장대를 복무를 마치고 1996년부터 2002년까지 7년간 고인의 한옥에서 살았습니다. 숙식비는 따로 내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고인과 자주 서울과 근교의 왕릉이나 고궁도 함께 찾았는데 고인이 한국인인 자신도 모르는 건물 내력과 관련 일화를 알려줘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지원을 받아 어학연수를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고향이 경남 거제인 반경호(47) 씨는 1997년 해군의장대 생활을 마치고 1999년부터 약 3년간 동소문동 한옥에 거주했습니다. 중간에 캐나다 밴쿠버에 10달간 어학연수를 갔는데 밴쿠버에 있는 고인의 아파트에서도 무료로 5개월을 지내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2009년 9월 14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생일을 맞아 동소문동  한옥에 모인 해군의장대 예비역들과  피터 바돌로뮤 씨  (사진제공:  다음카페  해군진해의장대)2009년 9월 14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생일을 맞아 동소문동 한옥에 모인 해군의장대 예비역들과 피터 바돌로뮤 씨 (사진제공: 다음카페 해군진해의장대)

이들과 고인의 인연은 동소문동 한옥을 떠난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고인은 여름엔 과거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해군의장대 예비역들과 함께 진해의 별장을 찾아 휴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고인의 생일인 9월 14일이면 모여서 '한국식'으로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이렇게 고인과 해군의장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2004년 2월 21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해군의장대 후원 2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 행사 (사진제공:  다음카페 진해 해군의장대 아이롱실)2004년 2월 21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해군의장대 후원 2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 행사 (사진제공: 다음카페 진해 해군의장대 아이롱실)

■"피터라고 불러 달라 "… 격의 없는 친구·가족 노릇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이 고인을 언급하는 호칭은 한결같았습니다. '바돌로뮤 씨'가 아니라 '피터' 혹은 '피터 씨'라고 불렀습니다. 이철웅 씨는 고인이 바돌로뮤 씨라고 성에 씨를 붙여 부르는 걸 반기지 않았다고 추억했습니다. 나이를 따지는 걸 싫어했고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습니다.

1987년 해군의장대에서 전역한 윤진호(57) 씨는 지난 5일까지 매주 수요일이면 고인의 한옥에 생수 등 생활물품을 배달하며 고인과 자주 만나던 사이였습니다. 윤 씨 또한 고인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지만 단 하나, 여느 한국 사람과는 달리 나이 따지는 건 질색이었다고 했습니다. 나이 안 따지고 함께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임채정(24) 씨는 2019년 4월 해군의장대를 제대하고 그해 5월부터 고인이 세상을 뜨던 날까지 동소문동 한옥에 함께 살았습니다.

임 씨는 고인보다 52살 어리지만, 고인을 피터 씨라고 불렀습니다. 임 씨에게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나 물었더니 "친구이자 아빠" 같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임종 몇 시간 전까지 고인이 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평소에 건강을 미처 못 챙겨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했습니다.

2021년 5월 30일 47년간 머물던 동소문동 한옥에 들러 마지막 작별을 한 피터 바돌로뮤 씨2021년 5월 30일 47년간 머물던 동소문동 한옥에 들러 마지막 작별을 한 피터 바돌로뮤 씨

■ 동소문동 한옥 들른 뒤 강릉 선교장 뒷산에 안장

빈소를 떠난 고인의 유해는 동소문동 자택에 들렀습니다. 1974년 처음 살기 시작해 47년을 머문 손때묻은 한옥과 마지막 작별을 했습니다.

이후 고인은 화장한 뒤 강원도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1968년, 고인이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들어와 영어를 가르친 곳이자 처음으로 한옥의 매력에 흠뻑 빠진 곳입니다.

고인은 당시 강릉 선교장에서 4년여를 머물렀습니다. 선교장 이강백 관장은 고인에 대해 "우리 할머니가 고인을 의손자 삼았고 나와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는 고인을 한옥 지킴이의 길로 이끈 강릉 선교장 뒷산에 안장됐습니다.

53년을 한국에서 살았던 고인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나 다름없었지만, 국적이 미국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장례를 바로 치르기가 어려웠습니다.

공동 상주로 고인과 30년 이상 함께 일했던 피터 언더우드(한국명 원한석)(66) 씨는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이 정중히 배웅해 줘 진짜 고맙다고 했습니다. 언더우드 씨는 "원래 서양식 장례를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가족이나 다름 없는 해군의장대 출신들이 이렇게 한국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고인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벽안의 이방인이 마지막 가는 길, 외롭고 쓸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연관 기사] 한국인보다 더 한옥을 사랑한 미국인…한국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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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옥지킴이’ 마지막 가는 길, 해군 예비역들이 배웅했다
    • 입력 2021-05-30 09:13:22
    • 수정2021-05-30 14:40:08
    취재K

'한옥 지킴이'로 알려진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의 장례식이 오늘(5월 30일) 오전 열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8일 만입니다. 고인은 그동안 가족이나 친척 등을 찾지 못해 무연고 사망자가 될 뻔했습니다. 지인들이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미국에 거주하는 조카뻘 친척들을 찾은 후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고인은 5월 11일 밤 잠자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빈소는 사후 보름이 훌쩍 지난 어제(5월 29일)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외국인 지인들과 이웃들이 빈소를 찾았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조문객들은 진해기지사령부 해군의장대 출신 예비역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빈소에서 상주 역할도 맡아 다른 조문객을 맞이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를 운구하는 일도 이들 몫이었습니다.

생전에 고인이 해군의장대와 어떤 인연을 맺었기에 예비역들이 줄지어 추모하고, 나아가 팔을 걷어붙이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을까요?

맨 앞줄 넥타이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피터 바돌로뮤 씨. 2009년 2월 20일, 해군의장대 후원인 자격으로 진해기지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진제공: 해군)
■ 해군의장대와 37년 인연…자신의 집에 35년째 숙식 제공

고인이 대한민국 해군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84년,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었습니다. 상주 역할을 맡은 진해기지사령부 해군의장대 모임인 해의회 소속 전대식(58) 씨는 1983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복무했습니다. 전 씨는 고인이 1984년 의장대 시범행사를 본 뒤 절도 있는 모습에 반해 의장대 장병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합니다.

고인이 1986년부터는 진해 해군의장대에서 전역한 예비역 장병들을 자신의 집에 무료로 기거하도록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제대하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준비하려 했지만, 마땅히 지낼 곳이 없던 예비역들을 평균 6명 정도씩 함께 지내도록 했다는 겁니다 . 바로 그 서울 동소문동 자신의 한옥에서입니다.

고인은 2009년 KBS 프로그램 <한국, 한국인>에 출연해 해군의장대 전역자들에게 자신의 한옥을 내준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지난 30여 년 동안 고인의 동소문동 한옥에 함께 기거했던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은 줄잡아 100명이 넘습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까지 머물렀습니다. 기반을 닦은 사람이 나가고 빈자리가 나면 지낼 곳이 필요한 사람이 다시 들어오는 식이었습니다. 고인이 세상을 뜨던 바로 그 날까지도 제대한 해군의장대 출신 6명이 한옥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철웅(46) 씨는 1995년 12월, 해군의장대를 복무를 마치고 1996년부터 2002년까지 7년간 고인의 한옥에서 살았습니다. 숙식비는 따로 내지 않았습니다. 이 씨는 고인과 자주 서울과 근교의 왕릉이나 고궁도 함께 찾았는데 고인이 한국인인 자신도 모르는 건물 내력과 관련 일화를 알려줘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지원을 받아 어학연수를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고향이 경남 거제인 반경호(47) 씨는 1997년 해군의장대 생활을 마치고 1999년부터 약 3년간 동소문동 한옥에 거주했습니다. 중간에 캐나다 밴쿠버에 10달간 어학연수를 갔는데 밴쿠버에 있는 고인의 아파트에서도 무료로 5개월을 지내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2009년 9월 14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생일을 맞아 동소문동  한옥에 모인 해군의장대 예비역들과  피터 바돌로뮤 씨  (사진제공:  다음카페  해군진해의장대)
이들과 고인의 인연은 동소문동 한옥을 떠난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고인은 여름엔 과거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해군의장대 예비역들과 함께 진해의 별장을 찾아 휴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고인의 생일인 9월 14일이면 모여서 '한국식'으로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이렇게 고인과 해군의장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2004년 2월 21일 피터 바돌로뮤 씨의 해군의장대 후원 2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 행사 (사진제공:  다음카페 진해 해군의장대 아이롱실)
■"피터라고 불러 달라 "… 격의 없는 친구·가족 노릇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이 고인을 언급하는 호칭은 한결같았습니다. '바돌로뮤 씨'가 아니라 '피터' 혹은 '피터 씨'라고 불렀습니다. 이철웅 씨는 고인이 바돌로뮤 씨라고 성에 씨를 붙여 부르는 걸 반기지 않았다고 추억했습니다. 나이를 따지는 걸 싫어했고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습니다.

1987년 해군의장대에서 전역한 윤진호(57) 씨는 지난 5일까지 매주 수요일이면 고인의 한옥에 생수 등 생활물품을 배달하며 고인과 자주 만나던 사이였습니다. 윤 씨 또한 고인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지만 단 하나, 여느 한국 사람과는 달리 나이 따지는 건 질색이었다고 했습니다. 나이 안 따지고 함께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남 순천 출신인 임채정(24) 씨는 2019년 4월 해군의장대를 제대하고 그해 5월부터 고인이 세상을 뜨던 날까지 동소문동 한옥에 함께 살았습니다.

임 씨는 고인보다 52살 어리지만, 고인을 피터 씨라고 불렀습니다. 임 씨에게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나 물었더니 "친구이자 아빠" 같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임종 몇 시간 전까지 고인이 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평소에 건강을 미처 못 챙겨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했습니다.

2021년 5월 30일 47년간 머물던 동소문동 한옥에 들러 마지막 작별을 한 피터 바돌로뮤 씨
■ 동소문동 한옥 들른 뒤 강릉 선교장 뒷산에 안장

빈소를 떠난 고인의 유해는 동소문동 자택에 들렀습니다. 1974년 처음 살기 시작해 47년을 머문 손때묻은 한옥과 마지막 작별을 했습니다.

이후 고인은 화장한 뒤 강원도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1968년, 고인이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들어와 영어를 가르친 곳이자 처음으로 한옥의 매력에 흠뻑 빠진 곳입니다.

고인은 당시 강릉 선교장에서 4년여를 머물렀습니다. 선교장 이강백 관장은 고인에 대해 "우리 할머니가 고인을 의손자 삼았고 나와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는 고인을 한옥 지킴이의 길로 이끈 강릉 선교장 뒷산에 안장됐습니다.

53년을 한국에서 살았던 고인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나 다름없었지만, 국적이 미국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장례를 바로 치르기가 어려웠습니다.

공동 상주로 고인과 30년 이상 함께 일했던 피터 언더우드(한국명 원한석)(66) 씨는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해군의장대 예비역들이 정중히 배웅해 줘 진짜 고맙다고 했습니다. 언더우드 씨는 "원래 서양식 장례를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가족이나 다름 없는 해군의장대 출신들이 이렇게 한국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고인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벽안의 이방인이 마지막 가는 길, 외롭고 쓸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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