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발급 1/5토막, 예산은 그대로…외교부 ‘그들만의 셈법’

입력 2021.06.04 (11:33) 수정 2021.06.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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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에서 B값이 고정된 상태에서 C값이 줄어든다면 A 값은 어떻게 변할까요? A 값도 줄어든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부의 셈법'으로는 A가 고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여권 발급 보조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 '서울 최다 여권 발급' 서초구청으로 가 봤습니다

7명. 오후 3시부터 30분 동안 여권 발급과 관련된 업무를 보러 서울 서초구청 여권과를 방문한 사람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여권을 발급한다는 이 서초구청도 여권 발급자가 급감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최영진 서울 서초구청 오케이 민원센터 여권 팀장은 "2020년 1월에는 하루에 300여 건 신청이 들어왔는데, 현재는 하루에 70건 정도로 (코로나19 발생 이전에 비해) 75% 정도 감소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의 여권 발급 건수는 지난해 약 107만 건이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에 약 471만 건이었는데요. 그때의 22.7% 수준으로 떨어진 겁니다.


■ 여권 발급은 1/5 토막…외교부 관련 예산은 그대로

서울 서초구처럼 전국 240개 지방자치단체는 여권 발급 업무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외교부 업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으므로 지자체는 여권 발급 수수료의 22%를 예산으로 받습니다.

또 여권법 제21조 5항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없는 지자체에 대하여는 국고에서 그 부족분을 보조할 수 있다'란 조항을 근거로 국고보조금도 받습니다.

이 국고보조금은 '고정 보조금(기본 배정금과 광역 관리 경비 등)'과 '변동 보조금(하루 평균 여권 발급 건수에 따른 추가 배정금과 관용 여권 보전비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여권 발급 건수가 1/5 수준이 됐으니, 외교부가 각 지자체에 주는 변동보조금을 줄여 관련 총 국고보조금 예산도 줄어야 합리적이겠죠?

그런데 외교부의 '여권 사무 대행기관 국고 보조' 예산안을 살펴보면 2019년부터 올해까지 관련 예산은 56억 1천만 원으로 변동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그들만의 셈법'…발급 건수가 줄면 건수 당 지원 보조금 높이기

여권 발급 건수의 급감에도 예산 총액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외교부가 '변동 보조금' 항목을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외교부는 일 평균 여권 발행 건수에 따라 변하는 '추가 배정 기준표'의 등급을 '하향 평준화'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존보다 적은 여권 발급량으로도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지난해 추가 배정 기준표 기준으로는 일 평균 여권 발급량이 21개 이하인 지자체는 추가 배정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등급 기준 자체가 조정돼서 일 평균 여권 발급량이 9건 이상이면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여권 발급량이 적어서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던 지자체들이 이제는 추가 배정금 등급이 2단계 상승해 747만 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러한 외교부의 등급 조정 조치로 전국 17개 광역지자체 모두 여권 발급 건수는 급감했지만 받은 보조금 액수는 비슷합니다.

오히려 서울과 경기, 세종, 광주, 강원, 충북, 경남 등 7개 광역 지자체의 경우는 관련 보조금 액수가 늘었습니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

■ "외교부는 편하고! 지자체는 좋은!" 행정편의주의

시민단체들은 외교부의 이 같은 예산 편성에 대해 '행정편의주의'라고 꼬집었습니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은 "수요에 기초해서 예산을 편성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편성했던 관행대로 예산을 편성한 것"이라며 "수요가 줄어들어도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가를 높이는 방식으로 예산을 편성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교부의 경우에는 기존에 편성했던 대로 지방자치단체에 보조금을 교부하면 편한 것이고, 지자체도 굳이 그 예산을 줄여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아주 편리한 방식으로 예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산이 한 번 줄어 들면 다시 늘리기 어렵다는 관행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려고 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는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정 편의주의로 인한 예산 낭비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요? 이왕재 부소장은 '예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수요에 기반해서 예산이 편성되고 집행되기 위해선 예산 편성의 세부 내역 그리고 세부 기준들이 공개되고 그것이 어떻게 집행됐는지 수요가 어떻게 됐는지도 공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 외교부 "국고보조금은 고정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경비"

이에 대해 외교부는 "국고보조금은 지자체의 여권 발급 대행 업무 전체 비용 중 1/7 정도 수준이고, 나머지 6/7은 여권 발급 수수료 중 22% 받는 것으로 충당한다"면서 "여권 발급 수수료는 발급 건수에 따라 변동 폭이 커 국고보조금은 고정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경비"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코로나19로 여권 발급 건수가 급감하자 변동 보조금의 추가 배정금 기준 등급을 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 (예산 총액이)약 56억 원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전체 국고보조금을 지자체별로 합리적으로 차등 배분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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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권 발급 1/5토막, 예산은 그대로…외교부 ‘그들만의 셈법’
    • 입력 2021-06-04 11:33:22
    • 수정2021-06-04 17:48:08
    취재K

'A=B+C'에서 B값이 고정된 상태에서 C값이 줄어든다면 A 값은 어떻게 변할까요? A 값도 줄어든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부의 셈법'으로는 A가 고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여권 발급 보조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 '서울 최다 여권 발급' 서초구청으로 가 봤습니다

7명. 오후 3시부터 30분 동안 여권 발급과 관련된 업무를 보러 서울 서초구청 여권과를 방문한 사람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여권을 발급한다는 이 서초구청도 여권 발급자가 급감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최영진 서울 서초구청 오케이 민원센터 여권 팀장은 "2020년 1월에는 하루에 300여 건 신청이 들어왔는데, 현재는 하루에 70건 정도로 (코로나19 발생 이전에 비해) 75% 정도 감소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의 여권 발급 건수는 지난해 약 107만 건이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에 약 471만 건이었는데요. 그때의 22.7% 수준으로 떨어진 겁니다.


■ 여권 발급은 1/5 토막…외교부 관련 예산은 그대로

서울 서초구처럼 전국 240개 지방자치단체는 여권 발급 업무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외교부 업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으므로 지자체는 여권 발급 수수료의 22%를 예산으로 받습니다.

또 여권법 제21조 5항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없는 지자체에 대하여는 국고에서 그 부족분을 보조할 수 있다'란 조항을 근거로 국고보조금도 받습니다.

이 국고보조금은 '고정 보조금(기본 배정금과 광역 관리 경비 등)'과 '변동 보조금(하루 평균 여권 발급 건수에 따른 추가 배정금과 관용 여권 보전비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보다 여권 발급 건수가 1/5 수준이 됐으니, 외교부가 각 지자체에 주는 변동보조금을 줄여 관련 총 국고보조금 예산도 줄어야 합리적이겠죠?

그런데 외교부의 '여권 사무 대행기관 국고 보조' 예산안을 살펴보면 2019년부터 올해까지 관련 예산은 56억 1천만 원으로 변동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그들만의 셈법'…발급 건수가 줄면 건수 당 지원 보조금 높이기

여권 발급 건수의 급감에도 예산 총액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외교부가 '변동 보조금' 항목을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외교부는 일 평균 여권 발행 건수에 따라 변하는 '추가 배정 기준표'의 등급을 '하향 평준화'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존보다 적은 여권 발급량으로도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지난해 추가 배정 기준표 기준으로는 일 평균 여권 발급량이 21개 이하인 지자체는 추가 배정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등급 기준 자체가 조정돼서 일 평균 여권 발급량이 9건 이상이면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여권 발급량이 적어서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던 지자체들이 이제는 추가 배정금 등급이 2단계 상승해 747만 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러한 외교부의 등급 조정 조치로 전국 17개 광역지자체 모두 여권 발급 건수는 급감했지만 받은 보조금 액수는 비슷합니다.

오히려 서울과 경기, 세종, 광주, 강원, 충북, 경남 등 7개 광역 지자체의 경우는 관련 보조금 액수가 늘었습니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
■ "외교부는 편하고! 지자체는 좋은!" 행정편의주의

시민단체들은 외교부의 이 같은 예산 편성에 대해 '행정편의주의'라고 꼬집었습니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은 "수요에 기초해서 예산을 편성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편성했던 관행대로 예산을 편성한 것"이라며 "수요가 줄어들어도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가를 높이는 방식으로 예산을 편성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교부의 경우에는 기존에 편성했던 대로 지방자치단체에 보조금을 교부하면 편한 것이고, 지자체도 굳이 그 예산을 줄여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아주 편리한 방식으로 예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산이 한 번 줄어 들면 다시 늘리기 어렵다는 관행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려고 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는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정 편의주의로 인한 예산 낭비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요? 이왕재 부소장은 '예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수요에 기반해서 예산이 편성되고 집행되기 위해선 예산 편성의 세부 내역 그리고 세부 기준들이 공개되고 그것이 어떻게 집행됐는지 수요가 어떻게 됐는지도 공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 외교부 "국고보조금은 고정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경비"

이에 대해 외교부는 "국고보조금은 지자체의 여권 발급 대행 업무 전체 비용 중 1/7 정도 수준이고, 나머지 6/7은 여권 발급 수수료 중 22% 받는 것으로 충당한다"면서 "여권 발급 수수료는 발급 건수에 따라 변동 폭이 커 국고보조금은 고정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경비"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코로나19로 여권 발급 건수가 급감하자 변동 보조금의 추가 배정금 기준 등급을 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 (예산 총액이)약 56억 원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전체 국고보조금을 지자체별로 합리적으로 차등 배분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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