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지금 올림픽? 정상 아냐”…日 어용학자의 반란, 왜?

입력 2021.06.06 (07:37) 수정 2021.06.0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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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전문가 입장을 넘어서 착각하고 있다' '총리라도 된 듯 행색한다', 이런 분노가 폭발하고 있어요. (스가 총리가) 어용학자로서 곁에 둔 건데,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 적(敵)으로 보는 생각이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계열 주간지 '아에라(AERA)'가 전한 정부 관계자의 말입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을 자문하는 오미 시게루(尾身茂·72) 분과위원회 회장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잡지는 "스가 총리가 오미 회장의 모반(謀反·배반)에 격노하고 있다"는 제목을 뽑았습니다. 오미 회장은 누구이고, 어쨌길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의 분노를 산 걸까요.

오미 시게루 일본 정부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6월 2일,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오미 시게루 일본 정부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6월 2일,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올림픽 정상 아냐" 거수기의 반란?

오미 회장은 감염증 전문가(의학 박사)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국장을 거쳐 지역의료기능추진기구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 1년 반 가까이 일본 정부에 방역 대책을 조언하는 전문가 모임의 수장을 맡아 왔습니다.

'자문' '조언'이라고 하지만, 그의 역할은 늘 정부 판단을 추인해 주는 데 그쳤습니다. 스가 총리가 회견할 때마다 항상 옆에 서서 충실히 설명을 보탰고,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 대응을 적극 옹호해 왔습니다.

그런 오미 회장이 돌변했습니다. 지난 2일 중의원(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입니다.

"팬더믹(대유행) 상황에서 올림픽을 하겠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대회를) 하는지 목적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대단히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일반 시민은 따라오지 않는다.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규모를 최소화하고, 관리 체계를 최대한 강화하는 것이 주최자의 의무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왼쪽)와 오미 시게루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도쿄 총리관저에서 회견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왼쪽)와 오미 시게루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도쿄 총리관저에서 회견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TV로 축제 보는 심경 아느냐?"

스가 총리와 '찰떡 공조'를 보여온 오미 회장의 이런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작심 발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틀 뒤인 4일 중의원 후생위원회에선 수위를 더 높였습니다.

"정말로 (개최를) 한다면 나는 긴급사태 선언 아래에서 올림픽 따위는 절대로 피할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밖에 뛰쳐나가 술 마시고, 어깨 걸고 응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 최선을 다해 자숙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찬 순간을 TV로 지켜보는 심정이 어떻겠냐."

야당은 반겼습니다. 나가츠마 아키라(長妻昭) 입헌민주당 부대표는 "'아이들이 '운동회는 중지됐는데 올림픽은 왜 하느냐'고 질문할 때 부모는 뭐라고 답해야 하느냐'며 오미 회장 발언에 화답했습니다.

오미 회장이 이제 서야 감염증 전문가로서의 소신을 되찾은 건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발언이 일본 정부의 올림픽 강행 의지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주간지 '아에라(AERA)'는 자민당 간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총리 머릿속에는 '도쿄올림픽을 대성공시켜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연임을 결정하고, 이후 기세를 몰아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시나리오로 꽉 차 있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견을 못 단다."

"스가 총리는 '전문성 있는 의견을 듣기 위해 분과회를 설치했지, 올림픽 결정은 이쪽(내각)에서 한다'고 자주 말한다. '더 이상 거슬리는 목소리를 낸다면 분과회를 안 열겠다'며 제동을 걸 가능성도 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5월 31일자 1면 머릿기사로 “감염증 전문가들이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도쿄올림픽 관련 제언을 할 수 없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일본 마이니치신문이 5월 31일자 1면 머릿기사로 “감염증 전문가들이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도쿄올림픽 관련 제언을 할 수 없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입 막음' 논란 보도 직후

오미 회장은 왜 갑자기 직언(直言)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요. 그 배경을 짐작게 하는 보도가 발언 이틀 전(5월 31일)에 있었습니다.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최근 분과회가 정부의 올림픽 추진에 부정적인 견해를 발표하려다 정식 논의를 하지 못한 채 중단됐다"고 전했습니다.

분과회가 감염 상황을 4단계로 나눠 단계별로 올림픽에 관해 제언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전문가들이 단계별 대응을 거론하는 것을 정부가 싫어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면서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분과회 사무국은 일본 총리와 내각을 보좌·지원하는 정부 기관인 내각관방(內閣官房)이 맡고 있습니다.

실제로 분과회 구성원인 다테다 가즈히로(館田一博) 도호(東邦)대 교수는 "도쿄(東京)에 긴급사태 선언이 나온 상황에서 올림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모두의 컨센서스(다수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기자들에게 밝혔습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본 정부가 분과회에 '입 막음'을 시도하자, 오미 회장이 국회를 무대로 '장외 투쟁'에 나섰다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물론, 나중에 올림픽 강행으로 의료붕괴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이미 경종을 울렸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는 7월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열릴 국립경기장 앞 오륜 마크 조형물이 불을 밝히고 있다.오는 7월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열릴 국립경기장 앞 오륜 마크 조형물이 불을 밝히고 있다.

■긴급사태 해제…'대격돌' 예고

도쿄올림픽 개막식(7월 23일)은 채 50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돌연 불거진 오미 회장의 '반란'에 일본 정부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듯'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긁어모은 어용학자 중심의 전문가 집단에서조차 '올림픽 반대론'이 강하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입니다.

도쿄(東京) 등에 발령된 긴급사태는 이미 두 차례나 연장돼 오는 20일 해제 여부가 다시 결정됩니다. 올림픽 개막 불과 한 달여 전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반드시 전문가 분과회의 자문과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오미 회장이 이끄는 분과회가 "아직 긴급사태 해제는 안 된다", 또는 "긴급사태를 해제하더라도 올림픽 개최는 어렵다"는 등 부정적 의견을 낼 경우 적잖은 파장이 예상됩니다.

스가 총리는 자신이 중용한 전문가의 '직언'을 따를까요? 아니면 '손톱 밑 가시'를 뽑아 버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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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지금 올림픽? 정상 아냐”…日 어용학자의 반란, 왜?
    • 입력 2021-06-06 07:37:42
    • 수정2021-06-06 11:37:48
    특파원 리포트
'그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전문가 입장을 넘어서 착각하고 있다' '총리라도 된 듯 행색한다', 이런 분노가 폭발하고 있어요. (스가 총리가) 어용학자로서 곁에 둔 건데,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 적(敵)으로 보는 생각이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계열 주간지 '아에라(AERA)'가 전한 정부 관계자의 말입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을 자문하는 오미 시게루(尾身茂·72) 분과위원회 회장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잡지는 "스가 총리가 오미 회장의 모반(謀反·배반)에 격노하고 있다"는 제목을 뽑았습니다. 오미 회장은 누구이고, 어쨌길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의 분노를 산 걸까요.

오미 시게루 일본 정부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6월 2일,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올림픽 정상 아냐" 거수기의 반란?

오미 회장은 감염증 전문가(의학 박사)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국장을 거쳐 지역의료기능추진기구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 1년 반 가까이 일본 정부에 방역 대책을 조언하는 전문가 모임의 수장을 맡아 왔습니다.

'자문' '조언'이라고 하지만, 그의 역할은 늘 정부 판단을 추인해 주는 데 그쳤습니다. 스가 총리가 회견할 때마다 항상 옆에 서서 충실히 설명을 보탰고,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 대응을 적극 옹호해 왔습니다.

그런 오미 회장이 돌변했습니다. 지난 2일 중의원(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입니다.

"팬더믹(대유행) 상황에서 올림픽을 하겠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대회를) 하는지 목적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대단히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일반 시민은 따라오지 않는다.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규모를 최소화하고, 관리 체계를 최대한 강화하는 것이 주최자의 의무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왼쪽)와 오미 시게루 코로나19 대책 분과위원회 회장이 도쿄 총리관저에서 회견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TV로 축제 보는 심경 아느냐?"

스가 총리와 '찰떡 공조'를 보여온 오미 회장의 이런 발언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작심 발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틀 뒤인 4일 중의원 후생위원회에선 수위를 더 높였습니다.

"정말로 (개최를) 한다면 나는 긴급사태 선언 아래에서 올림픽 따위는 절대로 피할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밖에 뛰쳐나가 술 마시고, 어깨 걸고 응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 최선을 다해 자숙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찬 순간을 TV로 지켜보는 심정이 어떻겠냐."

야당은 반겼습니다. 나가츠마 아키라(長妻昭) 입헌민주당 부대표는 "'아이들이 '운동회는 중지됐는데 올림픽은 왜 하느냐'고 질문할 때 부모는 뭐라고 답해야 하느냐'며 오미 회장 발언에 화답했습니다.

오미 회장이 이제 서야 감염증 전문가로서의 소신을 되찾은 건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발언이 일본 정부의 올림픽 강행 의지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주간지 '아에라(AERA)'는 자민당 간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총리 머릿속에는 '도쿄올림픽을 대성공시켜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연임을 결정하고, 이후 기세를 몰아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시나리오로 꽉 차 있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견을 못 단다."

"스가 총리는 '전문성 있는 의견을 듣기 위해 분과회를 설치했지, 올림픽 결정은 이쪽(내각)에서 한다'고 자주 말한다. '더 이상 거슬리는 목소리를 낸다면 분과회를 안 열겠다'며 제동을 걸 가능성도 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5월 31일자 1면 머릿기사로 “감염증 전문가들이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도쿄올림픽 관련 제언을 할 수 없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입 막음' 논란 보도 직후

오미 회장은 왜 갑자기 직언(直言)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요. 그 배경을 짐작게 하는 보도가 발언 이틀 전(5월 31일)에 있었습니다.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최근 분과회가 정부의 올림픽 추진에 부정적인 견해를 발표하려다 정식 논의를 하지 못한 채 중단됐다"고 전했습니다.

분과회가 감염 상황을 4단계로 나눠 단계별로 올림픽에 관해 제언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전문가들이 단계별 대응을 거론하는 것을 정부가 싫어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면서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분과회 사무국은 일본 총리와 내각을 보좌·지원하는 정부 기관인 내각관방(內閣官房)이 맡고 있습니다.

실제로 분과회 구성원인 다테다 가즈히로(館田一博) 도호(東邦)대 교수는 "도쿄(東京)에 긴급사태 선언이 나온 상황에서 올림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모두의 컨센서스(다수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기자들에게 밝혔습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본 정부가 분과회에 '입 막음'을 시도하자, 오미 회장이 국회를 무대로 '장외 투쟁'에 나섰다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물론, 나중에 올림픽 강행으로 의료붕괴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이미 경종을 울렸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는 7월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열릴 국립경기장 앞 오륜 마크 조형물이 불을 밝히고 있다.
■긴급사태 해제…'대격돌' 예고

도쿄올림픽 개막식(7월 23일)은 채 50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돌연 불거진 오미 회장의 '반란'에 일본 정부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듯'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긁어모은 어용학자 중심의 전문가 집단에서조차 '올림픽 반대론'이 강하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입니다.

도쿄(東京) 등에 발령된 긴급사태는 이미 두 차례나 연장돼 오는 20일 해제 여부가 다시 결정됩니다. 올림픽 개막 불과 한 달여 전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반드시 전문가 분과회의 자문과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오미 회장이 이끄는 분과회가 "아직 긴급사태 해제는 안 된다", 또는 "긴급사태를 해제하더라도 올림픽 개최는 어렵다"는 등 부정적 의견을 낼 경우 적잖은 파장이 예상됩니다.

스가 총리는 자신이 중용한 전문가의 '직언'을 따를까요? 아니면 '손톱 밑 가시'를 뽑아 버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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