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한열 열사 생애기록 공개

입력 2021.06.08 (12:00) 수정 2021.06.0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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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생애 기록이 공개됐습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오늘(8일) 이한열 열사의 생애 기록 38건을 복원해 공개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민주화 시위과정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습니다.

이번 복원된 기록은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유품으로, 고교생 시절의 기록과 압수수색 영장, 부검결과 등 87년 6월 당시 항쟁과 관련된 기록들입니다.

지난해 5월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국가기록원에 복원 지원을 요청했고, 국가기록원이 올해 2월 중순부터 3개월간 복원 작업을 해왔습니다.

특히 이한열 열사의 일기 'My Life', 고교생 특별 수련기 등이 온라인으로 처음 공개됐습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이 당한 수모를 이를 갈며 보았다…더욱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역사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1982.12.26)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오늘은 한 해를 보내는 기분이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올해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바램이 컸던 해라고 본다.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1982.12.31)

"오후에는 ‘도산사상’이란 책을 읽었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성실”이란 두 글자가 내 마음을 몹시 흥분하게 했다. ‘성은 하늘의 도리요,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그렇다. 인간은 모든 일에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의 참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또 한층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다."(1983.01.03)
고교 시절 일기 ‘My Life’ (1982.12.20~1983.02.07)고교 시절 일기 ‘My Life’ (1982.12.20~1983.02.07)

"나와 사회와 국가를 이을 수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야 한다."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로잡아… 튼튼한 겨레의 건물을 짓는 것”

고교생 특별수련기(1984)고교생 특별수련기(1984)
"학과시간에는 저명한 인사님들의 강의를 통하여 우리의 자아를 기르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국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며, 제 자신을 이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련을 통하여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 결여되었던 점을 보충할 수 있었고, 좀 더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버님, 어머님께 좀 더 걱정을 덜어드리고, 어엿한 자식이 될 겁니다."

이한열의 편지(1984)이한열의 편지(1984)

이번 복원된 기록에는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으로 시작하는 글에는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위독한 상황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이하기까지 겪었던 사건과 감정도 담겼습니다.

"한열이가 위독하대, 무어가 위독해. 한열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때 하늘이 팽 돌면서 앞이 보이지를 않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이 한열이래, 우리 한열이래. 왜 이래요? 한열이가 왜 저래요?"
"에라 이놈의 자식아… 너가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서울로 대학을 보내지나 말 것을. 서울로만 가면 좋을 줄 알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 놓니 살아서 천리길을 죽어서 천리길로 전라남도 광주 땅 망월동으로 오다니 에라 이놈의 자식아…."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

이한열 열사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과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 기록도 공개됐습니다.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에는 당시 주치의가 이 열사의 머릿속에서 발견된 이물질을 분석한 결과, 직접적인 사인이 ‘최루탄 피격’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1987)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1987)

이밖에도 6월 항쟁의 현장이 담겨있는 사진도 대거 복원됐습니다. 명동성당 시위 현장,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이애주 선생의 살풀이 춤, 영결식에 참여한 연세대 백양로 인파 등의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아울러 '민주국민장 실황'이 녹음되어 있는 오디오 테이프를 복원했습니다. 해당 파일은 1987년 7월 9일 거행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녹음본으로, 故문익환 목사의 추도사와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오열하는 음성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원된 기록물은 국가기록원 누리집(http://www.archives.go.kr)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향후 이한열기념사업회(http://www.Ieememorial.or.kr), e-뮤지엄(http://www.emuseum.go.kr)에서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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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한열 열사 생애기록 공개
    • 입력 2021-06-08 12:00:21
    • 수정2021-06-08 12:11:17
    취재K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생애 기록이 공개됐습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오늘(8일) 이한열 열사의 생애 기록 38건을 복원해 공개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민주화 시위과정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습니다.

이번 복원된 기록은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유품으로, 고교생 시절의 기록과 압수수색 영장, 부검결과 등 87년 6월 당시 항쟁과 관련된 기록들입니다.

지난해 5월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국가기록원에 복원 지원을 요청했고, 국가기록원이 올해 2월 중순부터 3개월간 복원 작업을 해왔습니다.

특히 이한열 열사의 일기 'My Life', 고교생 특별 수련기 등이 온라인으로 처음 공개됐습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이 당한 수모를 이를 갈며 보았다…더욱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역사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1982.12.26)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오늘은 한 해를 보내는 기분이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올해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바램이 컸던 해라고 본다.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1982.12.31)

"오후에는 ‘도산사상’이란 책을 읽었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성실”이란 두 글자가 내 마음을 몹시 흥분하게 했다. ‘성은 하늘의 도리요,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그렇다. 인간은 모든 일에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의 참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또 한층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다."(1983.01.03)
고교 시절 일기 ‘My Life’ (1982.12.20~1983.02.07)
"나와 사회와 국가를 이을 수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야 한다."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로잡아… 튼튼한 겨레의 건물을 짓는 것”

고교생 특별수련기(1984)
"학과시간에는 저명한 인사님들의 강의를 통하여 우리의 자아를 기르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국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며, 제 자신을 이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련을 통하여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 결여되었던 점을 보충할 수 있었고, 좀 더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버님, 어머님께 좀 더 걱정을 덜어드리고, 어엿한 자식이 될 겁니다."

이한열의 편지(1984)
이번 복원된 기록에는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으로 시작하는 글에는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위독한 상황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이하기까지 겪었던 사건과 감정도 담겼습니다.

"한열이가 위독하대, 무어가 위독해. 한열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때 하늘이 팽 돌면서 앞이 보이지를 않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이 한열이래, 우리 한열이래. 왜 이래요? 한열이가 왜 저래요?"
"에라 이놈의 자식아… 너가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서울로 대학을 보내지나 말 것을. 서울로만 가면 좋을 줄 알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 놓니 살아서 천리길을 죽어서 천리길로 전라남도 광주 땅 망월동으로 오다니 에라 이놈의 자식아…."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
이한열 열사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과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 기록도 공개됐습니다.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에는 당시 주치의가 이 열사의 머릿속에서 발견된 이물질을 분석한 결과, 직접적인 사인이 ‘최루탄 피격’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1987)
이밖에도 6월 항쟁의 현장이 담겨있는 사진도 대거 복원됐습니다. 명동성당 시위 현장,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이애주 선생의 살풀이 춤, 영결식에 참여한 연세대 백양로 인파 등의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아울러 '민주국민장 실황'이 녹음되어 있는 오디오 테이프를 복원했습니다. 해당 파일은 1987년 7월 9일 거행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녹음본으로, 故문익환 목사의 추도사와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오열하는 음성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원된 기록물은 국가기록원 누리집(http://www.archives.go.kr)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향후 이한열기념사업회(http://www.Ieememorial.or.kr), e-뮤지엄(http://www.emuseum.go.kr)에서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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