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묻지마 범죄’ 피해자들에게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

입력 2021.06.09 (07:00) 수정 2021.06.0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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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택시기사 살인사건 피해자의 영정과 유품.분당 택시기사 살인사건 피해자의 영정과 유품.

"그 날 아버지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는 그 범인한테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우리 아버지였을 뿐이고…."

지난달 말, 분당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피해자 69살 이 모 씨의 유족을 만났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아버지가 숨진 황망한 상황. 가족들은 심각한 무력감과 분노, 억울함,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3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하며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했던 가장, 자식들과 손주를 끔찍이도 아꼈던 자상한 아빠이자 할아버지였던 피해자 이 씨. 범인은 검찰 조사에서 '채팅으로 알게 된 여성을 만나 살해하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분풀이'로 자신이 타고 있던 택시기사를 살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저 화가 난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을 무참히 해한 '묻지마 범죄'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이미 숨졌고,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서도 모든 범죄 정황은 가해자의 입을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인의 동생은 이 점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가해자 입을 통해서 모든 게 증언되는 상황인데, 진짜... 죽으면 지는 거더라고요. 차라리 오빠가 그냥 다친거였다면... 중환자실에라도 있다면 좋겠어요.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재판 때까지 그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유족들은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신상공개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올리고, 청원 동의를 요청하는 댓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피해 유족이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며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현재까지 5만여 명이 동의했다.피해 유족이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며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현재까지 5만여 명이 동의했다.

■ 유족들 "부검이나 심리상담 등 수사 과정에서 배려 부족"

유족들은 고인의 부검과 장례 과정에서도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부검을 반대했지만, '강력범죄 피해자는 무조건 부검을 해야 한다, 유가족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경찰의 말에 결국 허락해야 했습니다.

부검이 끝나고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초반에 봤을 때랑 부검이 끝나고 영안실 입관할 때 봤을 때랑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게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지 손도 크게 다쳤는데 그런 부분도 처리를 안 해주셨더라고요. 사건이 떠올라서 공포감도 느껴지고... 너무 참혹하죠."

경찰이 제공한 심리상담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몰랐던 상담사에게 처음부터 설명하느라 오히려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상담을 받으러 가니까 '어떻게 오셨냐'고 그러더래요. 상담해주시는 분한테 설명했더니 오히려 '어머, 어머. 그런 일 겪으셔서 어떡하냐'고.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KBS와 인터뷰 중인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KBS와 인터뷰 중인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 김태경 교수 "범죄 피해 유족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 변해야"

강력범죄 트라우마 전문통합지원기관인 서울동부스마일센터 센터장이기도 한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수사기관에서 범죄 피해 유족들을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망 고지' 단계에서의 유족 보호입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유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알려줬는지가 유족들의 후유증 정도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반드시 2인 이상이 직접 방문해서' 사망 고지를 해야 한다"면서 "한 명은 사망 고지를 하고, 다른 한 명은 유족이 충격으로 인해 보여주는 다양한 징후들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사건 직후 4~8주 안에 심리·사회적, 법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면서 "장례나 서류 절차 등 유족들이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들을 대신 해주는, 소소해 보이지만 너무 중요한 절차를 도와주는 것부터 국가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신에 대한 신원확인이나 부검 과정에서도 배려가 필요합니다. 비교적 온전히 보전된 부위 위주로, 가장 잘 수습된 상태로 시신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유족들의 충격을 줄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유족 심리 회복의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신들이 살인으로 가족들을 잃은 만큼의 벌이 가해자에게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사회가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요. 그것은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회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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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묻지마 범죄’ 피해자들에게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
    • 입력 2021-06-09 07:00:57
    • 수정2021-06-09 14:13:15
    취재후·사건후
분당 택시기사 살인사건 피해자의 영정과 유품.
"그 날 아버지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군가는 그 범인한테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우리 아버지였을 뿐이고…."

지난달 말, 분당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피해자 69살 이 모 씨의 유족을 만났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아버지가 숨진 황망한 상황. 가족들은 심각한 무력감과 분노, 억울함,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3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하며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했던 가장, 자식들과 손주를 끔찍이도 아꼈던 자상한 아빠이자 할아버지였던 피해자 이 씨. 범인은 검찰 조사에서 '채팅으로 알게 된 여성을 만나 살해하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분풀이'로 자신이 타고 있던 택시기사를 살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저 화가 난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을 무참히 해한 '묻지마 범죄'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이미 숨졌고,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서도 모든 범죄 정황은 가해자의 입을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인의 동생은 이 점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가해자 입을 통해서 모든 게 증언되는 상황인데, 진짜... 죽으면 지는 거더라고요. 차라리 오빠가 그냥 다친거였다면... 중환자실에라도 있다면 좋겠어요.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재판 때까지 그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유족들은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신상공개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올리고, 청원 동의를 요청하는 댓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피해 유족이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며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현재까지 5만여 명이 동의했다.
■ 유족들 "부검이나 심리상담 등 수사 과정에서 배려 부족"

유족들은 고인의 부검과 장례 과정에서도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부검을 반대했지만, '강력범죄 피해자는 무조건 부검을 해야 한다, 유가족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경찰의 말에 결국 허락해야 했습니다.

부검이 끝나고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초반에 봤을 때랑 부검이 끝나고 영안실 입관할 때 봤을 때랑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게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지 손도 크게 다쳤는데 그런 부분도 처리를 안 해주셨더라고요. 사건이 떠올라서 공포감도 느껴지고... 너무 참혹하죠."

경찰이 제공한 심리상담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몰랐던 상담사에게 처음부터 설명하느라 오히려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상담을 받으러 가니까 '어떻게 오셨냐'고 그러더래요. 상담해주시는 분한테 설명했더니 오히려 '어머, 어머. 그런 일 겪으셔서 어떡하냐'고.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KBS와 인터뷰 중인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 김태경 교수 "범죄 피해 유족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 변해야"

강력범죄 트라우마 전문통합지원기관인 서울동부스마일센터 센터장이기도 한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수사기관에서 범죄 피해 유족들을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망 고지' 단계에서의 유족 보호입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유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알려줬는지가 유족들의 후유증 정도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반드시 2인 이상이 직접 방문해서' 사망 고지를 해야 한다"면서 "한 명은 사망 고지를 하고, 다른 한 명은 유족이 충격으로 인해 보여주는 다양한 징후들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사건 직후 4~8주 안에 심리·사회적, 법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면서 "장례나 서류 절차 등 유족들이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들을 대신 해주는, 소소해 보이지만 너무 중요한 절차를 도와주는 것부터 국가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신에 대한 신원확인이나 부검 과정에서도 배려가 필요합니다. 비교적 온전히 보전된 부위 위주로, 가장 잘 수습된 상태로 시신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유족들의 충격을 줄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유족 심리 회복의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신들이 살인으로 가족들을 잃은 만큼의 벌이 가해자에게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사회가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요. 그것은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회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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