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규명’ 그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입력 2021.06.14 (16:21) 수정 2021.06.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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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상(1932~2021)강덕상(1932~2021)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학살됐던 자료를 일평생 수집하고 연구하며 증거를 없애려는 세력과 맞서온 재일 사학자 강덕상 前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초대 관장이 지난 12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0년대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실체를 파헤쳐 온 강 전 관장은 일관되게 조선인 학살이 계엄령 하에서 군대와 경찰의 주도로 자행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을 촉구해 왔습니다.

■ 강덕상(姜德相), 시나노 사토루(神農智), 그리고 다시 강덕상(姜德相)

193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간 강 전 관장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창씨개명을 했습니다(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인터뷰).

그리고 중학생 때인 1945년 소개지인 미야기현에서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때만 해도 스스로가 충실한 황국 소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1950년 4월 와세다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학생 운동에 연루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다시 복학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시나노 사토루(神農智)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덕상이라는 한국 이름을 되찾은 때는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미야다 세스코(宮田節子) 등과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조직할 무렵 그는 동료들에게 강덕상이라는 본명을 밝힙니다. 위의 책에서 "자기를 숨기고서는 어떠한 진전도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일본인 시나노 사토루가 아니라 한국인 강덕상으로서 1958년 5월부터 10여 년 동안 500여 회에 걸친 연구회 활동을 통해 조선총독부 주요 간부들의 육성을 녹음해 기록으로 남기고 조선 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32년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 모습(출처:일본 재일한인역사자료관)1932년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 모습(출처:일본 재일한인역사자료관)

■ 일본에 반환된 미국 자료 보고 관동대지진 연구

그 무렵 그는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와 정부 고위관료들의 수기, 시민·경찰·군인의 증언을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조선침략을 학술적으로 정리했고 그 와중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고 증언했습니다.( 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인터뷰)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의 귀띔으로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을 때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간 자료를 반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가운데 해군의 비밀문서 속에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전남사학 2004년 12월호)

그는 이 자료들을 분석해 1963년 <관동대진재와 조선인>이라는 책을, 이후의 연구 성과를 모아 1975년엔 <일본 관동대진재>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2003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보완 수정해 <관동대진재·학살의 기억>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2005년 한국어로 번역돼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그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일본 민중의 우발적인 방어나 조선인의 소요에 대비한 예비행위가 아니라 거세지는 식민지의 저항 운동을 억압하려는 일본 정부의 교묘한 술책이었음을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며 거듭 입증해 왔습니다.


■ "시무(時務)의 연구자 강덕상"…일본 정부는 아직도 묵묵부답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는 당시까지 누구도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았던 분야로 그가 연구에 나선 이후에야 역사적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89년 4월 일본 국립대인 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 교수로 임용됐는데 이 또한 재일동포로서는 최초였습니다. 1995년 퇴임 후 시가현립대 인간문화학부 교수를 거쳐 명예교수가 됐고.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을 지냈습니다.

제자들이 주축이 된 '강덕상구술간행위원회'가 지난 4월 일본에서 발간한 강 선생 평전의 제목도 '시무(時務)의 연구자 강덕상'입니다. 간행위원회는 이 책이 "투병 중인 강 전 관장이 재일 역사 연구자로서 살아온 삶과 철학 등을 알리기 위해 기록한 도서"라고 밝혔습니다.

'시무' 란 '당장 해야 할 긴급한 일'이라는 뜻으로 강 선생이 평생을 바쳐온 활동을 수식하는 표현입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실체 규명은 말 그대로 당장 해야 할 긴급한 일이었고 그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강 전 관장은 2015년 3월 1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98년이 되는 해입니다. 2년 뒤면 꼭 100년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참혹한 학살의 실체는 강 전 관장의 선구적인 연구 덕분에 공식 기록은 물론 각종 증언과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집단 학살을 자경단 차원에서 저지른 일로 치부할 뿐 정부 차원의 사과는 물론 공식 조사조차 없습니다.

참고자료:
-「姜德相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이 말하는 '日本과 나'」(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 미야타 세쓰코,『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혜안,2002)
- 강덕상,『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역사비평사, 2005)
- 강덕상,「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8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들 -1975년 간『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와 2003년 간 『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학살의 기억』의 회고」(전남사학 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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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규명’ 그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 입력 2021-06-14 16:21:51
    • 수정2021-06-14 16:48:04
    취재K
강덕상(1932~2021)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학살됐던 자료를 일평생 수집하고 연구하며 증거를 없애려는 세력과 맞서온 재일 사학자 강덕상 前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초대 관장이 지난 12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0년대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실체를 파헤쳐 온 강 전 관장은 일관되게 조선인 학살이 계엄령 하에서 군대와 경찰의 주도로 자행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을 촉구해 왔습니다.

■ 강덕상(姜德相), 시나노 사토루(神農智), 그리고 다시 강덕상(姜德相)

193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간 강 전 관장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창씨개명을 했습니다(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인터뷰).

그리고 중학생 때인 1945년 소개지인 미야기현에서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때만 해도 스스로가 충실한 황국 소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1950년 4월 와세다대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학생 운동에 연루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다시 복학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시나노 사토루(神農智)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덕상이라는 한국 이름을 되찾은 때는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미야다 세스코(宮田節子) 등과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조직할 무렵 그는 동료들에게 강덕상이라는 본명을 밝힙니다. 위의 책에서 "자기를 숨기고서는 어떠한 진전도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일본인 시나노 사토루가 아니라 한국인 강덕상으로서 1958년 5월부터 10여 년 동안 500여 회에 걸친 연구회 활동을 통해 조선총독부 주요 간부들의 육성을 녹음해 기록으로 남기고 조선 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32년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 모습(출처:일본 재일한인역사자료관)
■ 일본에 반환된 미국 자료 보고 관동대지진 연구

그 무렵 그는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와 정부 고위관료들의 수기, 시민·경찰·군인의 증언을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조선침략을 학술적으로 정리했고 그 와중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고 증언했습니다.( 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인터뷰)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의 귀띔으로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을 때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간 자료를 반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가운데 해군의 비밀문서 속에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전남사학 2004년 12월호)

그는 이 자료들을 분석해 1963년 <관동대진재와 조선인>이라는 책을, 이후의 연구 성과를 모아 1975년엔 <일본 관동대진재>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2003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보완 수정해 <관동대진재·학살의 기억>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2005년 한국어로 번역돼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됐습니다.

그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일본 민중의 우발적인 방어나 조선인의 소요에 대비한 예비행위가 아니라 거세지는 식민지의 저항 운동을 억압하려는 일본 정부의 교묘한 술책이었음을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며 거듭 입증해 왔습니다.


■ "시무(時務)의 연구자 강덕상"…일본 정부는 아직도 묵묵부답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는 당시까지 누구도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았던 분야로 그가 연구에 나선 이후에야 역사적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89년 4월 일본 국립대인 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 교수로 임용됐는데 이 또한 재일동포로서는 최초였습니다. 1995년 퇴임 후 시가현립대 인간문화학부 교수를 거쳐 명예교수가 됐고.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을 지냈습니다.

제자들이 주축이 된 '강덕상구술간행위원회'가 지난 4월 일본에서 발간한 강 선생 평전의 제목도 '시무(時務)의 연구자 강덕상'입니다. 간행위원회는 이 책이 "투병 중인 강 전 관장이 재일 역사 연구자로서 살아온 삶과 철학 등을 알리기 위해 기록한 도서"라고 밝혔습니다.

'시무' 란 '당장 해야 할 긴급한 일'이라는 뜻으로 강 선생이 평생을 바쳐온 활동을 수식하는 표현입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실체 규명은 말 그대로 당장 해야 할 긴급한 일이었고 그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강 전 관장은 2015년 3월 1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98년이 되는 해입니다. 2년 뒤면 꼭 100년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참혹한 학살의 실체는 강 전 관장의 선구적인 연구 덕분에 공식 기록은 물론 각종 증언과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아직도 조선인 집단 학살을 자경단 차원에서 저지른 일로 치부할 뿐 정부 차원의 사과는 물론 공식 조사조차 없습니다.

참고자료:
-「姜德相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이 말하는 '日本과 나'」(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 미야타 세쓰코,『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혜안,2002)
- 강덕상,『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역사비평사, 2005)
- 강덕상,「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8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들 -1975년 간『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와 2003년 간 『칸토오대진재(關東大震災) 학살의 기억』의 회고」(전남사학 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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