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밑동파기’ 철거…있으나 마나 “해체계획서”

입력 2021.06.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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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철거현장. 제보자 제공.2019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철거현장. 제보자 제공.

6층 높이의 오래된 온천 건물이 보입니다. 주변 건물들이 다 허물어진 것에 비하면 온천 건물은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건물 외관을 둘러싼 붉은 벽돌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면, 이제 막 철거를 시작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2019년 5월,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철거 현장입니다.

철거를 위해 주황색 굴착기가 동원됐습니다. 굴착기의 가장 끝부분 '버켓'이 향하는 곳, 건물의 아래층입니다. 위층은 그대로 놔두고, 아래층부터 부수는 이른바 '밑동 파기' 기법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같은 건물의 모습입니다. 건물을 둘러싼 벽돌은 떨어져 나가버렸지만, 건물 맨 꼭대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간판으로 온천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건물을 보니, 완전히 기울어버린 모습입니다. 밑이 파이다 보니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린 겁니다.

'밑동 파기' 기법이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건물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4구역 철거현장 모습.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4구역 철거현장 모습.

17명의 사상자가 난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의 붕괴사고에서도 같은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건물의 위층부터 철거하겠다는 해체계획서를 무시하고, 아래층부터 철거를 시작한 겁니다. 결국 건물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시내버스를 덮쳤습니다.

2019년 철거가 진행된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민.2019년 철거가 진행된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민.

계림2구역 주민들은 "학동 붕괴사고가 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계림2구역 주민인 변원섭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도 안전조치가 미흡하다며 여러 차례 항의했었다. 학동 붕괴사고와 같은 방식으로 철거가 진행됐었다니 무서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변 씨는 또 "과거에도 바람 불고 비 오면 찢어지는 천막이 유일한 안전장치였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다른 철거현장에서도 '해체계획서' 무시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철거현장.  해체계획서와 달리 아래층부터 철거한 아파트를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모습.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철거현장. 해체계획서와 달리 아래층부터 철거한 아파트를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모습.

광주 다른 철거현장에서도 학동 붕괴사고 현장처럼 해체계획서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재건축 철거현장입니다. 해체계획서엔 5층 높이 아파트를 상층부터 철거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4층과 5층은 그대로 두고, 아래층 먼저 철거한 겁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해체계획서.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해체계획서.

현장 관계자는 "해당 아파트 동과 인근 아파트가 밀접해 있어 소음과 분진 등 민원이 잇따랐다. 다른 아파트들은 해체계획서에 따라 철거했지만, 민원이 잇따른 동만 빨리 철거하기 위해 아래층부터 철거했다"고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광주 북구, 시공사 3곳 건축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고발


관할 구청이 이러한 사실을 감리업체로부터 보고받은 건 지난달(5월) 말이었습니다. 아파트 한 개 동이 해체계획서와 다른 방식으로 철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확인해 보니, 다른 아파트 한 개 동도 해체계획서를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광주 북구는 현대산업개발을 포함한 시공사 3곳을 건축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또 위반사항을 빠뜨려 보고한 감리업체에도 과태료 처분을 내렸습니다.

해체계획서는 있으나 마나고, 사고위험을 높이는 대신 공사 기간과 비용을 낮추는 이른바 '밑동 파기' 기법이 만연한 건축물 철거 현장. 사고가 난 학동 4구역에서도 고발과 시정조치가 조금이라도 빨리 이뤄졌다면,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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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곳곳에서 ‘밑동파기’ 철거…있으나 마나 “해체계획서”
    • 입력 2021-06-15 11:23:12
    취재K
2019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철거현장. 제보자 제공.
6층 높이의 오래된 온천 건물이 보입니다. 주변 건물들이 다 허물어진 것에 비하면 온천 건물은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건물 외관을 둘러싼 붉은 벽돌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면, 이제 막 철거를 시작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2019년 5월,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철거 현장입니다.

철거를 위해 주황색 굴착기가 동원됐습니다. 굴착기의 가장 끝부분 '버켓'이 향하는 곳, 건물의 아래층입니다. 위층은 그대로 놔두고, 아래층부터 부수는 이른바 '밑동 파기' 기법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같은 건물의 모습입니다. 건물을 둘러싼 벽돌은 떨어져 나가버렸지만, 건물 맨 꼭대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간판으로 온천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건물을 보니, 완전히 기울어버린 모습입니다. 밑이 파이다 보니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린 겁니다.

'밑동 파기' 기법이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건물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4구역 철거현장 모습.
17명의 사상자가 난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의 붕괴사고에서도 같은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건물의 위층부터 철거하겠다는 해체계획서를 무시하고, 아래층부터 철거를 시작한 겁니다. 결국 건물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시내버스를 덮쳤습니다.

2019년 철거가 진행된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구역 주민.
계림2구역 주민들은 "학동 붕괴사고가 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계림2구역 주민인 변원섭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에도 안전조치가 미흡하다며 여러 차례 항의했었다. 학동 붕괴사고와 같은 방식으로 철거가 진행됐었다니 무서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변 씨는 또 "과거에도 바람 불고 비 오면 찢어지는 천막이 유일한 안전장치였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다른 철거현장에서도 '해체계획서' 무시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철거현장.  해체계획서와 달리 아래층부터 철거한 아파트를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모습.
광주 다른 철거현장에서도 학동 붕괴사고 현장처럼 해체계획서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재건축 철거현장입니다. 해체계획서엔 5층 높이 아파트를 상층부터 철거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4층과 5층은 그대로 두고, 아래층 먼저 철거한 겁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단지 해체계획서.
현장 관계자는 "해당 아파트 동과 인근 아파트가 밀접해 있어 소음과 분진 등 민원이 잇따랐다. 다른 아파트들은 해체계획서에 따라 철거했지만, 민원이 잇따른 동만 빨리 철거하기 위해 아래층부터 철거했다"고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광주 북구, 시공사 3곳 건축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고발


관할 구청이 이러한 사실을 감리업체로부터 보고받은 건 지난달(5월) 말이었습니다. 아파트 한 개 동이 해체계획서와 다른 방식으로 철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확인해 보니, 다른 아파트 한 개 동도 해체계획서를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광주 북구는 현대산업개발을 포함한 시공사 3곳을 건축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또 위반사항을 빠뜨려 보고한 감리업체에도 과태료 처분을 내렸습니다.

해체계획서는 있으나 마나고, 사고위험을 높이는 대신 공사 기간과 비용을 낮추는 이른바 '밑동 파기' 기법이 만연한 건축물 철거 현장. 사고가 난 학동 4구역에서도 고발과 시정조치가 조금이라도 빨리 이뤄졌다면,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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