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오스트리아의 ‘코레아의 신부’, 그리고 조선 왕실 갑옷

입력 2021.06.19 (09:36) 수정 2021.06.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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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초연된 발레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 공연 포스터. 배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여성들이 입은 옷은 기모노처럼 보인다. (출처=HAUS DER MUSIK 웹페이지 갈무리)1897년 초연된 발레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 공연 포스터. 배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여성들이 입은 옷은 기모노처럼 보인다. (출처=HAUS DER MUSIK 웹페이지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15일 오스트리아를 국빈 방문했습니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수교한 지 129년 만에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첫 한국 대통령입니다. 양국 관계가 19세기부터 이어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오랜 사이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친구 정도라고 할까요.

수교 당시 조선은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고,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서구 열강들 틈에서 나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교가 백성들에게 주목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지구 반 바퀴 떨어진 작은 나라와 수교가 큰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코레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수교 2년 뒤인 1894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입니다.

당시 서구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수백 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중국,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두 나라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배권을 두고 조선땅에서 전쟁을 벌인 겁니다.

이런 관심은 예술인들에게도 이어진 것 같습니다. 1895년 오스트리아 궁정 발레단장이던 요제프 바이어(1852~1913)가 작곡하고, 요제프 하스라이터와 하인리히 레겔 쓴 극본 '코레아의 신부'는 1897년 빈 궁정 오페라하우스(현 국립오페라하우스)에 올려졌습니다.

1897년 ‘코레아의 신부’ 공연 안내 전단. 2014년 오스트리아 빈 국림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출처=연합뉴스)1897년 ‘코레아의 신부’ 공연 안내 전단. 2014년 오스트리아 빈 국림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출처=연합뉴스)

'코레아의 신부'는 조선인의 애국심을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왕자가 나라를 구하려고 전쟁에 나서고, 이 왕자를 사랑하는 조선의 여인이 함께 전장에 뛰어든다는 줄거리입니다. 청일전쟁이 묘사되진 않았지만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보면 이 전쟁이 모티프가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유럽 문화의 수도였던 빈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레 작품이 길어야 2년 공연되던 시기에 5년간 장기 공연됐고, 독일 함부르크에도 초청돼 무대에 올려졌다고 합니다.

'코레아의 신부'는 각각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1904)과 '투란도트'(1926)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코레아의 신부' 보다 앞선 아시아 배경의 작품으로는 일본을 소재로 한 영국의 오페레타 '미카도'(1885)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아시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입니다.

조선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연 포스터를 보면 왼쪽 배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은 1883년에는 왕명으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습니다. 최소한 저 포스터 제작자는 조선의 국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알고 있었던 거죠. 다만 포스터 속 여인의 복식은 일본 기모노에 가깝습니다. 당시 서구의 관심이 어디에 향해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코레아의 신부'는 공연 명맥이 끊겨 현재는 문서로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003년 연구자들이 악보 등을 찾아내 보도돼 처음 알려졌습니다.

빈 국립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 왕실의 상징인 발톱 다섯 개의 용이 장식돼 있다.빈 국립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 왕실의 상징인 발톱 다섯 개의 용이 장식돼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는 '코레아의 신부'와 비슷한 시기 전달된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있습니다. 빈 국립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입니다.

투구에는 왕실의 상징인 발톱 다섯 개의 용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습니다. 이마 가리개 부분엔 봉황도 조각돼 있습니다. 박물관은 조선 왕자의 갑옷과 투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소장품이 의미가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거의 유일한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라는 점입니다. 오스트리아 측 기록에 따르면 1892년 조오수호통상조약 이후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물로 전달한 것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이 소장한 것은 1894년이니까 수교 직후에 전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왕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는 일본과 미국에서도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소장 경위를 모릅니다. 수탈 문화재이거나 혼란한 틈을 탄 매입 문화재일 가능성이 큽니다.

2017년 우리나라에도 고종의 것으로 보이는 갑옷과 투구가 공개됐습니다. 고미술품 수집가가 영국의 사설 경매에서 사들여 우리나라로 들여 온 것입니다. 이것들은 1900년 독일인 골동품 상인이 일본에서 매입한 것을 한 영국인이 1902~1905년 구입해 소장해 왔다고 합니다.

모든 선물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종은 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갑옷과 투구를 선물했을까요? 전시를 기획한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트 빈 미술사 박물관 큐레이터는 KBS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전쟁과 관련된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이 오스트리아와 평화롭고 유익한 관계를 원했던 매우 강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다른 나라에 수교 선물로 갑옷과 투구를 선물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트리아를 특별히 생각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열강들이 앞다퉈 한반도를 침탈하던 시기,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힘을 빌려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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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6-19 09:36:23
    • 수정2021-06-19 13:54:14
    특파원 리포트
1897년 초연된 발레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 공연 포스터. 배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여성들이 입은 옷은 기모노처럼 보인다. (출처=HAUS DER MUSIK 웹페이지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15일 오스트리아를 국빈 방문했습니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수교한 지 129년 만에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첫 한국 대통령입니다. 양국 관계가 19세기부터 이어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오랜 사이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친구 정도라고 할까요.

수교 당시 조선은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고,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서구 열강들 틈에서 나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교가 백성들에게 주목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지구 반 바퀴 떨어진 작은 나라와 수교가 큰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코레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수교 2년 뒤인 1894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입니다.

당시 서구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수백 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중국,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두 나라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배권을 두고 조선땅에서 전쟁을 벌인 겁니다.

이런 관심은 예술인들에게도 이어진 것 같습니다. 1895년 오스트리아 궁정 발레단장이던 요제프 바이어(1852~1913)가 작곡하고, 요제프 하스라이터와 하인리히 레겔 쓴 극본 '코레아의 신부'는 1897년 빈 궁정 오페라하우스(현 국립오페라하우스)에 올려졌습니다.

1897년 ‘코레아의 신부’ 공연 안내 전단. 2014년 오스트리아 빈 국림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출처=연합뉴스)
'코레아의 신부'는 조선인의 애국심을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왕자가 나라를 구하려고 전쟁에 나서고, 이 왕자를 사랑하는 조선의 여인이 함께 전장에 뛰어든다는 줄거리입니다. 청일전쟁이 묘사되진 않았지만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보면 이 전쟁이 모티프가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유럽 문화의 수도였던 빈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레 작품이 길어야 2년 공연되던 시기에 5년간 장기 공연됐고, 독일 함부르크에도 초청돼 무대에 올려졌다고 합니다.

'코레아의 신부'는 각각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1904)과 '투란도트'(1926)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코레아의 신부' 보다 앞선 아시아 배경의 작품으로는 일본을 소재로 한 영국의 오페레타 '미카도'(1885)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아시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입니다.

조선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연 포스터를 보면 왼쪽 배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은 1883년에는 왕명으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습니다. 최소한 저 포스터 제작자는 조선의 국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알고 있었던 거죠. 다만 포스터 속 여인의 복식은 일본 기모노에 가깝습니다. 당시 서구의 관심이 어디에 향해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코레아의 신부'는 공연 명맥이 끊겨 현재는 문서로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003년 연구자들이 악보 등을 찾아내 보도돼 처음 알려졌습니다.

빈 국립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 왕실의 상징인 발톱 다섯 개의 용이 장식돼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는 '코레아의 신부'와 비슷한 시기 전달된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있습니다. 빈 국립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입니다.

투구에는 왕실의 상징인 발톱 다섯 개의 용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습니다. 이마 가리개 부분엔 봉황도 조각돼 있습니다. 박물관은 조선 왕자의 갑옷과 투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소장품이 의미가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거의 유일한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라는 점입니다. 오스트리아 측 기록에 따르면 1892년 조오수호통상조약 이후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물로 전달한 것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이 소장한 것은 1894년이니까 수교 직후에 전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왕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는 일본과 미국에서도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소장 경위를 모릅니다. 수탈 문화재이거나 혼란한 틈을 탄 매입 문화재일 가능성이 큽니다.

2017년 우리나라에도 고종의 것으로 보이는 갑옷과 투구가 공개됐습니다. 고미술품 수집가가 영국의 사설 경매에서 사들여 우리나라로 들여 온 것입니다. 이것들은 1900년 독일인 골동품 상인이 일본에서 매입한 것을 한 영국인이 1902~1905년 구입해 소장해 왔다고 합니다.

모든 선물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종은 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갑옷과 투구를 선물했을까요? 전시를 기획한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트 빈 미술사 박물관 큐레이터는 KBS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전쟁과 관련된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이 오스트리아와 평화롭고 유익한 관계를 원했던 매우 강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다른 나라에 수교 선물로 갑옷과 투구를 선물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트리아를 특별히 생각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열강들이 앞다퉈 한반도를 침탈하던 시기,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힘을 빌려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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