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은 한국의 젊은 사진작가 입니다. 또 한 명은 70년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태국의 참전용사입니다. 그는 올해 94세입니다. 그들은 단 한 번 만났습니다.
1. 현효제(라미현)작가
오래전부터 전세계를 돌며 환국전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액자에 담아 전달합니다. 전쟁 70여년이 지나고, 그때 스무살로 참전한 청년들은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봅니다.
사진속 노병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과 참전의 긍지가 하나하나 새겨진 주름살이 가득합니다.
현효제 작가와 그가 촬영한 한국전 참전용사들
사진을 전해 받는 노병들이 사진의 가격을 물어봅니다. 현 작가는 "당신은 이미 70년 전에 지불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가는 참전용사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 젊은 날의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우며, 하지만 의미있는 순간을 기억해 준다는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2. 2017년 7월
그때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참전용사들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한명 한명씩 반듯한 제복을 입은 노병들의 모습이 현효제 작가의 렌즈에 담겼습니다.
그런데 태국에서 온 참전용사 한 분의 주소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진 한 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카메라에 남았습니다.
3. 2020년 6월
3년이 지난 지난해 6월 코로나가 무섭게 번졌습니다. 우리 정부는 전세계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100만 장의 방역 마스크를 보냈습니다.
세상을 떠난 참전용사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마스크가 전달됐습니다.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도 태국의 참전용사 중 생존자와 유가족 430여 가구에 마스크를 보냈습니다.
지방 오지의 참전용사들과 주소지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참전용사들의 마스크는 반송돼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뒤 참전용사와 그 유가족들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간호병으로 참전했던 분셉 럿삼루어이의 손녀 어라눅 뜨리테위는 “할머니는 94세로 현재 알츠하이머병으로 치료 센터에 계신다”면서 할머니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마스크 수령) 지원서를 채울 수 없어 주민등록증 및 참전용사 카드를 대신 보냈다. / 출처-당시 연합뉴스
30여 편의 감사 편지중에는 장교로 참전했던 '쁘라딧 러씬'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70년이 지났지만 자신을 기억해준 한국 국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쁘라딧은 특히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3년전 서울을 방문해 당시 미국 전우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 전투', '폭찹힐 전투' 등 그가 간직한 고통스런 기억들도 풀어놨습니다 .
이 손편지들의 사연을 연합뉴스 방콕 특파원이 기사화했습니다.
쁘라딧 러씬이 마스크를 전달받고 한국대사관에 보낸 감사편지. 그는 반듯한 글씨체로 “몇 해 전에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미국 전우들을 만나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썼다.
한국에 있던 현효제 작가가 우연히 이 기사를 봤습니다. 3년전에 한국에 왔었다는 태국의 참전용사가 자신이 촬영한 그 분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의 명찰 속 태국어 이름을 확인해, 다시 주태국 대한민국대사관에 문의했습니다. 대사관의 답변이 왔습니다. 사진속 주인공은 '태국 육군 중위 쁘라딧 러씬'이 맞았습니다.
4. 2021년 6월
코로나로 결국 태국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혔습니다. 현효제 작가가 주태국 한국대사관에 사진을 보내, 대사관 무관부가 대신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4년만에 사진이 방콕에 도착했습니다.
6월 16일, 대한민국 대사관 김경렬 국방무관(육군 대령)이 사진을 들고 200km가 떨어진 '쁘라친부리'로 달려갔습니다.
94세의 노병은 건강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아직 백신을 맞지 못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집 입구에서 또 마스크를 갈고 촬영 장비를 다시 소독했습니다).
수많은 그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줬습니다. 손녀는 인터뷰 내내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입을 닦아줬습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뒤 70여년. 그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쁘라딧 러씬이 한국전 참전 당시 역시 태국에서 온 동료 간호장교들을 만난 뒤 그 사진 뒷면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끝부분에 “당신의 미소를 곧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적혀 있다. 그의 부인도 당시 간호사였다.
사진을 받은 94세의 노병은 '한강과 추위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죽은 전우들의 이야기를 한참을 이어갔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다음에 또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도 당신을 기억한다고도 말해드렸습니다.
태국군은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한국전에 참전했습니다. 6천326명이 참전해 136명이 전사하고 1천139명이 부상했으며, 5명은 실종됐습니다.
태국에는 아직도 (지난해 기준) 179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생존해 있습니다.
현효제 작가가 촬영한 태국군 참전용사 ‘쁘라딧 러씬’. 그는 ‘폭찹힐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올해 94세인 그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한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사진 속 참전용사가 당신입니까?
-
- 입력 2021-06-19 14:02:12
한 명은 한국의 젊은 사진작가 입니다. 또 한 명은 70년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태국의 참전용사입니다. 그는 올해 94세입니다. 그들은 단 한 번 만났습니다.
1. 현효제(라미현)작가
오래전부터 전세계를 돌며 환국전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액자에 담아 전달합니다. 전쟁 70여년이 지나고, 그때 스무살로 참전한 청년들은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봅니다.
사진속 노병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과 참전의 긍지가 하나하나 새겨진 주름살이 가득합니다.
사진을 전해 받는 노병들이 사진의 가격을 물어봅니다. 현 작가는 "당신은 이미 70년 전에 지불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둘 사라져가는 참전용사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 젊은 날의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우며, 하지만 의미있는 순간을 기억해 준다는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2. 2017년 7월
그때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참전용사들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한명 한명씩 반듯한 제복을 입은 노병들의 모습이 현효제 작가의 렌즈에 담겼습니다.
그런데 태국에서 온 참전용사 한 분의 주소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진 한 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카메라에 남았습니다.
3. 2020년 6월
3년이 지난 지난해 6월 코로나가 무섭게 번졌습니다. 우리 정부는 전세계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100만 장의 방역 마스크를 보냈습니다.
세상을 떠난 참전용사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마스크가 전달됐습니다.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도 태국의 참전용사 중 생존자와 유가족 430여 가구에 마스크를 보냈습니다.
지방 오지의 참전용사들과 주소지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참전용사들의 마스크는 반송돼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뒤 참전용사와 그 유가족들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30여 편의 감사 편지중에는 장교로 참전했던 '쁘라딧 러씬'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70년이 지났지만 자신을 기억해준 한국 국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쁘라딧은 특히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3년전 서울을 방문해 당시 미국 전우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 전투', '폭찹힐 전투' 등 그가 간직한 고통스런 기억들도 풀어놨습니다 .
이 손편지들의 사연을 연합뉴스 방콕 특파원이 기사화했습니다.
한국에 있던 현효제 작가가 우연히 이 기사를 봤습니다. 3년전에 한국에 왔었다는 태국의 참전용사가 자신이 촬영한 그 분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진의 명찰 속 태국어 이름을 확인해, 다시 주태국 대한민국대사관에 문의했습니다. 대사관의 답변이 왔습니다. 사진속 주인공은 '태국 육군 중위 쁘라딧 러씬'이 맞았습니다.
4. 2021년 6월
코로나로 결국 태국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혔습니다. 현효제 작가가 주태국 한국대사관에 사진을 보내, 대사관 무관부가 대신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4년만에 사진이 방콕에 도착했습니다.
6월 16일, 대한민국 대사관 김경렬 국방무관(육군 대령)이 사진을 들고 200km가 떨어진 '쁘라친부리'로 달려갔습니다.
94세의 노병은 건강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아직 백신을 맞지 못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집 입구에서 또 마스크를 갈고 촬영 장비를 다시 소독했습니다).
수많은 그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줬습니다. 손녀는 인터뷰 내내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입을 닦아줬습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뒤 70여년. 그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받은 94세의 노병은 '한강과 추위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죽은 전우들의 이야기를 한참을 이어갔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다음에 또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도 당신을 기억한다고도 말해드렸습니다.
태국군은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한국전에 참전했습니다. 6천326명이 참전해 136명이 전사하고 1천139명이 부상했으며, 5명은 실종됐습니다.
태국에는 아직도 (지난해 기준) 179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생존해 있습니다.
-
-
김원장 기자 kim9@kbs.co.kr
김원장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