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 확정된 거 아닙니다”

입력 2021.06.22 (07:00) 수정 2021.06.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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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곳에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 쉽게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경을 쓴 사람들입니다.

대한안경사협회에서 2019년에 조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남녀 가운데 안경이나 콘택트 렌즈를 쓰는 사람이 54.5%나 됩니다.

안경이나 렌즈가 국민 생활과 밀접하단 얘기인데, 최근 안경과 관련해 주목할만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현재 '도수' 안경을 온라인에서 파는 건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 법을 바꿔서 허용하는 걸 정부가 추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도수' 안경만 온라인에서 살 수 있는 건지, 콘택트 렌즈도 포함된 것인지 같은 게 궁금해서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에 물어봤는데, 다들 설명을 해주면서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확정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보통 정부에서 추진한다고 하면 사실상 확정된 거로 봐도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다소 특이한 반응입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안경사들의 반발이 거센 데다 이 일의 추진 방식이 조금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 대한안경사협회 "국민 눈 건강 해치는 정책"

전국 안경사들의 모임인 대한안경사협회는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에 즉각 반대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안경사협회는 우선 온라인 판매가 국민 눈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경을 맞추러 안경원에 가면 먼저 시력검사를 한 뒤에 렌즈를 고르고, 몇 시간 혹은 며칠 후에 다시 찾아가서 안경을 받습니다.

안경을 받을 때는 안경을 한 번 써 보고, 안경사가 코 받침이나 안경다리 등을 얼굴에 맞게 교정해줍니다.

안경사협회는 온라인 판매를 하면 이 교정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시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플 수 있고 눈도 쉽게 피곤해진다는 겁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안과의사들의 모임인 안과학회에서도 이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고 전했습니다.

안경사협회는 또, 영업권 침해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안경원은 대략 1만 개 규모로, 국민 5천 명당 1개꼴로 포화상태인데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 손님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 정부 "'한걸음 모델'로 추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그동안 여러 차례 추진됐었지만, 안경사들의 반대에 막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일부 돋보기 안경과 도수 있는 물안경에 한정해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그래서 이번엔 '한걸음 모델'이란 걸 들고 나왔습니다. 한걸음 모델은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이 심한 신사업을 도입할 때 정부와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입니다. 정부는 일단 콘택트 렌즈는 빼고 도수 안경만 놓고 온라인 판매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한걸음 모델은 결론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한 의견을 주고 받은 뒤 합의문을 쓰는데, 중간 결론까지만 합의문에 담기기도 합니다.

에어비앤비 같은 도심 공유숙박을 내국인에게도 허용하는 방안도 지난해 한걸음 모델을 적용해서 추진했는데, 공감대는 이뤄졌지만 시행 시기는 정하지 않고 합의문을 썼습니다.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 역시 이렇게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조정 과정을 지켜봐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안경사협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총력 반대에 나섰습니다. 한걸음 모델의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에도 상당한 항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갈등 조정을 앞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대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기재부 관계자는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가 확정된 게 아닌데 마치 확정된 것처럼 알려져 당혹스럽다며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 안경사협회 반발에 신 사업자도 당혹

온라인 판매를 희망하는 신 사업자 업체 역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안경사협회와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확정된 것처럼 알려지면서 시작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해당 업체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가상 착용 프로그램'으로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매자가 프로그램이 깔린 카메라 앞에 앉아 안경을 고르면 안경을 쓴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프로그램을 스마트폰에 깔면 스마트폰으로 가상 착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업체는 안경사들이 원한다면 이 프로그램을 플랫폼 형태로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 소비자들이 안경을 쉽고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안경사들의 영업권이 오히려 확대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경사협회를 대화로 잘 설득하고 그들의 주장도 충분히 들어보겠다는 입장입니다.

한걸음 모델은 지난해부터 도입된 새로운 제도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면 민간은 따라오는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민간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시도입니다.

정부가 정해진 결론 없이 열린 논의를 하겠다고 밝힌만큼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정부가 추진은 하지만 확정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한걸음 모델의 논의 과정을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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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 확정된 거 아닙니다”
    • 입력 2021-06-22 07:00:36
    • 수정2021-06-22 07:00:46
    취재후·사건후

지금 있는 곳에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 쉽게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경을 쓴 사람들입니다.

대한안경사협회에서 2019년에 조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남녀 가운데 안경이나 콘택트 렌즈를 쓰는 사람이 54.5%나 됩니다.

안경이나 렌즈가 국민 생활과 밀접하단 얘기인데, 최근 안경과 관련해 주목할만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현재 '도수' 안경을 온라인에서 파는 건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 법을 바꿔서 허용하는 걸 정부가 추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도수' 안경만 온라인에서 살 수 있는 건지, 콘택트 렌즈도 포함된 것인지 같은 게 궁금해서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에 물어봤는데, 다들 설명을 해주면서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확정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보통 정부에서 추진한다고 하면 사실상 확정된 거로 봐도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다소 특이한 반응입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안경사들의 반발이 거센 데다 이 일의 추진 방식이 조금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 대한안경사협회 "국민 눈 건강 해치는 정책"

전국 안경사들의 모임인 대한안경사협회는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에 즉각 반대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안경사협회는 우선 온라인 판매가 국민 눈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경을 맞추러 안경원에 가면 먼저 시력검사를 한 뒤에 렌즈를 고르고, 몇 시간 혹은 며칠 후에 다시 찾아가서 안경을 받습니다.

안경을 받을 때는 안경을 한 번 써 보고, 안경사가 코 받침이나 안경다리 등을 얼굴에 맞게 교정해줍니다.

안경사협회는 온라인 판매를 하면 이 교정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시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플 수 있고 눈도 쉽게 피곤해진다는 겁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안과의사들의 모임인 안과학회에서도 이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고 전했습니다.

안경사협회는 또, 영업권 침해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안경원은 대략 1만 개 규모로, 국민 5천 명당 1개꼴로 포화상태인데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 손님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 정부 "'한걸음 모델'로 추진"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그동안 여러 차례 추진됐었지만, 안경사들의 반대에 막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일부 돋보기 안경과 도수 있는 물안경에 한정해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그래서 이번엔 '한걸음 모델'이란 걸 들고 나왔습니다. 한걸음 모델은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이 심한 신사업을 도입할 때 정부와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입니다. 정부는 일단 콘택트 렌즈는 빼고 도수 안경만 놓고 온라인 판매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한걸음 모델은 결론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한 의견을 주고 받은 뒤 합의문을 쓰는데, 중간 결론까지만 합의문에 담기기도 합니다.

에어비앤비 같은 도심 공유숙박을 내국인에게도 허용하는 방안도 지난해 한걸음 모델을 적용해서 추진했는데, 공감대는 이뤄졌지만 시행 시기는 정하지 않고 합의문을 썼습니다.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 역시 이렇게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조정 과정을 지켜봐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안경사협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총력 반대에 나섰습니다. 한걸음 모델의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에도 상당한 항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갈등 조정을 앞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대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기재부 관계자는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가 확정된 게 아닌데 마치 확정된 것처럼 알려져 당혹스럽다며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 안경사협회 반발에 신 사업자도 당혹

온라인 판매를 희망하는 신 사업자 업체 역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안경사협회와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확정된 것처럼 알려지면서 시작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해당 업체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가상 착용 프로그램'으로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매자가 프로그램이 깔린 카메라 앞에 앉아 안경을 고르면 안경을 쓴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프로그램을 스마트폰에 깔면 스마트폰으로 가상 착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업체는 안경사들이 원한다면 이 프로그램을 플랫폼 형태로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 소비자들이 안경을 쉽고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안경사들의 영업권이 오히려 확대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경사협회를 대화로 잘 설득하고 그들의 주장도 충분히 들어보겠다는 입장입니다.

한걸음 모델은 지난해부터 도입된 새로운 제도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면 민간은 따라오는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민간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시도입니다.

정부가 정해진 결론 없이 열린 논의를 하겠다고 밝힌만큼 도수 안경 온라인 판매는 정부가 추진은 하지만 확정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한걸음 모델의 논의 과정을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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