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코앞인데…잊혀진 역사 현장 ‘의정부 터’

입력 2021.06.27 (08:03) 수정 2021.06.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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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등지고 10시 방향을 보면 펜스가 쳐진 럭비공 모양의 공터가 있습니다. 면적 11,300㎡로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의 1.5배쯤 됩니다. 2016년 7월부터 2019년 8월까지 발굴 조사가 이어진 곳, 바로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의정부는 조선 시대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입니다. 경국대전은 의정부의 역할을 총백관(總百官: 모든 관료를 통솔함)‧평서정(平庶政:나라의 업무를 총괄함)‧이음양(理陰陽: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함)‧경방국(經邦國:국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의정부는 영의정·좌의정· 우의정 세 정승이 모여 국정 전반을 논하고 다스리던 관청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실과 부총리실이 합쳐진 기구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 의정부, 수난과 곡절의 변천사
의정부 터에 자리잡은 건물·기관들의 변화
도평의사사(1398)→의정부(1400)→임진왜란 훼손(1592)→의정부 중수(1865~1894.12)→내부(1894~1910.8)→내부청사 서양식 2층으로 신축(1909)→경기도청(1910.11~1945.8)→미군정 청사(1945.8~1948.11)→화재(1946.1)→경기도청(1948.11~1967.6)→내무부·건설부 ·중부지방국세청(1967.6~)→내무부 치안본부(1970.12~1986.8)→서울시경 별관(1986.9~1989.10)→건물 철거(1989.11~1990.3)→주차장·광화문 시민열린마당(1997)→발굴조사(2016.7~2019.8)→사적 제558호 지정(2020.9)

그런데 이 의정부라는 기구는 만들어질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조선 초기인 태조 7년(1398년) 의정부의 전신인 도평의사사가 광화문 앞 동편 바로 지금의 의정부 터에 자리에 자리 잡은 뒤 1400년엔 의정부로 이름을 바꾸며 최고 행정기관으로 등장합니다.

이후 의정부는 왕에 따라 권한이 강화됐다 축소되길 반복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화재로 훼손된 이후 임시 국방기구인 비변사의 권한이 강화되자 역할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의정부가 다시 제 기능을 회복한 시기는 고종 때였습니다.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1863년)와 함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의정부 청사 복구에 나섰습니다. (아래 사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1908년)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1908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중 의정부 확대(1908년)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중 의정부 확대(1908년)

중건된 의정부는 중심 건물인 정본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근무처), 협선당(종1품·정2품 근무처), 석획당(재상들의 회의 장소) 세 전각이 대로를 바라보며 나란히 자리하고 외곽을 행랑이나 조방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의정부 중심 건물 정본당(1904년).정본당을 바라봤을 때 좌로 협선당, 우로 석획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콘스탄스 테일러.  『Koreans at  Home』)의정부 중심 건물 정본당(1904년).정본당을 바라봤을 때 좌로 협선당, 우로 석획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콘스탄스 테일러. 『Koreans at Home』)

의정부는 이후 31년간 원래의 구실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명칭이 내각(內閣)으로 바뀌고 장소를 경복궁 내 근정전 서쪽의 수정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의정부 터에는 1895년 내무행정을 맡아 보던 내부(內部)가 옮겨옵니다. 이때만 해도 의정부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헤르만 산더가 1906~1907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앞모습. 광화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의정부 청사 외행랑이 남아 있다.(출처: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가 1906~1907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앞모습. 광화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의정부 청사 외행랑이 남아 있다.(출처:국립민속박물관)

의정부 건물에 변화가 생긴 시기는 언제일까요? 순종 1년(1908년) 들어 내부 청사 건물에 대한 신축 논의가 시작됩니다. 당시 신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各部廳舍는 前度支部廳舍基址에 合同建築할터인데 其所入費略四十萬圜을 現今財政窘絀한 境遇에 辦出함이 困難함으로 其方針을 變更하야 各部의 現在廳舍中視務上無碍한 者는 仍置하고 不可不新築할 者는 各廳舍를 各其建築하기로하야 內部에서는 現廳舍前庭에 建築하기로 决定하고 近近히 始役하야 本年中에 竣工할터이라더라

각부 청사는 탁지부 청사 터 앞에 함께 건축하기로 했지만, 현재 재정이 어려워 건축비 약 40만 원을 마련하기 곤란함에 따라 방침을 바꾸어 각 부의 현재 청사 가운데 업무를 보는 데 지장이 없는 경우 그대로 두고 불가피하게 새로 지어야 할 경우 청사를 각각 건축하기로 했다. 내부는 현 청사(의정부 건물을 가리킴) 앞마당에 건축하기로 하고 가까운 시기에 짓기 시작해 올해 안에 준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성신문 1908년 7월 30일)

대한제국은 이듬해인 1909년 내부로 쓰던 옛 의정부 건물 외행랑과 내삼문을 헐고 그 자리에 내부 청사로 계획된 2층짜리 서양식 붉은색 벽돌 건물을 짓습니다. (아래 사진)

신축 초기 내부 건물(1911년). 내부로 지어졌으나 경기도청 청사로 쓰였다. 정면이 지금의 세종대로를 향하고 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신축 초기 내부 건물(1911년). 내부로 지어졌으나 경기도청 청사로 쓰였다. 정면이 지금의 세종대로를 향하고 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런데 이 건물은 단 한 번도 내부 청사로 사용되지 못합니다. 신축 도중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를 맞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 수도 한성부를 경기도 소속 경성부로 개편함에 따라 광복 때까지 경기도청 청사로 사용됐습니다. 이 건물 외에도 회의실과 경기도 경찰부 등 다른 건물이 신축되고 수차례 증·개축이 이뤄지는 한편 영역도 확대되면서 기존의 의정부 건물들이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1930년대 남아있던 ①정본당②석획당③경기도청 본청 우측 날개 부분 건물은 1947년 사진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공터로 바뀌었다.1930년대 남아있던 ①정본당②석획당③경기도청 본청 우측 날개 부분 건물은 1947년 사진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공터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서양식 건물들은 미군정 청사로 사용됩니다. 1946년 1월 23일 경찰부 취조실 부근에서 불이 나면서 경기도청 청사 건물은 우측 날개 부분이 철거돼 반쪽 건물이 됐습니다. (위 사진3번) 그 무렵 옛 의정부 건물 가운데 광복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정본당(위 사진1번)과 석획당(위 사진 2번)도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이 물러남에 따라 1948년 11월 5일부터 이 건물에 다시 경기도청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67년 경기도청 소재지가 수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20년간 도청 건물로 사용됐습니다.

경기도청 청사(1957)경기도청 청사(1957)

경기도청 이전 후에는 내무부, 재해대책본부, 건설부, 농림부 산하 농업경영연구소 등 정부 각 부처에서 건물들을 사용했습니다. 1970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는 내무부 치안본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1986년 9월 경찰청이 출범하면서 서울시 미근동 청사로 이전하자 이 건물은 서울시 경찰국 별관으로 사용됐습니다.


치안본부 시절(1986)치안본부 시절(1986)

이후 이 건물의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1986년 문화재관리국은 <현대 여명기 건축물 및 역사유적 조치계획> 보고서에서 건축 양식이나 보존 상태, 역사적 가치로 보아 사적으로 지정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건물들은 1989년 11월 철거에 들어가 1990년 3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선일보 1990년 3월 24일조선일보 1990년 3월 24일

건물이 모두 헐린 의정부 터에는 1992년 정부종합청사 별관건물 신축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무산됐고 1997년에 시민 열린마당이 조성돼 야외공연장과 전시장, 주차장 등으로 활용됐습니다. 이후 9년 만인 2016년 7월 18일부터 발굴 작업에 들어가 3년여 만인 2019년 8월 22일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발굴 조사는 광화문 차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약 0.8~1.8m 아래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진행됐습니다. 발굴 결과 의정부 터에는 1860년대 당시 의정부 건물인 정본당과 협선당 등의 기단과 같은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는 물론 경기도청 건물의 벽돌 기초도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세종대로는 조선의 중심 관청가였습니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비롯해 육조 관청이 좌우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다른 육조 터에는 대형 빌딩과 지하주차장 등이 들어서는 등 개발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역사적 경관이 대부분 훼손됐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먼저 서양식 건물이 신축되면서 제 모습을 잃어야 했던 의정부는 여러 차례 공사가 이뤄졌지만 지하층과 중층 이상 건물 신축이 거의 없어 유구의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입니다.

하나의 공간에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여러 시대 건물들의 흔적이 간직된 의정부 터는 2020년 9월 24일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58호로 지정됐습니다.

서울시는 발굴된 건물지와 초석 등은 보존 처리한 뒤 유구 보호시설을 세워 보존하고 주변에 공원 등을 조성해 2023년쯤 도심 속 역사문화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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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코앞인데…잊혀진 역사 현장 ‘의정부 터’
    • 입력 2021-06-27 08:03:03
    • 수정2021-06-27 11:12:46
    취재K

광화문을 등지고 10시 방향을 보면 펜스가 쳐진 럭비공 모양의 공터가 있습니다. 면적 11,300㎡로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의 1.5배쯤 됩니다. 2016년 7월부터 2019년 8월까지 발굴 조사가 이어진 곳, 바로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의정부는 조선 시대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입니다. 경국대전은 의정부의 역할을 총백관(總百官: 모든 관료를 통솔함)‧평서정(平庶政:나라의 업무를 총괄함)‧이음양(理陰陽: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함)‧경방국(經邦國:국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의정부는 영의정·좌의정· 우의정 세 정승이 모여 국정 전반을 논하고 다스리던 관청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실과 부총리실이 합쳐진 기구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 의정부, 수난과 곡절의 변천사
의정부 터에 자리잡은 건물·기관들의 변화
도평의사사(1398)→의정부(1400)→임진왜란 훼손(1592)→의정부 중수(1865~1894.12)→내부(1894~1910.8)→내부청사 서양식 2층으로 신축(1909)→경기도청(1910.11~1945.8)→미군정 청사(1945.8~1948.11)→화재(1946.1)→경기도청(1948.11~1967.6)→내무부·건설부 ·중부지방국세청(1967.6~)→내무부 치안본부(1970.12~1986.8)→서울시경 별관(1986.9~1989.10)→건물 철거(1989.11~1990.3)→주차장·광화문 시민열린마당(1997)→발굴조사(2016.7~2019.8)→사적 제558호 지정(2020.9)

그런데 이 의정부라는 기구는 만들어질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조선 초기인 태조 7년(1398년) 의정부의 전신인 도평의사사가 광화문 앞 동편 바로 지금의 의정부 터에 자리에 자리 잡은 뒤 1400년엔 의정부로 이름을 바꾸며 최고 행정기관으로 등장합니다.

이후 의정부는 왕에 따라 권한이 강화됐다 축소되길 반복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화재로 훼손된 이후 임시 국방기구인 비변사의 권한이 강화되자 역할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의정부가 다시 제 기능을 회복한 시기는 고종 때였습니다.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1863년)와 함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의정부 청사 복구에 나섰습니다. (아래 사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1908년)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중 의정부 확대(1908년)
중건된 의정부는 중심 건물인 정본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근무처), 협선당(종1품·정2품 근무처), 석획당(재상들의 회의 장소) 세 전각이 대로를 바라보며 나란히 자리하고 외곽을 행랑이나 조방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의정부 중심 건물 정본당(1904년).정본당을 바라봤을 때 좌로 협선당, 우로 석획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콘스탄스 테일러.  『Koreans at  Home』)
의정부는 이후 31년간 원래의 구실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명칭이 내각(內閣)으로 바뀌고 장소를 경복궁 내 근정전 서쪽의 수정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의정부 터에는 1895년 내무행정을 맡아 보던 내부(內部)가 옮겨옵니다. 이때만 해도 의정부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헤르만 산더가 1906~1907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앞모습. 광화문을 바라보고 우측에 의정부 청사 외행랑이 남아 있다.(출처:국립민속박물관)
의정부 건물에 변화가 생긴 시기는 언제일까요? 순종 1년(1908년) 들어 내부 청사 건물에 대한 신축 논의가 시작됩니다. 당시 신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各部廳舍는 前度支部廳舍基址에 合同建築할터인데 其所入費略四十萬圜을 現今財政窘絀한 境遇에 辦出함이 困難함으로 其方針을 變更하야 各部의 現在廳舍中視務上無碍한 者는 仍置하고 不可不新築할 者는 各廳舍를 各其建築하기로하야 內部에서는 現廳舍前庭에 建築하기로 决定하고 近近히 始役하야 本年中에 竣工할터이라더라

각부 청사는 탁지부 청사 터 앞에 함께 건축하기로 했지만, 현재 재정이 어려워 건축비 약 40만 원을 마련하기 곤란함에 따라 방침을 바꾸어 각 부의 현재 청사 가운데 업무를 보는 데 지장이 없는 경우 그대로 두고 불가피하게 새로 지어야 할 경우 청사를 각각 건축하기로 했다. 내부는 현 청사(의정부 건물을 가리킴) 앞마당에 건축하기로 하고 가까운 시기에 짓기 시작해 올해 안에 준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성신문 1908년 7월 30일)

대한제국은 이듬해인 1909년 내부로 쓰던 옛 의정부 건물 외행랑과 내삼문을 헐고 그 자리에 내부 청사로 계획된 2층짜리 서양식 붉은색 벽돌 건물을 짓습니다. (아래 사진)

신축 초기 내부 건물(1911년). 내부로 지어졌으나 경기도청 청사로 쓰였다. 정면이 지금의 세종대로를 향하고 있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런데 이 건물은 단 한 번도 내부 청사로 사용되지 못합니다. 신축 도중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를 맞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 수도 한성부를 경기도 소속 경성부로 개편함에 따라 광복 때까지 경기도청 청사로 사용됐습니다. 이 건물 외에도 회의실과 경기도 경찰부 등 다른 건물이 신축되고 수차례 증·개축이 이뤄지는 한편 영역도 확대되면서 기존의 의정부 건물들이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1930년대 남아있던 ①정본당②석획당③경기도청 본청 우측 날개 부분 건물은 1947년 사진에서는 모두 사라지고 공터로 바뀌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서양식 건물들은 미군정 청사로 사용됩니다. 1946년 1월 23일 경찰부 취조실 부근에서 불이 나면서 경기도청 청사 건물은 우측 날개 부분이 철거돼 반쪽 건물이 됐습니다. (위 사진3번) 그 무렵 옛 의정부 건물 가운데 광복 때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정본당(위 사진1번)과 석획당(위 사진 2번)도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이 물러남에 따라 1948년 11월 5일부터 이 건물에 다시 경기도청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67년 경기도청 소재지가 수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20년간 도청 건물로 사용됐습니다.

경기도청 청사(1957)
경기도청 이전 후에는 내무부, 재해대책본부, 건설부, 농림부 산하 농업경영연구소 등 정부 각 부처에서 건물들을 사용했습니다. 1970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는 내무부 치안본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1986년 9월 경찰청이 출범하면서 서울시 미근동 청사로 이전하자 이 건물은 서울시 경찰국 별관으로 사용됐습니다.


치안본부 시절(1986)
이후 이 건물의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1986년 문화재관리국은 <현대 여명기 건축물 및 역사유적 조치계획> 보고서에서 건축 양식이나 보존 상태, 역사적 가치로 보아 사적으로 지정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건물들은 1989년 11월 철거에 들어가 1990년 3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선일보 1990년 3월 24일
건물이 모두 헐린 의정부 터에는 1992년 정부종합청사 별관건물 신축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무산됐고 1997년에 시민 열린마당이 조성돼 야외공연장과 전시장, 주차장 등으로 활용됐습니다. 이후 9년 만인 2016년 7월 18일부터 발굴 작업에 들어가 3년여 만인 2019년 8월 22일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발굴 조사는 광화문 차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약 0.8~1.8m 아래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진행됐습니다. 발굴 결과 의정부 터에는 1860년대 당시 의정부 건물인 정본당과 협선당 등의 기단과 같은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는 물론 경기도청 건물의 벽돌 기초도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세종대로는 조선의 중심 관청가였습니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비롯해 육조 관청이 좌우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다른 육조 터에는 대형 빌딩과 지하주차장 등이 들어서는 등 개발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역사적 경관이 대부분 훼손됐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먼저 서양식 건물이 신축되면서 제 모습을 잃어야 했던 의정부는 여러 차례 공사가 이뤄졌지만 지하층과 중층 이상 건물 신축이 거의 없어 유구의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입니다.

하나의 공간에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여러 시대 건물들의 흔적이 간직된 의정부 터는 2020년 9월 24일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558호로 지정됐습니다.

서울시는 발굴된 건물지와 초석 등은 보존 처리한 뒤 유구 보호시설을 세워 보존하고 주변에 공원 등을 조성해 2023년쯤 도심 속 역사문화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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