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병원 마약쇼핑’ 어쩌나…‘처방 이력조회’도 무용지물

입력 2021.06.30 (07:00) 수정 2021.06.3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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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병원 → 건너편 OO내과 → OOO 3주, OOO 한달, OOO 한달치, OOO패치 5장...
총 비용 8만원 정도

약물 중독자인 A 씨가 다른 환자에게 대리 처방을 부탁하며 건넨 이른바 마약류 의약품 '쇼핑 목록'입니다.

A 씨는 정신과 질환인 주의력결핍 행동 장애(ADHD)를 치료하다 약물에 중독됐습니다. 현재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A 씨는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마약류 의약품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대리 처방을 의뢰하고 있었습니다.

약물 중독자 A씨가 동료 입원 환자에게 대리 처방을 부탁한 메모약물 중독자 A씨가 동료 입원 환자에게 대리 처방을 부탁한 메모

A 씨는 약물 중독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면서도, 병원에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기가 너무 쉽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자 :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서 치료한 기록이 있어도 의사가 주나요?
A 씨 : 네. 줍니다. 제가 지금 나가도, 만약 제가 지금 여기 병원에 입원한 상태인데, 나가도 다 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구하기가 너무 쉬워요...

취재진도 A씨가 알려준 병원을 찾아가 봤습니다. 의사는 별다른 제지 없이 마약성 진통제를 석 달 치나 처방해 줬습니다. 엑스레이 촬영이나 물리적인 진단 과정도 없었습니다.

식약처는 일부 마약류 의약품의 경우 중독성이 심해 복용량을 정해 놓고 있는데요. 이 약의 경우 처음 처방할 때 7일 치 이내로만 처방해야 하지만, 병원 측은 이런 가이드라인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 1년간 마약류 의약품 처방만 284회

A 씨는 심지어 일부 의사들을 '마약 공급책'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마약류 의약품을 의사에게서 처방받았기에 이런 표현까지 쓰는 걸까요. 실제 처방 내용을 확인해 봤습니다.

A 씨는 최근 1년 동안 무려 284회나 마약성 진통제, 신경안정제, 다이어트 약물 등 다양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A씨가 최근 1년간 처방받은 마약류 의약품 목록A씨가 최근 1년간 처방받은 마약류 의약품 목록

약을 처방받은 일수도 대부분 최대한도를 채웠습니다. 약마다 21일 치나 28일 치씩 받았습니다. 20일 치씩만 받은 것으로 계산해도 284회면 무려 5680일 치(284×20), 그러니까 15년 치가 됩니다.

그러니까 A 씨 같은 약물 중독자들이 일부 의사들에게 '마약 공급책'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입니다.

물론 가장 큰 잘못은 A 씨에게 있습니다. 병원의 허술한 처방으로 약물 중독자가 됐다곤 해도,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꾸 처방받으러 다니는 건 A 씨 본인의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또 치료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는 것 자체가 마약류 관리법을 위반하는 불법 행위입니다. 마약류 의약품을 구해달라고 대리처방을 부탁한 것도 불법입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중독 증세가 심한 약물 중독자들에게 약물 공급을 차단하는 것도 결국 의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 '마약쇼핑' 막으려 이력조회 시스템 만들었지만...'이용률' 1% 미만

그래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 6월부터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특정 환자의 최근 1년 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건데요. 정말 치료가 필요한 환자인지, 아니면 마약류 의약품을 구하러 다니는 환자인지 구분할 수 있게 한 겁니다.

식약처는 지난해 6월에 불면증 치료제인 졸피뎀, 수면마취제 프로포폴, 식욕억제제 펜터민 등 3가지 의약품에 대해 이력조회 시스템을 시범 실시했습니다. 올해 3월부터는 모든 마약류 의약품으로 대상을 확대했습니다.

이렇게 시스템을 갖춰 놓았지만, 의사들의 활용도는 상당히 저조합니다.

의사가 환자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스템에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처방 이력 조회 전 공인인증서 로그인 등을 거쳐야 합니다.


지난해 6월 이후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에 회원으로 가입한 의사는 7,400여 명인데요. 대부분은 지난해 6월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 가입한 의사입니다. 6개월 이상 로그인하지 않아 일종의 '휴면 회원'이 된 의사만 약 6,400명입니다.

그러니까 환자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 확인 시스템에 최근 6개월 안에 로그인을 한 적 있는 의사는 약 1,000명뿐인 겁니다.

지난해 1년간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한 의사 수는 10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하기 전에 환자가 얼마나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았는지 이력을 확인하려는 의지를 가진 의사가 1%도 안 되는 셈입니다.

■ 경남서 마약성 진통제 오용 10대 42명 마약 투약 혐의 입건

마약류 의약품 오남용 문제는 이 씨와 같은 일부 약물 중독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달 경남경찰청은 특정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마약으로 오용해 투약하고, 판매한 혐의 등으로 10대 1명을 구속하고 41명을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로 10대 수십 명이 마약 투약을 했습니다.

식약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병·의원이 특정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 실태를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치료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 것으로 의심되는 30개 의료기관을 적발해, 지난 4월 경찰에 수사 의뢰했습니다.

당시 식약처 조사 결과를 보면, 한 의원은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10개월간 환자 한 명에게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67차례에 걸쳐 655장이나 처방했습니다. 1,965일 치로 무려 5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입니다.

한 환자는 16개 의원을 돌아다니면서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3,681일 치, 그러니까 10년 치나 처방받은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는 어제도 '2021년도 2차 의료용 마약류 관리실태 합동점검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오남용 처방한 것으로 의심되는 34개 의료기관을 적발해 경찰에 수사 의뢰했습니다.

■ "의사들 스스로 경각심 가지고 처방해야"...식약처, 홍보 강화

마약류 중독 전문 치료병원으로 지정된 인천 참사랑병원의 천영훈 원장은 '의사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봤습니다.

천 원장은 "마약류 의약품 오남용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의사들 스스로가 경각심을 가지고 처방해야 한다."라며 "마약성 진통제의 위험성이나 대체할 수 있는 의약품 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의료시스템도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식약처는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의사의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 가입률과 이용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대한의사협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에 나설 예정입니다.

또 의사들이 사용하는 처방시스템과 마약류 처방 이력 조회 시스템을 연동되도록 해 매번 따로 로그인 해야 하는 불편함을 줄이는 시스템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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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병원 마약쇼핑’ 어쩌나…‘처방 이력조회’도 무용지물
    • 입력 2021-06-30 07:00:43
    • 수정2021-06-30 09:20:53
    취재후·사건후

OO병원 → 건너편 OO내과 → OOO 3주, OOO 한달, OOO 한달치, OOO패치 5장...
총 비용 8만원 정도

약물 중독자인 A 씨가 다른 환자에게 대리 처방을 부탁하며 건넨 이른바 마약류 의약품 '쇼핑 목록'입니다.

A 씨는 정신과 질환인 주의력결핍 행동 장애(ADHD)를 치료하다 약물에 중독됐습니다. 현재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A 씨는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마약류 의약품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대리 처방을 의뢰하고 있었습니다.

약물 중독자 A씨가 동료 입원 환자에게 대리 처방을 부탁한 메모
A 씨는 약물 중독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면서도, 병원에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기가 너무 쉽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자 :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서 치료한 기록이 있어도 의사가 주나요?
A 씨 : 네. 줍니다. 제가 지금 나가도, 만약 제가 지금 여기 병원에 입원한 상태인데, 나가도 다 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구하기가 너무 쉬워요...

취재진도 A씨가 알려준 병원을 찾아가 봤습니다. 의사는 별다른 제지 없이 마약성 진통제를 석 달 치나 처방해 줬습니다. 엑스레이 촬영이나 물리적인 진단 과정도 없었습니다.

식약처는 일부 마약류 의약품의 경우 중독성이 심해 복용량을 정해 놓고 있는데요. 이 약의 경우 처음 처방할 때 7일 치 이내로만 처방해야 하지만, 병원 측은 이런 가이드라인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 1년간 마약류 의약품 처방만 284회

A 씨는 심지어 일부 의사들을 '마약 공급책'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마약류 의약품을 의사에게서 처방받았기에 이런 표현까지 쓰는 걸까요. 실제 처방 내용을 확인해 봤습니다.

A 씨는 최근 1년 동안 무려 284회나 마약성 진통제, 신경안정제, 다이어트 약물 등 다양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A씨가 최근 1년간 처방받은 마약류 의약품 목록
약을 처방받은 일수도 대부분 최대한도를 채웠습니다. 약마다 21일 치나 28일 치씩 받았습니다. 20일 치씩만 받은 것으로 계산해도 284회면 무려 5680일 치(284×20), 그러니까 15년 치가 됩니다.

그러니까 A 씨 같은 약물 중독자들이 일부 의사들에게 '마약 공급책'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입니다.

물론 가장 큰 잘못은 A 씨에게 있습니다. 병원의 허술한 처방으로 약물 중독자가 됐다곤 해도,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꾸 처방받으러 다니는 건 A 씨 본인의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또 치료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는 것 자체가 마약류 관리법을 위반하는 불법 행위입니다. 마약류 의약품을 구해달라고 대리처방을 부탁한 것도 불법입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중독 증세가 심한 약물 중독자들에게 약물 공급을 차단하는 것도 결국 의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 '마약쇼핑' 막으려 이력조회 시스템 만들었지만...'이용률' 1% 미만

그래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 6월부터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특정 환자의 최근 1년 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건데요. 정말 치료가 필요한 환자인지, 아니면 마약류 의약품을 구하러 다니는 환자인지 구분할 수 있게 한 겁니다.

식약처는 지난해 6월에 불면증 치료제인 졸피뎀, 수면마취제 프로포폴, 식욕억제제 펜터민 등 3가지 의약품에 대해 이력조회 시스템을 시범 실시했습니다. 올해 3월부터는 모든 마약류 의약품으로 대상을 확대했습니다.

이렇게 시스템을 갖춰 놓았지만, 의사들의 활용도는 상당히 저조합니다.

의사가 환자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스템에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처방 이력 조회 전 공인인증서 로그인 등을 거쳐야 합니다.


지난해 6월 이후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에 회원으로 가입한 의사는 7,400여 명인데요. 대부분은 지난해 6월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 가입한 의사입니다. 6개월 이상 로그인하지 않아 일종의 '휴면 회원'이 된 의사만 약 6,400명입니다.

그러니까 환자의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이력 확인 시스템에 최근 6개월 안에 로그인을 한 적 있는 의사는 약 1,000명뿐인 겁니다.

지난해 1년간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한 의사 수는 10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하기 전에 환자가 얼마나 마약류 의약품을 처방받았는지 이력을 확인하려는 의지를 가진 의사가 1%도 안 되는 셈입니다.

■ 경남서 마약성 진통제 오용 10대 42명 마약 투약 혐의 입건

마약류 의약품 오남용 문제는 이 씨와 같은 일부 약물 중독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달 경남경찰청은 특정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마약으로 오용해 투약하고, 판매한 혐의 등으로 10대 1명을 구속하고 41명을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로 10대 수십 명이 마약 투약을 했습니다.

식약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병·의원이 특정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 실태를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치료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 것으로 의심되는 30개 의료기관을 적발해, 지난 4월 경찰에 수사 의뢰했습니다.

당시 식약처 조사 결과를 보면, 한 의원은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10개월간 환자 한 명에게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67차례에 걸쳐 655장이나 처방했습니다. 1,965일 치로 무려 5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입니다.

한 환자는 16개 의원을 돌아다니면서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3,681일 치, 그러니까 10년 치나 처방받은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는 어제도 '2021년도 2차 의료용 마약류 관리실태 합동점검 결과'를 발표했는데요.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오남용 처방한 것으로 의심되는 34개 의료기관을 적발해 경찰에 수사 의뢰했습니다.

■ "의사들 스스로 경각심 가지고 처방해야"...식약처, 홍보 강화

마약류 중독 전문 치료병원으로 지정된 인천 참사랑병원의 천영훈 원장은 '의사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봤습니다.

천 원장은 "마약류 의약품 오남용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의사들 스스로가 경각심을 가지고 처방해야 한다."라며 "마약성 진통제의 위험성이나 대체할 수 있는 의약품 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의료시스템도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식약처는 마약류 의약품 처방 의사의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서비스' 가입률과 이용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대한의사협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에 나설 예정입니다.

또 의사들이 사용하는 처방시스템과 마약류 처방 이력 조회 시스템을 연동되도록 해 매번 따로 로그인 해야 하는 불편함을 줄이는 시스템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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