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생존자]③ 극한 기후 시대, ‘자연재해’는 ‘개인 책임’?

입력 2021.06.30 (16:03) 수정 2021.07.1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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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를 앞두고 지난해 수해 피해를 본 '재난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포근한 안식처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만난 재난생존자들은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소송'이었습니다. 아직 아픔이 가시지도 않은 이들이 법정에 선 까닭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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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규명 없이는 '보상' 안 돼!

도심 지하차도에서 엄마는 딸을 잃었고, 평화롭던 아파트에선 50대 가장이 갑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방이 무너진 섬진강 주민들은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침수의 경우 200만 원, 주택 피해는 최대 1,600만 원이 전부입니다. 그 외 보상은 원인 규명을 하기 전까지 어렵다는 게 정부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조사, 1년 넘게 '진행 중'입니다. 때문에 재난생존자 대부분은 지난해 수해가 단순히 '폭우'로 인한 불운이었는지, 아니면 구조적 문제로 인한 '인재'였는지를 두고 국가와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법원 한 번 가본적 없던 소시민들이 왜 법정 싸움까지 벌여야 하는지, 지금부터 자연재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짚어보겠습니다.

■ 천재지변 = "국가 책임 묻기 어렵다"

섬진강 댐의 방류로 마을 전체가 침수된 구례 지역의 경우 정부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였고, 댐 관리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섬진강 댐은 100년 빈도의 강수를 견디도록 설계됐는데 지난여름 500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 한 비가 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천재지변'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국가배상법 제5조(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한 책임)
① 도로ㆍ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시설)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국가배상법 제5조 1항>에는 재난 피해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책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 즉 국민입니다.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한데, 피해 입증까지 직접 해야 하는 현실. 그래서 변호사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황다연 KBS 자문변호사는 "기록적인 홍수와 태풍 등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는 법률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앞서 100년 빈도로 설계된 섬진강 댐의 경우 이를 초과하는 비가 내려 홍수가 발생했기 때문에 면책 사유가 된다는 게 정부 입장에 힘이 실리는 대목입니다.


다만 보상을 받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재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 또는 '과실'로 피해가 생기거나 손해가 확대된 경우입니다. 도로나 댐, 배수로 등 공공시설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었는지, 지자체가 재난을 미리 알리고 대피시키는 등 관련 조치를 했는지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간의 재해 피해는 누가 이겼을까요? 이제 사례별로 판결을 하나하나 뜯어봐야겠습니다.

■ [서울 우면산 산사태] 8년 만에 국가 배상 책임 '50%' 인정

2011년 7월 27일 서울에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우면산 일대에 산사태가 150여 회 발생했고 사망자는 16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산사태 사망자의 유가족은 서초구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산사태 경보를 내리고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어야 했지만, 담당 공무원들의 과실로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8년간의 지난한 소송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절반만 들어 줬습니다.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서초구의 과실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이 일부 인정된 겁니다. 다만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호우였다는 점을 감안해 손해배상의 범위를 50%로 제한했습니다.

■ [부산 구평동 산사태] '명백한 인재'

2019년은 태풍 7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줬습니다. 특히 7번째 태풍 '미탁'은 10월 3일 개천절까지 큰비를 뿌렸는데요. 그날 부산 사하구 구평동에서 산사태가 일어났고 일가족 3명을 비롯해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습니다. 국방부가 석탄재를 묻어 조성한 연병장의 성토사면이 무너지며 마을을 덮쳤기 때문입니다. 1년 6개월여 만인 지난 5월 부산지법은 유가족이 제기한 소송액 39억 원 가운데 90%에 달하는 35억 원을 국방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우면산 소송에서 손해배상 범위가 50%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책임을 90%까지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할 헌법적인 의무가 있다”며 “이번 붕괴사고가 국방부가 점유한 시설물과 연관성이 인정되고 배수시설 불량 등 설치보존 하자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패소한 정부는 유가족 등 피해자를 상대로 항소한 상태입니다.

■ 극한 기후 시대, '예견 가능성'과 '천재지변' 타령만?…'부정의'와 '불운' 구분돼야

'과실'이란 '자기의 행위로 인해 일정 결과가 발생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부주의로 그 행위를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점점 복잡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어디까지가 과실인지 증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과실 입증의 책임을 맡기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는 과실 책임주의를 완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법원은 예견 가능성의 유무에 따라 과실을 판정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후위기로 기록적인 호우가 잦아지고 기상청의 '여름 전망'을 비웃듯 54일의 장마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극한 기후 시대 '예측 불가능한 날씨'가 일상이 된 지금, '예견 가능성'과 '천재지변'을 이유로 책임을 피해갈 수 있을까요?


법학자들은 재난이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예측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만큼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과거 유사한 재난이 발생한 적이 없다거나, 예견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피해자의 청구가 기각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주디스 슈클라(Judith N. Shklar)의 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연재해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여기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있어 '부정의'(injustice)와 '불운'은 구분돼야 한다. 불운으로 치부되는 것 속에 부정의가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다면 분명 자연 현상이지만 전적으로 희생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운'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디스 슈클라는 말합니다.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방치하거나 피해를 더 크게 만든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티몬스 로버츠(Timmons Roberts) 미국 브라운대 환경사회학과 교수도 저서 '기후변화의 부정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후변화 시대에 자연재해를 단순히 '불운'으로 처리할 수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중대한 악영향을 개인이 전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불운으로 보는 것은 지금의 기후변화가 기본적으로 산업과 자본주의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부정의'(injustice)한 것이다.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보면 최근 잦아지고 있는 자연재해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적응 조치를 이행하지 않은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적용돼온 국가 배상 책임의 판례 법리를 수정하거나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 일상이 된 '재난 시대'…모두가 잠재적 '재난 생존자'

우리 헌법 제34조(제1,6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피해에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천재지변' 여부에 더 이상 무게를 둘 것이 아니라 관련 기관이 재해를 예방하고 위험을 사전에 관리할 의무를 제대로 준수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법학자들의 말입니다.

지난여름 역대 최장 장마는 전국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중부지방의 장마는 54일간 이어지며 1973년 관측 이후 가장 길었고 전국의 강수 일수도 28.3일로 최장을 기록했습니다. 장마 기간 전국 평균 강수량은 687mm로 평년보다 2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자연재해를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00년 빈도의 강수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재난 생존자들은 정부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소송이라는 '가시밭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안전은 기본권 보장의 전제 조건이자 국가의 기본 과제입니다. 가혹한 재난을 겪은 생존자들을 이대로 버려두는 일은 진정 '부조리'가 아닐까요?

다음 기사에서는 '재난 생존자들의 트라우마와 심리 지원'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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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난생존자]③ 극한 기후 시대, ‘자연재해’는 ‘개인 책임’?
    • 입력 2021-06-30 16:03:52
    • 수정2021-07-12 09:34:11
    취재K

장마를 앞두고 지난해 수해 피해를 본 '재난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포근한 안식처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만난 재난생존자들은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소송'이었습니다. 아직 아픔이 가시지도 않은 이들이 법정에 선 까닭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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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규명 없이는 '보상' 안 돼!

도심 지하차도에서 엄마는 딸을 잃었고, 평화롭던 아파트에선 50대 가장이 갑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방이 무너진 섬진강 주민들은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침수의 경우 200만 원, 주택 피해는 최대 1,600만 원이 전부입니다. 그 외 보상은 원인 규명을 하기 전까지 어렵다는 게 정부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조사, 1년 넘게 '진행 중'입니다. 때문에 재난생존자 대부분은 지난해 수해가 단순히 '폭우'로 인한 불운이었는지, 아니면 구조적 문제로 인한 '인재'였는지를 두고 국가와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법원 한 번 가본적 없던 소시민들이 왜 법정 싸움까지 벌여야 하는지, 지금부터 자연재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짚어보겠습니다.

■ 천재지변 = "국가 책임 묻기 어렵다"

섬진강 댐의 방류로 마을 전체가 침수된 구례 지역의 경우 정부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였고, 댐 관리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섬진강 댐은 100년 빈도의 강수를 견디도록 설계됐는데 지난여름 500년에 한 번 내릴까 말까 한 비가 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천재지변'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국가배상법 제5조(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한 책임)
① 도로ㆍ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시설)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국가배상법 제5조 1항>에는 재난 피해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책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 즉 국민입니다.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한데, 피해 입증까지 직접 해야 하는 현실. 그래서 변호사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황다연 KBS 자문변호사는 "기록적인 홍수와 태풍 등 천재지변에 의한 피해는 법률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앞서 100년 빈도로 설계된 섬진강 댐의 경우 이를 초과하는 비가 내려 홍수가 발생했기 때문에 면책 사유가 된다는 게 정부 입장에 힘이 실리는 대목입니다.


다만 보상을 받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재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 또는 '과실'로 피해가 생기거나 손해가 확대된 경우입니다. 도로나 댐, 배수로 등 공공시설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었는지, 지자체가 재난을 미리 알리고 대피시키는 등 관련 조치를 했는지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간의 재해 피해는 누가 이겼을까요? 이제 사례별로 판결을 하나하나 뜯어봐야겠습니다.

■ [서울 우면산 산사태] 8년 만에 국가 배상 책임 '50%' 인정

2011년 7월 27일 서울에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우면산 일대에 산사태가 150여 회 발생했고 사망자는 16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산사태 사망자의 유가족은 서초구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산사태 경보를 내리고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어야 했지만, 담당 공무원들의 과실로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8년간의 지난한 소송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절반만 들어 줬습니다.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서초구의 과실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이 일부 인정된 겁니다. 다만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호우였다는 점을 감안해 손해배상의 범위를 50%로 제한했습니다.

■ [부산 구평동 산사태] '명백한 인재'

2019년은 태풍 7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줬습니다. 특히 7번째 태풍 '미탁'은 10월 3일 개천절까지 큰비를 뿌렸는데요. 그날 부산 사하구 구평동에서 산사태가 일어났고 일가족 3명을 비롯해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습니다. 국방부가 석탄재를 묻어 조성한 연병장의 성토사면이 무너지며 마을을 덮쳤기 때문입니다. 1년 6개월여 만인 지난 5월 부산지법은 유가족이 제기한 소송액 39억 원 가운데 90%에 달하는 35억 원을 국방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우면산 소송에서 손해배상 범위가 50%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책임을 90%까지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할 헌법적인 의무가 있다”며 “이번 붕괴사고가 국방부가 점유한 시설물과 연관성이 인정되고 배수시설 불량 등 설치보존 하자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패소한 정부는 유가족 등 피해자를 상대로 항소한 상태입니다.

■ 극한 기후 시대, '예견 가능성'과 '천재지변' 타령만?…'부정의'와 '불운' 구분돼야

'과실'이란 '자기의 행위로 인해 일정 결과가 발생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부주의로 그 행위를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점점 복잡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어디까지가 과실인지 증명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과실 입증의 책임을 맡기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학계에서는 과실 책임주의를 완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법원은 예견 가능성의 유무에 따라 과실을 판정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후위기로 기록적인 호우가 잦아지고 기상청의 '여름 전망'을 비웃듯 54일의 장마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극한 기후 시대 '예측 불가능한 날씨'가 일상이 된 지금, '예견 가능성'과 '천재지변'을 이유로 책임을 피해갈 수 있을까요?


법학자들은 재난이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예측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만큼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과거 유사한 재난이 발생한 적이 없다거나, 예견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피해자의 청구가 기각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주디스 슈클라(Judith N. Shklar)의 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연재해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여기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있어 '부정의'(injustice)와 '불운'은 구분돼야 한다. 불운으로 치부되는 것 속에 부정의가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다면 분명 자연 현상이지만 전적으로 희생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운'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디스 슈클라는 말합니다.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방치하거나 피해를 더 크게 만든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티몬스 로버츠(Timmons Roberts) 미국 브라운대 환경사회학과 교수도 저서 '기후변화의 부정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후변화 시대에 자연재해를 단순히 '불운'으로 처리할 수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중대한 악영향을 개인이 전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불운으로 보는 것은 지금의 기후변화가 기본적으로 산업과 자본주의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부정의'(injustice)한 것이다.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보면 최근 잦아지고 있는 자연재해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적응 조치를 이행하지 않은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적용돼온 국가 배상 책임의 판례 법리를 수정하거나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 일상이 된 '재난 시대'…모두가 잠재적 '재난 생존자'

우리 헌법 제34조(제1,6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피해에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천재지변' 여부에 더 이상 무게를 둘 것이 아니라 관련 기관이 재해를 예방하고 위험을 사전에 관리할 의무를 제대로 준수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법학자들의 말입니다.

지난여름 역대 최장 장마는 전국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중부지방의 장마는 54일간 이어지며 1973년 관측 이후 가장 길었고 전국의 강수 일수도 28.3일로 최장을 기록했습니다. 장마 기간 전국 평균 강수량은 687mm로 평년보다 2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자연재해를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00년 빈도의 강수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재난 생존자들은 정부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소송이라는 '가시밭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안전은 기본권 보장의 전제 조건이자 국가의 기본 과제입니다. 가혹한 재난을 겪은 생존자들을 이대로 버려두는 일은 진정 '부조리'가 아닐까요?

다음 기사에서는 '재난 생존자들의 트라우마와 심리 지원'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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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어진 ‘재난 생존자’들의 상처…보듬는 노력 필요 ('KBS 뉴스9' 202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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