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두려움에 떠는 ‘홀로 사는’ 농촌 노인들

입력 2021.07.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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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대 노인 성폭행 피해 이후…“머리맡에 낫 두고 잠들어요”

변이 일어난 곳은 전남의 한 농촌이었습니다. 20여 가구로 구성된 작은 마을로, 가구 절반 가까이가 홀로 사는 여성 노인 가구입니다. 홀로 살던 90대 A씨는 지난달 12일 밤 인근 마을에 사는 6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술에 취한 남성은 A씨의 집에 들이닥친 뒤 방으로 끌고 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은 남성을 붙잡아 검찰에 구속 송치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가해 남성이 A씨가 운영하던 구멍가게에 술과 담배를 사러 몇 차례 찾아왔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면식범’에 의한 범행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사건 이후 마을 분위기는 흉흉해졌습니다. 옆집에 홀로 사는 또 다른 90대 여성 B씨는 “그날 이후 날이 어두워지면 이웃의 집에 가 함께 잠을 잔다”고 털어놨습니다. 또 다른 주민은 “옆 마을에 홀로 사는 여성 노인들이 자신도 범죄에 노출될까 두려워 머리맡에 칼과 낫을 두고서야 겨우 잠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 성폭행 피해 노출된 노인들…5년간 3천 건

비슷한 피해자는 A씨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3월에는 전남의 또 다른 농촌에서 홀몸 여성 노인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50대 남성이 붙잡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2015년부터 8건의 성폭행 또는 성폭행 미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건의 진상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성폭행 사건에서 노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동안 노인 성폭행 사건은 전국에서 3천 건이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경찰청 자료를 분석한 것을 보면, 노인 대상 성범죄 건수는 2015년 565건에서 2017년 698건, 2019년 815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노인 성폭행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미화 광주여성의전화 소장은 “모든 성범죄 피해자가 그렇지만 특히 노인들은 자식을 비롯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한 노인도 성폭행을 당해 자녀가 기관에 알렸지만, 피해자인 노인이 꺼려해 신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 신고 어렵고·방범시설 적고…대처 더 어려운 농촌

홀몸 여성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농촌은 성범죄 대처가 더 어렵습니다. 우선 공동체로 묶인 농촌 지역의 특성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올해 1월 펴낸 연구 보고서에서 농촌 주민들은 공동체가 깨지는 걸 두려워해 신고를 꺼린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촌의 성범죄 검거율은 75%로, 도시 지역의 84%보다 낮습니다. 주민끼리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많다는 점도 취약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미리 계획해 범행을 저지르기 쉬운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농촌의 방범 시설이나 치안 자원은 부족합니다. 2019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전국 농촌 3만 6천여 곳 가운데 방범용 CCTV가 있는 곳은 48%로 절반이 채 안 됐습니다. 실제 A씨의 마을에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CCTV가 설치됐습니다.

농촌 마을 노인들을 위한 안전 대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노인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기를 지급하는, ‘응급 안전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습니다. A씨가 살던 지역의 여성 홀몸 노인은 3천3백여 명이지만, 기기를 받은 노인은 20%에 불과한 6백40여 명뿐입니다. 소득 기준 등으로 지급 대상을 제한한 탓입니다.


■ “노인도 성범죄 취약 계층” 인식 강화해야

성범죄에 노출된 노인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노인도 성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돼야 한다는 겁니다. 광주여성의전화 측은 “노인도 언제든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예방 및 대응이 가능해진다”고 말했습니다.

농촌 지역의 치안 인프라를 강화하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도시 지역에만 집중돼 있는 ‘범죄 예방 환경 설계’, 이른바 셉테드(CPTED) 사업을 농어촌 지역으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자율방범대원과 지역 경찰 등을 활용해 순찰을 강화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홀몸 노인들이 잇따라 성범죄 피해를 입은 전남 지역의 ‘1호 자치경찰 시책’은, 공교롭게도 ‘어르신 대상 범죄 예방’이었습니다. 전남자치경찰위원회는 이달 출범과 동시에 “65세 이상 인구가 23%에 이르는 전남의 특성을 반영하여 찾아가는 현장 활동을 강화하고, 어르신 보호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 활동 전개를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성범죄에 취약한 농촌 지역의 홀몸 노인을 위해 부디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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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범죄 두려움에 떠는 ‘홀로 사는’ 농촌 노인들
    • 입력 2021-07-08 06:00:26
    취재K

■ 90대 노인 성폭행 피해 이후…“머리맡에 낫 두고 잠들어요”

변이 일어난 곳은 전남의 한 농촌이었습니다. 20여 가구로 구성된 작은 마을로, 가구 절반 가까이가 홀로 사는 여성 노인 가구입니다. 홀로 살던 90대 A씨는 지난달 12일 밤 인근 마을에 사는 6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술에 취한 남성은 A씨의 집에 들이닥친 뒤 방으로 끌고 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은 남성을 붙잡아 검찰에 구속 송치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가해 남성이 A씨가 운영하던 구멍가게에 술과 담배를 사러 몇 차례 찾아왔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면식범’에 의한 범행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사건 이후 마을 분위기는 흉흉해졌습니다. 옆집에 홀로 사는 또 다른 90대 여성 B씨는 “그날 이후 날이 어두워지면 이웃의 집에 가 함께 잠을 잔다”고 털어놨습니다. 또 다른 주민은 “옆 마을에 홀로 사는 여성 노인들이 자신도 범죄에 노출될까 두려워 머리맡에 칼과 낫을 두고서야 겨우 잠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 성폭행 피해 노출된 노인들…5년간 3천 건

비슷한 피해자는 A씨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3월에는 전남의 또 다른 농촌에서 홀몸 여성 노인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50대 남성이 붙잡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2015년부터 8건의 성폭행 또는 성폭행 미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건의 진상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성폭행 사건에서 노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5년 동안 노인 성폭행 사건은 전국에서 3천 건이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경찰청 자료를 분석한 것을 보면, 노인 대상 성범죄 건수는 2015년 565건에서 2017년 698건, 2019년 815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노인 성폭행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미화 광주여성의전화 소장은 “모든 성범죄 피해자가 그렇지만 특히 노인들은 자식을 비롯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에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한 노인도 성폭행을 당해 자녀가 기관에 알렸지만, 피해자인 노인이 꺼려해 신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 신고 어렵고·방범시설 적고…대처 더 어려운 농촌

홀몸 여성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농촌은 성범죄 대처가 더 어렵습니다. 우선 공동체로 묶인 농촌 지역의 특성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올해 1월 펴낸 연구 보고서에서 농촌 주민들은 공동체가 깨지는 걸 두려워해 신고를 꺼린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촌의 성범죄 검거율은 75%로, 도시 지역의 84%보다 낮습니다. 주민끼리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많다는 점도 취약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미리 계획해 범행을 저지르기 쉬운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농촌의 방범 시설이나 치안 자원은 부족합니다. 2019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전국 농촌 3만 6천여 곳 가운데 방범용 CCTV가 있는 곳은 48%로 절반이 채 안 됐습니다. 실제 A씨의 마을에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CCTV가 설치됐습니다.

농촌 마을 노인들을 위한 안전 대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노인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기를 지급하는, ‘응급 안전 서비스’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습니다. A씨가 살던 지역의 여성 홀몸 노인은 3천3백여 명이지만, 기기를 받은 노인은 20%에 불과한 6백40여 명뿐입니다. 소득 기준 등으로 지급 대상을 제한한 탓입니다.


■ “노인도 성범죄 취약 계층” 인식 강화해야

성범죄에 노출된 노인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노인도 성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돼야 한다는 겁니다. 광주여성의전화 측은 “노인도 언제든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예방 및 대응이 가능해진다”고 말했습니다.

농촌 지역의 치안 인프라를 강화하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도시 지역에만 집중돼 있는 ‘범죄 예방 환경 설계’, 이른바 셉테드(CPTED) 사업을 농어촌 지역으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자율방범대원과 지역 경찰 등을 활용해 순찰을 강화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홀몸 노인들이 잇따라 성범죄 피해를 입은 전남 지역의 ‘1호 자치경찰 시책’은, 공교롭게도 ‘어르신 대상 범죄 예방’이었습니다. 전남자치경찰위원회는 이달 출범과 동시에 “65세 이상 인구가 23%에 이르는 전남의 특성을 반영하여 찾아가는 현장 활동을 강화하고, 어르신 보호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 활동 전개를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성범죄에 취약한 농촌 지역의 홀몸 노인을 위해 부디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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