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허 적발에 “약 타러 가던 중”…‘긴급피난’ 주장 남성, 판결은?

입력 2021.07.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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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법규를 위반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이를 테면 아픈 가족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갈 때 급한 마음에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경찰에 적발되더라도 급박한 상황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취한 행위, 즉 '긴급피난'으로 인정되면 처벌을 면해줍니다.

그런데 무면허 상태에서 급히 약을 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한 남성, 긴급피난을 주장했지만 결국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 눈에 극심한 통증..."약 타러 가려고 어쩔 수 없이 운전"

지난해 10월, 62살 이 모 씨는 대전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눈에 염증으로 극심한 통증이 생겼고 급히 약을 타러 가기 위해 1톤 화물차 운전대를 잡았다고 합니다. 본인 차였지만 이 씨는 면허가 없는 상태였는데요. 그동안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대신 운전을 해줘서 출퇴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면허로 차를 몰았는데, 한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앞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앞차에 타고 있던 30대 여성은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 이 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상과 무면허 운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 1심 재판부 징역 4개월 실형 선고...'긴급피난' 주장하며 항소

이 씨는 1심 재판에서 눈이 아파 약국에 가던 중 접촉사고가 났다며 이런 사정을 참작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앞서 이 씨가 여러 차례 무면허로 운전한 전력이 있었고, 특히 2년 전에도 무면허 운전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점을 반영해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는 곧바로 항소했는데 '긴급피난'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사고 전날 병원에서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았고, 극심한 통증이 생기자 처음엔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마스크를 차고 있지 않아 승차를 거부당하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았다는 겁니다. 또 사고를 낸 것도 통증으로 브레이크를 잠깐 놓친 것 때문이어서 불가항력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긴급피난 '상당한 이유' 있어야"...법원 엄정한 잣대로 판단

항소심에서는 이 씨의 주장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먼저 형법 제22조 1항을 들어 긴급피난이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위급하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로 규정된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이런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에 해당하려면 피난 행위가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어야 하고 피난 행위로 인한 이익이 피해보다 커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피난 행위 자체가 사회윤리나 법질서 전체의 정신에 비춰 적합한 수단이어야 한다며 엄정한 잣대를 제시했습니다.


■ 눈 시술은 인정했지만...무면허 운전은 적합하지 않은 행동

항소심 재판부도 이 씨가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은 점은 인정했지만, 다음날 근무지인 공사현장에 가면서도 점안액 같은 약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갑자기 약을 사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택시들이 승차를 거부해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는 이 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코로나19 시국에 마스크 없이는 택시 이용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이 씨의 말대로 눈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생겼다고 인정하더라도 주변을 잘 살펴야 하는 자동차 운전 특성상 차량을 운전한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씨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브레이크를 놓쳐 사고를 냈다고 했는데 기어 변속기를 중립이 아니라 주차에 두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판시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점을 고려해 이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4개월을 선고했습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119·112 신고...위급해도 신중히 생각해야!

법원이 이렇게 까다롭게 긴급피난을 판단하는 건 이런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고 또 사고 우려까지 있기 때문인데요.

가장 좋은 방법은 119나 112에 신고해 공적인 도움을 받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대전에서 차를 타고 있던 갓 난 아기가 고열이 나 의식까지 잃었는데, 아이 엄마가 곧장 보이는 경찰 지구대를 찾아가 순찰차로 무사히 병원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정말 위급해서 법규 위반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상황이 온다면 이런 행동이 유일한 방법인지, 더 큰 피해를 초래하진 않을지 신중히 생각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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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면허 적발에 “약 타러 가던 중”…‘긴급피난’ 주장 남성, 판결은?
    • 입력 2021-07-09 07:00:34
    취재K

살다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법규를 위반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이를 테면 아픈 가족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갈 때 급한 마음에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경찰에 적발되더라도 급박한 상황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취한 행위, 즉 '긴급피난'으로 인정되면 처벌을 면해줍니다.

그런데 무면허 상태에서 급히 약을 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한 남성, 긴급피난을 주장했지만 결국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 눈에 극심한 통증..."약 타러 가려고 어쩔 수 없이 운전"

지난해 10월, 62살 이 모 씨는 대전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눈에 염증으로 극심한 통증이 생겼고 급히 약을 타러 가기 위해 1톤 화물차 운전대를 잡았다고 합니다. 본인 차였지만 이 씨는 면허가 없는 상태였는데요. 그동안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대신 운전을 해줘서 출퇴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면허로 차를 몰았는데, 한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앞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앞차에 타고 있던 30대 여성은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 이 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상과 무면허 운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 1심 재판부 징역 4개월 실형 선고...'긴급피난' 주장하며 항소

이 씨는 1심 재판에서 눈이 아파 약국에 가던 중 접촉사고가 났다며 이런 사정을 참작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앞서 이 씨가 여러 차례 무면허로 운전한 전력이 있었고, 특히 2년 전에도 무면허 운전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점을 반영해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는 곧바로 항소했는데 '긴급피난'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사고 전날 병원에서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았고, 극심한 통증이 생기자 처음엔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마스크를 차고 있지 않아 승차를 거부당하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았다는 겁니다. 또 사고를 낸 것도 통증으로 브레이크를 잠깐 놓친 것 때문이어서 불가항력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긴급피난 '상당한 이유' 있어야"...법원 엄정한 잣대로 판단

항소심에서는 이 씨의 주장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먼저 형법 제22조 1항을 들어 긴급피난이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위급하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로 규정된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이런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에 해당하려면 피난 행위가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어야 하고 피난 행위로 인한 이익이 피해보다 커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피난 행위 자체가 사회윤리나 법질서 전체의 정신에 비춰 적합한 수단이어야 한다며 엄정한 잣대를 제시했습니다.


■ 눈 시술은 인정했지만...무면허 운전은 적합하지 않은 행동

항소심 재판부도 이 씨가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은 점은 인정했지만, 다음날 근무지인 공사현장에 가면서도 점안액 같은 약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갑자기 약을 사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택시들이 승차를 거부해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는 이 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코로나19 시국에 마스크 없이는 택시 이용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이 씨의 말대로 눈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생겼다고 인정하더라도 주변을 잘 살펴야 하는 자동차 운전 특성상 차량을 운전한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씨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브레이크를 놓쳐 사고를 냈다고 했는데 기어 변속기를 중립이 아니라 주차에 두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판시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점을 고려해 이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4개월을 선고했습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119·112 신고...위급해도 신중히 생각해야!

법원이 이렇게 까다롭게 긴급피난을 판단하는 건 이런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고 또 사고 우려까지 있기 때문인데요.

가장 좋은 방법은 119나 112에 신고해 공적인 도움을 받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대전에서 차를 타고 있던 갓 난 아기가 고열이 나 의식까지 잃었는데, 아이 엄마가 곧장 보이는 경찰 지구대를 찾아가 순찰차로 무사히 병원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정말 위급해서 법규 위반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상황이 온다면 이런 행동이 유일한 방법인지, 더 큰 피해를 초래하진 않을지 신중히 생각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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