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라임’ 후유증…‘1억 투자’ 열어준 당국자는 무슨 생각할까

입력 2021.07.13 (07:01) 수정 2021.07.1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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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기사] [끈질긴 K] “평생 파출부로 모은 9천만 원까지”…우리은행 한 지점서 DLF 40명·70억 피해 (2019.09.16)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83783&ref=A

한 가사도우미가 있습니다. ‘사모펀드 사태’ 당시 꾸준히 회자 되던 피해자 A 씨입니다.

30년간 9천만 원을 모은 A 씨는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없었습니다. 은행에선 “천만 원만 더 가져올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만 원을 더 가져왔습니다. 딸의 적금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만든 ‘1억 원’, 이 ‘1억 원’은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는 ‘최소 투자금’이었습니다.

‘1억 원’은 금융위원회가 2015년에 정해둔 ‘선’이었습니다. 이 정도 넘는 돈이 있다면, 사모펀드에 투자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최소 투자금 ‘1억 원’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시켰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있습니다.


■ 감사원 감사보고서에 쓰인 ‘1억 원’ 완화 경위

최근 감사원의 감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금융감독기구 운영실태’라는 내용의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는 그 중 처음으로 ‘사모펀드 일반투자자 요건 설정 부적정’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억 원’ 완화를 어떻게 정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체 ‘1억 원’은 어쩌다가 사모펀드 최소 투자금이 됐을까요. 지금 그 기원으로 갑니다.


■ 처음엔 “사모펀드는 ‘5억 원’ 넘는 고액 자산가만 하세요.”

발단은 8년 전인 2013년 12월입니다. 금융위는 사모펀드 제도를 개선하겠다며 최소 투자금 ‘5억 원’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금융위는 “사모펀드는 투자 위험성이 큰 점을 감안해 원칙적으로 기관투자자 등 ‘사모 적격투자자’에 한하여 투자를 허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투자금을 ‘5억 원’으로 설정한다고 보도자료에 써놨습니다.

게다가 “개인투자자는 손실 감수 능력이 있는 ‘고액자산가’에 한하여 직접투자 허용”이란 문구도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참 구구절절 맞는 소리입니다.

정말 이대로 됐다면, 가사도우미로 일했던 A 씨는 ‘사모펀드’라는 말을 영원히 듣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 ‘최소 투자금’ 5억 원→1억 원, 먼저 ‘국회’에서

이러던 최소 투자금은 갑자기 1억 원으로 확 깎입니다. 누구 탓인지 알아보자면 먼저 국회입니다. 정부가 제출한 법을 국회에서 논의하면서입니다.

금융위는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면서 ‘최소 투자금은 1억 원 이상으로 하되, 그 금액은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 투자금액’을 ‘5억 원’으로 정할 것이라고 국회에 전합니다. 2014년 12월의 일입니다. 국회 회의록에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습니다.

2014.12.1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2014.12.1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

그런데 몇 차례 논의를 거치고 나니 정부의 태도가 슬쩍 바뀝니다. ‘5억 원’을 최소 투자금으로 삼겠다던 정부의 의지가 약간 변한 겁니다. 당시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최소 투자금 5억 원이 ‘지나치게 세다’는 일부 의원들의 지적이 있던 탓입니다. 넉 달 뒤인 법안심사 소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더 엄격하게 법 개정을 다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2015.4.20 정무위 법인심사 소위2015.4.20 정무위 법인심사 소위

■ ‘시행령’에서 슬쩍 5억→1억 원으로

그렇게 공은 국회에서 정부로 넘어갔습니다. 법에서 ‘1억 이상’이라는 한도를 정한 후 대통령령에서 구체적으로 ‘최소 투자금’을 규정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럼 실제로는 어떻게 됐을까요. 공언대로 최소 투자금을 5억 원으로 정했을까요?

정부는 최소 투자금을 ‘1억 원’으로 정했습니다. 5억 원으로 정하겠다던 계획과 다르게 낮춘 것입니다. ‘일반투자자의 투자 기회를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일반투자자의 시장진입 장벽이 대폭 낮아졌습니다. 1억 원만 들고 있으면 사모펀드에 돈 넣을 수 있었던 근본 이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처참한 수준입니다. 개인 일반투자자 중 투자금액이 5억 원 미만인 경우가 DLF 사태 92.5%, 라임 사태 88.4%, 옵티머스 사태 90.6%였습니다. 이들 모두가 금융위가 투자자 최소투자금을 1억 원으로 낮추면서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감사원은 이런 내용을 밝히면서도 누가 어떻게 이 같은 시행령을 만들게 됐는지, 주도한 부서는 어딘지, 당시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 구체적인 감사 내용을 담지는 않았습니다. 사모펀드 사태의 근본 원인이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은 것입니다.


■다시 1억 원에서 ‘엉거주춤’ 3억 원으로

결국, 금융위는 ‘사모펀드 사태’가 한참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난 뒤인 2019년 12월 ‘종합 개선방안’을 내놨습니다.

최소 투자요건을 기존 1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올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3억 원으로 올리면 앞으로 제2의 사모펀드 사태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을지 궁금해지지만, 책임성이 조금이나마 올라간다는 판단이었겠죠.

금융위는 당시 최소 투자금을 3억 원으로 올리면서 ‘충분한 위험 감수 능력이 있는 투자자’가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밝혔습니다. 최소투자금을 정하는 취지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2019.11.14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 금융위원회2019.11.14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 금융위원회


■ ‘라임’ 안 끝났다...‘1억 허용’ 사과 제대로 없는 금융위

사모펀드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오늘 대신증권과 하나은행, 부산은행 등 3개 사에 대해 분쟁조정위원회가 개최됩니다.

특히 대신증권 반포WM센터에서 팔려나간 라임 펀드에 대한 분쟁조정위 판단이 주목됩니다. 여기서만 2,480억 원어치 펀드가 팔려나갔습니다. 여기서 팔린 펀드도 대부분 1~5억 원 사이의 일반투자자로 추정됩니다.


‘라임 사태’가 발생한 게 2019년입니다. 피해자들은 ‘100% 원금반환’을 주장하며 아직까지 피해금에 대해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모펀드 투자 요건을 ‘1억 원’으로 완화해준 당국자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역사에 남을만한 대규모 금융 피해가 아직도 상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융위는 ‘1억 원’ 완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습니다. 9천만 원을 쥐고 사모펀드로 뛰어든 A 씨 앞에서 누군가는 머리를 숙이는 일, 무너진 금융당국 신뢰를 추스르는 첫 단추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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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라임’ 후유증…‘1억 투자’ 열어준 당국자는 무슨 생각할까
    • 입력 2021-07-13 07:01:16
    • 수정2021-07-13 17:17:51
    취재K

[연관 기사] [끈질긴 K] “평생 파출부로 모은 9천만 원까지”…우리은행 한 지점서 DLF 40명·70억 피해 (2019.09.16)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83783&ref=A

한 가사도우미가 있습니다. ‘사모펀드 사태’ 당시 꾸준히 회자 되던 피해자 A 씨입니다.

30년간 9천만 원을 모은 A 씨는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없었습니다. 은행에선 “천만 원만 더 가져올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만 원을 더 가져왔습니다. 딸의 적금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만든 ‘1억 원’, 이 ‘1억 원’은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는 ‘최소 투자금’이었습니다.

‘1억 원’은 금융위원회가 2015년에 정해둔 ‘선’이었습니다. 이 정도 넘는 돈이 있다면, 사모펀드에 투자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최소 투자금 ‘1억 원’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시켰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있습니다.


■ 감사원 감사보고서에 쓰인 ‘1억 원’ 완화 경위

최근 감사원의 감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금융감독기구 운영실태’라는 내용의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는 그 중 처음으로 ‘사모펀드 일반투자자 요건 설정 부적정’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억 원’ 완화를 어떻게 정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체 ‘1억 원’은 어쩌다가 사모펀드 최소 투자금이 됐을까요. 지금 그 기원으로 갑니다.


■ 처음엔 “사모펀드는 ‘5억 원’ 넘는 고액 자산가만 하세요.”

발단은 8년 전인 2013년 12월입니다. 금융위는 사모펀드 제도를 개선하겠다며 최소 투자금 ‘5억 원’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금융위는 “사모펀드는 투자 위험성이 큰 점을 감안해 원칙적으로 기관투자자 등 ‘사모 적격투자자’에 한하여 투자를 허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투자금을 ‘5억 원’으로 설정한다고 보도자료에 써놨습니다.

게다가 “개인투자자는 손실 감수 능력이 있는 ‘고액자산가’에 한하여 직접투자 허용”이란 문구도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참 구구절절 맞는 소리입니다.

정말 이대로 됐다면, 가사도우미로 일했던 A 씨는 ‘사모펀드’라는 말을 영원히 듣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 ‘최소 투자금’ 5억 원→1억 원, 먼저 ‘국회’에서

이러던 최소 투자금은 갑자기 1억 원으로 확 깎입니다. 누구 탓인지 알아보자면 먼저 국회입니다. 정부가 제출한 법을 국회에서 논의하면서입니다.

금융위는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면서 ‘최소 투자금은 1억 원 이상으로 하되, 그 금액은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 투자금액’을 ‘5억 원’으로 정할 것이라고 국회에 전합니다. 2014년 12월의 일입니다. 국회 회의록에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습니다.

2014.12.1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
그런데 몇 차례 논의를 거치고 나니 정부의 태도가 슬쩍 바뀝니다. ‘5억 원’을 최소 투자금으로 삼겠다던 정부의 의지가 약간 변한 겁니다. 당시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최소 투자금 5억 원이 ‘지나치게 세다’는 일부 의원들의 지적이 있던 탓입니다. 넉 달 뒤인 법안심사 소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더 엄격하게 법 개정을 다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2015.4.20 정무위 법인심사 소위
■ ‘시행령’에서 슬쩍 5억→1억 원으로

그렇게 공은 국회에서 정부로 넘어갔습니다. 법에서 ‘1억 이상’이라는 한도를 정한 후 대통령령에서 구체적으로 ‘최소 투자금’을 규정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럼 실제로는 어떻게 됐을까요. 공언대로 최소 투자금을 5억 원으로 정했을까요?

정부는 최소 투자금을 ‘1억 원’으로 정했습니다. 5억 원으로 정하겠다던 계획과 다르게 낮춘 것입니다. ‘일반투자자의 투자 기회를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일반투자자의 시장진입 장벽이 대폭 낮아졌습니다. 1억 원만 들고 있으면 사모펀드에 돈 넣을 수 있었던 근본 이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처참한 수준입니다. 개인 일반투자자 중 투자금액이 5억 원 미만인 경우가 DLF 사태 92.5%, 라임 사태 88.4%, 옵티머스 사태 90.6%였습니다. 이들 모두가 금융위가 투자자 최소투자금을 1억 원으로 낮추면서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감사원은 이런 내용을 밝히면서도 누가 어떻게 이 같은 시행령을 만들게 됐는지, 주도한 부서는 어딘지, 당시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 구체적인 감사 내용을 담지는 않았습니다. 사모펀드 사태의 근본 원인이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은 것입니다.


■다시 1억 원에서 ‘엉거주춤’ 3억 원으로

결국, 금융위는 ‘사모펀드 사태’가 한참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난 뒤인 2019년 12월 ‘종합 개선방안’을 내놨습니다.

최소 투자요건을 기존 1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올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3억 원으로 올리면 앞으로 제2의 사모펀드 사태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을지 궁금해지지만, 책임성이 조금이나마 올라간다는 판단이었겠죠.

금융위는 당시 최소 투자금을 3억 원으로 올리면서 ‘충분한 위험 감수 능력이 있는 투자자’가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밝혔습니다. 최소투자금을 정하는 취지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2019.11.14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방안〉, 금융위원회

■ ‘라임’ 안 끝났다...‘1억 허용’ 사과 제대로 없는 금융위

사모펀드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오늘 대신증권과 하나은행, 부산은행 등 3개 사에 대해 분쟁조정위원회가 개최됩니다.

특히 대신증권 반포WM센터에서 팔려나간 라임 펀드에 대한 분쟁조정위 판단이 주목됩니다. 여기서만 2,480억 원어치 펀드가 팔려나갔습니다. 여기서 팔린 펀드도 대부분 1~5억 원 사이의 일반투자자로 추정됩니다.


‘라임 사태’가 발생한 게 2019년입니다. 피해자들은 ‘100% 원금반환’을 주장하며 아직까지 피해금에 대해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모펀드 투자 요건을 ‘1억 원’으로 완화해준 당국자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역사에 남을만한 대규모 금융 피해가 아직도 상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융위는 ‘1억 원’ 완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습니다. 9천만 원을 쥐고 사모펀드로 뛰어든 A 씨 앞에서 누군가는 머리를 숙이는 일, 무너진 금융당국 신뢰를 추스르는 첫 단추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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