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쇄기 사망 청년’ 아버지, 416일 만에 받은 ‘사죄문’

입력 2021.07.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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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재순 씨가 산재 사고로 숨진 업체의 대표가 유족에게 보낸 옥중 편지.고(故) 김재순 씨가 산재 사고로 숨진 업체의 대표가 유족에게 보낸 옥중 편지.

■ 산재 사망 피해자에게 옥중 편지 보낸 공장 대표

옥중 편지에 적힌 글씨는 가지런했습니다. 장식 없는 편지지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이었습니다. 어조는 정중했습니다. 혈육을 잃은 부모를 조심스럽게 위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 자란 자식을 떠나 보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입에 담기에도 죄송하다"고 썼고, "마음으로 깊이 사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5월 광주광역시의 한 폐기물 처리 업체에서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진 고(故) 김재순 씨의 유족이 업체 대표 박 모 씨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지난해 5월, 고(故) 김재순 씨가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진 사고가 일어난 현장 CCTV지난해 5월, 고(故) 김재순 씨가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진 사고가 일어난 현장 CCTV

그러나 한 장짜리 짧은 편지가 쓰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재순 씨가 숨지고 박 대표가 편지를 보내기까지 걸린 기간은 1년 하고도 두 달, 날수로 치면 416일입니다.


■ 책임 회피→법정구속→사죄…416일 만에 받은 사과

사고가 일어난 지난해로 시계를 되돌려 볼까요. 사고 직후 업체 측 입장은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공장 직원이 시키지도 않은 파쇄기 주변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노동계 등이 꾸린 '故 김재순 노동시민대책위'가 공장 CCTV를 분석해 자체 조사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재순 씨는 평소에도 파쇄기 옆에서 위태롭게 일해 왔던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몸이 빨려들어갈 수 있는 파쇄기에는 안전 덮개나 비상 차단 장치조차 없었습니다.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1인 시위를 계속해 온 김재순 씨의 아버지 김선양 씨.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1인 시위를 계속해 온 김재순 씨의 아버지 김선양 씨.

대책위는 엄정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업체 측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장치를 파쇄기에 설치하지 않은 사실, 안전 통로를 만들지 않고 작업계획서를 쓰지 않는 등 13개 항목에 이르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저지른 사실 등이 드러났습니다.

같은 공장에서는 2014년에도 노동자가 목재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졌지만, 벌금형에 그친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산재 사고로서는 비교적 무거운 형인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했습니다. 집행유예형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일부의 예상을 뒤엎고 1심에서는 실형이 나왔습니다. 재판부가 징역 1년을 선고하고 업체 대표를 법정구속한 겁니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벌금이나 집행유예형이 아닌, 실형에 법정구속까지 내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조치가 너무 소홀했고, 피해자 유족이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지도 못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 '감형' 의도 있더라도…"공개 사과에 의미 있다"

박 대표는 1심 판결에 불복해 법원에 항소했습니다. 2심 첫 공판은 내일(14일)입니다. 이미 사실 관계가 확인된 이상, 사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업무상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족의 피해를 위로하는 행동을 한다면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법정구속된 지 1달 반 만에 박 대표가 유족에게 편지를 쓰고, 수감 중인 박 대표를 대신해 아내가 공개석상에 나와 사죄문을 낭독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산재 사고가 발생한 업체 측의 공개 사과 기자회견.산재 사고가 발생한 업체 측의 공개 사과 기자회견.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재순 씨의 아버지 김선양 씨는 사죄를 받아들였습니다. 1년 넘게 '사업주 엄중 처벌'과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해 온 아버지는 형식적으로라도 공개 사과가 이뤄지길 바랐습니다.

산업재해 사고의 책임자가 언론과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죄 편지를 받아 든 김선양 씨는 "공개 사과는 늦었지만 사필귀정이다"라며 "재순이처럼 열악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노동의 권리를 찾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선양 씨와 함께 백방으로 뛰어 온 금속노조는 "또 다른 김재순이 나오지 않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개정 투쟁과 노조 없는 영세사업장 안전 강화에 앞장서겠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김선양 씨와, 수감 중인 남편 대신 사죄문을 낭독하고 있는 박 모 대표의 아내.기자회견장에 나온 김선양 씨와, 수감 중인 남편 대신 사죄문을 낭독하고 있는 박 모 대표의 아내.

■ 김재순 사건 일단락됐지만…사과는 너무나도 늦었다

사고 1년을 넘긴 뒤 사죄 편지가 전달되면서 '고(故) 김재순 사건'은 일단락되는 분위기입니다.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책임자가 처벌됐고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도 강화됐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못내 아쉬움도 듭니다. 또박또박 적은 사과의 편지, 좀 더 일찍 쓸 수는 없었을까요?

재순 씨의 죽음을 밝히기 위한 '시민연대'가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경찰이 수사해 여러가지 법 위반 사항을 밝혀내기 전에, 검찰이 엄벌을 구형하기 전에, 법원이 법정구속을 선고하기 전에, 그리고 항소심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박 대표가 먼저 유족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의 뜻을 전했다면 어땠을까요?

형량이나 처벌과 관계 없이 회삿일의 최종 책임자로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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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쇄기 사망 청년’ 아버지, 416일 만에 받은 ‘사죄문’
    • 입력 2021-07-13 09:37:37
    취재K
고(故) 김재순 씨가 산재 사고로 숨진 업체의 대표가 유족에게 보낸 옥중 편지.
■ 산재 사망 피해자에게 옥중 편지 보낸 공장 대표

옥중 편지에 적힌 글씨는 가지런했습니다. 장식 없는 편지지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이었습니다. 어조는 정중했습니다. 혈육을 잃은 부모를 조심스럽게 위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 자란 자식을 떠나 보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입에 담기에도 죄송하다"고 썼고, "마음으로 깊이 사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5월 광주광역시의 한 폐기물 처리 업체에서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진 고(故) 김재순 씨의 유족이 업체 대표 박 모 씨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지난해 5월, 고(故) 김재순 씨가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진 사고가 일어난 현장 CCTV
그러나 한 장짜리 짧은 편지가 쓰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재순 씨가 숨지고 박 대표가 편지를 보내기까지 걸린 기간은 1년 하고도 두 달, 날수로 치면 416일입니다.


■ 책임 회피→법정구속→사죄…416일 만에 받은 사과

사고가 일어난 지난해로 시계를 되돌려 볼까요. 사고 직후 업체 측 입장은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공장 직원이 시키지도 않은 파쇄기 주변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노동계 등이 꾸린 '故 김재순 노동시민대책위'가 공장 CCTV를 분석해 자체 조사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재순 씨는 평소에도 파쇄기 옆에서 위태롭게 일해 왔던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몸이 빨려들어갈 수 있는 파쇄기에는 안전 덮개나 비상 차단 장치조차 없었습니다.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1인 시위를 계속해 온 김재순 씨의 아버지 김선양 씨.
대책위는 엄정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업체 측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장치를 파쇄기에 설치하지 않은 사실, 안전 통로를 만들지 않고 작업계획서를 쓰지 않는 등 13개 항목에 이르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저지른 사실 등이 드러났습니다.

같은 공장에서는 2014년에도 노동자가 목재 파쇄기에 몸이 끼어 숨졌지만, 벌금형에 그친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산재 사고로서는 비교적 무거운 형인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했습니다. 집행유예형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일부의 예상을 뒤엎고 1심에서는 실형이 나왔습니다. 재판부가 징역 1년을 선고하고 업체 대표를 법정구속한 겁니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벌금이나 집행유예형이 아닌, 실형에 법정구속까지 내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조치가 너무 소홀했고, 피해자 유족이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지도 못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 '감형' 의도 있더라도…"공개 사과에 의미 있다"

박 대표는 1심 판결에 불복해 법원에 항소했습니다. 2심 첫 공판은 내일(14일)입니다. 이미 사실 관계가 확인된 이상, 사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업무상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족의 피해를 위로하는 행동을 한다면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법정구속된 지 1달 반 만에 박 대표가 유족에게 편지를 쓰고, 수감 중인 박 대표를 대신해 아내가 공개석상에 나와 사죄문을 낭독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산재 사고가 발생한 업체 측의 공개 사과 기자회견.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재순 씨의 아버지 김선양 씨는 사죄를 받아들였습니다. 1년 넘게 '사업주 엄중 처벌'과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해 온 아버지는 형식적으로라도 공개 사과가 이뤄지길 바랐습니다.

산업재해 사고의 책임자가 언론과 대중 앞에 나서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죄 편지를 받아 든 김선양 씨는 "공개 사과는 늦었지만 사필귀정이다"라며 "재순이처럼 열악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노동의 권리를 찾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습니다.

김선양 씨와 함께 백방으로 뛰어 온 금속노조는 "또 다른 김재순이 나오지 않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개정 투쟁과 노조 없는 영세사업장 안전 강화에 앞장서겠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김선양 씨와, 수감 중인 남편 대신 사죄문을 낭독하고 있는 박 모 대표의 아내.
■ 김재순 사건 일단락됐지만…사과는 너무나도 늦었다

사고 1년을 넘긴 뒤 사죄 편지가 전달되면서 '고(故) 김재순 사건'은 일단락되는 분위기입니다.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책임자가 처벌됐고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도 강화됐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못내 아쉬움도 듭니다. 또박또박 적은 사과의 편지, 좀 더 일찍 쓸 수는 없었을까요?

재순 씨의 죽음을 밝히기 위한 '시민연대'가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경찰이 수사해 여러가지 법 위반 사항을 밝혀내기 전에, 검찰이 엄벌을 구형하기 전에, 법원이 법정구속을 선고하기 전에, 그리고 항소심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박 대표가 먼저 유족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의 뜻을 전했다면 어땠을까요?

형량이나 처벌과 관계 없이 회삿일의 최종 책임자로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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