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에너지밸리’…‘생산지 세탁’ 의혹

입력 2021.07.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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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 납품용 변압기(자료화면)한국전력 납품용 변압기(자료화면)

'변압기'라고 들어보셨나요?

1970년대 가정용 전압이 110V에서 220V로 바뀌던 시절 각 가정마다 한 개씩은 가지고 있던 "도란스"라고 불리던 장치가 바로 변압기입니다.

요즘에는 가정용은 찾아보기 힘들고 한국전력이 전신주나 인도에 설치하는 변압기가 가장 많이 생산됩니다.

전기의 전압을 낮춰서 각 가정까지 보내주는 역할을 하죠.

2014년 한전이 전남 나주에 있는 빛가람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경기도나 충청도 등에 본사가 있는 변압기 생산 업체들이 잇따라 전남 나주의 혁신산업단지, 이른바 에너지밸리에 입주했는데요.

일부 업체들이 투자유치 기업에 주는 각종 혜택만 받고, 정작 에너지밸리에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정황이 KBS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 경기도 제품이 나주산으로 둔갑..'생산지 세탁 의혹'

‘직접생산 위반’ 의혹 전력 기자재(변압기, 변압기 중신, 개폐기)‘직접생산 위반’ 의혹 전력 기자재(변압기, 변압기 중신, 개폐기)

지난달 초 경기도의 A 변압기 업체에서 물건을 실은 화물차가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 만에 전남 나주혁신산업단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업체가 나주에 운영하는 제2공장입니다.

취재진은 직원들이 나와 지게차로 변압기 완제품과 변압기 심장부로 불리는 '중신'을 내려 공장 안으로 옮기는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바로 전날 밤에도 비슷한 하역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지난 5월에는 혁신산단의 B업체가 화물차에 싣고 온 개폐기 완제품을 공장 안으로 반입하는 현장이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B업체는 변압기도 직접 만들지 않고, 제3의 업체가 제품 일부를 만들어줬다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다른 지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나주 공장으로 가져와서, 시험과 검수 등 최종 단계만 거쳐 한전에 납품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들입니다.

나주공장에서 직접 생산하지 않으면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률 등과 한전 내규 위반입니다.

해당 업체들의 해명은 한결같았습니다.

A와 B 업체 모두 "전남 나주 현지 공장에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취재진이 확인한 제품은 본사에서 수리하거나 시험만 해서 가져온 물량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한전이 KBS가 취재한 업체 3곳을 대상으로 현장 점검을 벌인 결과, 직접생산 기준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나 후속 조치가 진행중입니다.

■ 에너지밸리 직접생산 위반 "공공연한 비밀"

그런데 적발된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에너지밸리에서 직접생산 위반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밝혔습니다.

모 업체 관계자는 "꼼수가 점점 보편화가 돼 버렸고, 입주 업체의 90%는 나주 현지가 아닌 외부에서 물건을 만들어 가져온다." 라고 털어놨습니다.

인근 산단에는 변압기 생산에서 가장 까다로운 필수 공정인 '권선(절연지에 코일 등을 감는 작업)' 만 전문적으로 해주는 하청 업체까지 생겨났습니다.

■ 고용인원도 속여.."실사 때만 인원 맞춰 놓는다"

직접생산 기준에는 제조 경력자 등 '필수 인력'도 포함돼 있습니다.

물건을 만들지 않는데 고용인원은 유지하고 있을까요?

취재진은 근로복지공단에 신고된 업체별 고용인원과 실제 상시 근로자 수를 비교해봤습니다.

정규직이 아닌 용역근로자로 근무 인원을 채우거나 상시 근로자가 절반도 안 되는 등, 59개 한전 납품업체 가운데 최소 17개 업체가 서류상 고용인원과 실제 근로자수가 달랐습니다.

업체 내부 관계자는 "직원 명단에 다른 공장 직원의 이름을 올려놓거나 한전 실사 때만 용역 근로자를 고용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 'N분의 1'의 나눠먹기.."법 지키면 손해"


에너지밸리에서 제품을 직접 생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업체들이 전남 나주에 공장을 세운 이유는 사실상 딱 한 가지입니다.

한전의 '특별 물량' 때문입니다.

한전은 지방중소기업 특별지원지역 지원 근거에 따라 전력기자재 발주량의 20%를 에너지밸리 입주기업을 대상으로 우선 구매합니다.

각 품목별로 결성된 협동조합은 이 물량을 직접생산 승인 업체에 무조건 'N 분의 1'로 배정해줍니다.

한전만 잘 속이면 실제 고용인원이 30명이든 4명이든 똑같은 물량을 납품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셈입니다.

이를 노린 일부 업체들이 일단 공장을 지어 일단 한전 물량을 따낸 뒤, 타 지역의 본사에서 나주공장 물량까지 만들어 납품하면서 매출을 올리고 인건비 부담은 줄이는 겁니다.

아예 타사에서 완제품을 받아 한전에 납품하고, 업체 실적만 올리는 경우도 있다는 게 업체 관계자들의 말입니다.

한 업체는 "우리는 인건비 써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옆 공장은 두세 명 인력으로 매번 우리와 똑같은 물량을 받아가지고 검수만 해서 납품을 하는 걸 보면 억울하고 힘들 때가 많다" 고 말합니다.

법과 기준을 지키며 열심히 하는 업체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다.

■ 직접생산 위반 몰랐나..'눈 감은 한전'

그렇다면 한전은 일부 업체들이 직접생산 기준을 위반해가며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업체 관계자들은 한전에 수차례 단속을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모 업체 관계자는 "퇴근할 때는 (옆 공장에) 물건이 없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마당에 물건이 쌓여있었다. 한전에서는 수차례 이런 문제를 알리고 단속을 요구했지만 무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납품 전 검수를 위해 매달 공장을 방문하기 때문에 공장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전 자재검사처 직원들 역시 직접생산 위반 정황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한전 자재처 관계자는 "불시 단속을 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명했습니다. 직접생산 승인 권한이 있는 중소벤처기업부도 수시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전라남도와 나주시 역시, 수백억원의 입지와 설비 보조금을 지급하고도 업체들이 투자계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밸리 전경(전남 나주 혁신산업단지)에너지밸리 전경(전남 나주 혁신산업단지)

■ 한전 뒤늦은 전수조사..직접생산 단속 강화

한전은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전수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달 말까지 에너지밸리 전력기자재 업체들이 직접생산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또 직접생산 점검도 '의무 확인'으로 강화하고, 직접생산 필수 공정 기준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뒤늦게 구색을 맞추려는 업체들이 많아 전수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지 의문"이라며, '숙련된 제조 경력자'들이 산업단지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각종 인프라를 확충하고, 인력 양성을 위한 산학 연계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에너지밸리에 한전이 '특별 혜택'을 주는 근거인 '지방중소기업 특별지원지역'의 효력은 오는 2025년까지입니다.

혜택이 사라지면 입주 업체들이 땅 팔고, 공장 팔고 떠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늬만 에너지밸리'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업체들의 자정 노력과 실효성 있는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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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늬만 에너지밸리’…‘생산지 세탁’ 의혹
    • 입력 2021-07-18 09:01:02
    취재K
한국전력 납품용 변압기(자료화면)
'변압기'라고 들어보셨나요?

1970년대 가정용 전압이 110V에서 220V로 바뀌던 시절 각 가정마다 한 개씩은 가지고 있던 "도란스"라고 불리던 장치가 바로 변압기입니다.

요즘에는 가정용은 찾아보기 힘들고 한국전력이 전신주나 인도에 설치하는 변압기가 가장 많이 생산됩니다.

전기의 전압을 낮춰서 각 가정까지 보내주는 역할을 하죠.

2014년 한전이 전남 나주에 있는 빛가람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경기도나 충청도 등에 본사가 있는 변압기 생산 업체들이 잇따라 전남 나주의 혁신산업단지, 이른바 에너지밸리에 입주했는데요.

일부 업체들이 투자유치 기업에 주는 각종 혜택만 받고, 정작 에너지밸리에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정황이 KBS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 경기도 제품이 나주산으로 둔갑..'생산지 세탁 의혹'

‘직접생산 위반’ 의혹 전력 기자재(변압기, 변압기 중신, 개폐기)
지난달 초 경기도의 A 변압기 업체에서 물건을 실은 화물차가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 만에 전남 나주혁신산업단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업체가 나주에 운영하는 제2공장입니다.

취재진은 직원들이 나와 지게차로 변압기 완제품과 변압기 심장부로 불리는 '중신'을 내려 공장 안으로 옮기는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바로 전날 밤에도 비슷한 하역작업이 진행됐습니다.


지난 5월에는 혁신산단의 B업체가 화물차에 싣고 온 개폐기 완제품을 공장 안으로 반입하는 현장이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B업체는 변압기도 직접 만들지 않고, 제3의 업체가 제품 일부를 만들어줬다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다른 지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나주 공장으로 가져와서, 시험과 검수 등 최종 단계만 거쳐 한전에 납품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들입니다.

나주공장에서 직접 생산하지 않으면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률 등과 한전 내규 위반입니다.

해당 업체들의 해명은 한결같았습니다.

A와 B 업체 모두 "전남 나주 현지 공장에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취재진이 확인한 제품은 본사에서 수리하거나 시험만 해서 가져온 물량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한전이 KBS가 취재한 업체 3곳을 대상으로 현장 점검을 벌인 결과, 직접생산 기준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나 후속 조치가 진행중입니다.

■ 에너지밸리 직접생산 위반 "공공연한 비밀"

그런데 적발된 업체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에너지밸리에서 직접생산 위반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밝혔습니다.

모 업체 관계자는 "꼼수가 점점 보편화가 돼 버렸고, 입주 업체의 90%는 나주 현지가 아닌 외부에서 물건을 만들어 가져온다." 라고 털어놨습니다.

인근 산단에는 변압기 생산에서 가장 까다로운 필수 공정인 '권선(절연지에 코일 등을 감는 작업)' 만 전문적으로 해주는 하청 업체까지 생겨났습니다.

■ 고용인원도 속여.."실사 때만 인원 맞춰 놓는다"

직접생산 기준에는 제조 경력자 등 '필수 인력'도 포함돼 있습니다.

물건을 만들지 않는데 고용인원은 유지하고 있을까요?

취재진은 근로복지공단에 신고된 업체별 고용인원과 실제 상시 근로자 수를 비교해봤습니다.

정규직이 아닌 용역근로자로 근무 인원을 채우거나 상시 근로자가 절반도 안 되는 등, 59개 한전 납품업체 가운데 최소 17개 업체가 서류상 고용인원과 실제 근로자수가 달랐습니다.

업체 내부 관계자는 "직원 명단에 다른 공장 직원의 이름을 올려놓거나 한전 실사 때만 용역 근로자를 고용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 'N분의 1'의 나눠먹기.."법 지키면 손해"


에너지밸리에서 제품을 직접 생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업체들이 전남 나주에 공장을 세운 이유는 사실상 딱 한 가지입니다.

한전의 '특별 물량' 때문입니다.

한전은 지방중소기업 특별지원지역 지원 근거에 따라 전력기자재 발주량의 20%를 에너지밸리 입주기업을 대상으로 우선 구매합니다.

각 품목별로 결성된 협동조합은 이 물량을 직접생산 승인 업체에 무조건 'N 분의 1'로 배정해줍니다.

한전만 잘 속이면 실제 고용인원이 30명이든 4명이든 똑같은 물량을 납품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셈입니다.

이를 노린 일부 업체들이 일단 공장을 지어 일단 한전 물량을 따낸 뒤, 타 지역의 본사에서 나주공장 물량까지 만들어 납품하면서 매출을 올리고 인건비 부담은 줄이는 겁니다.

아예 타사에서 완제품을 받아 한전에 납품하고, 업체 실적만 올리는 경우도 있다는 게 업체 관계자들의 말입니다.

한 업체는 "우리는 인건비 써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옆 공장은 두세 명 인력으로 매번 우리와 똑같은 물량을 받아가지고 검수만 해서 납품을 하는 걸 보면 억울하고 힘들 때가 많다" 고 말합니다.

법과 기준을 지키며 열심히 하는 업체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다.

■ 직접생산 위반 몰랐나..'눈 감은 한전'

그렇다면 한전은 일부 업체들이 직접생산 기준을 위반해가며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업체 관계자들은 한전에 수차례 단속을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모 업체 관계자는 "퇴근할 때는 (옆 공장에) 물건이 없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마당에 물건이 쌓여있었다. 한전에서는 수차례 이런 문제를 알리고 단속을 요구했지만 무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납품 전 검수를 위해 매달 공장을 방문하기 때문에 공장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전 자재검사처 직원들 역시 직접생산 위반 정황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한전 자재처 관계자는 "불시 단속을 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명했습니다. 직접생산 승인 권한이 있는 중소벤처기업부도 수시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전라남도와 나주시 역시, 수백억원의 입지와 설비 보조금을 지급하고도 업체들이 투자계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밸리 전경(전남 나주 혁신산업단지)
■ 한전 뒤늦은 전수조사..직접생산 단속 강화

한전은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전수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달 말까지 에너지밸리 전력기자재 업체들이 직접생산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또 직접생산 점검도 '의무 확인'으로 강화하고, 직접생산 필수 공정 기준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뒤늦게 구색을 맞추려는 업체들이 많아 전수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지 의문"이라며, '숙련된 제조 경력자'들이 산업단지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각종 인프라를 확충하고, 인력 양성을 위한 산학 연계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에너지밸리에 한전이 '특별 혜택'을 주는 근거인 '지방중소기업 특별지원지역'의 효력은 오는 2025년까지입니다.

혜택이 사라지면 입주 업체들이 땅 팔고, 공장 팔고 떠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늬만 에너지밸리'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업체들의 자정 노력과 실효성 있는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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