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왜장 안고 남강 투신한 논개는 기생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

입력 2021.07.21 (12:24) 수정 2021.07.3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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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진주성 달려간 호남 의병장 최경회, 10만 왜군과 싸우다 순절
-왜장 안고 남강 투신한 논개는 기생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
-장수 출신 논개의 성은 朱씨, 장수현감이던 최경회와 부부 인연
-주논개는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갚은 조선의 의녀이자 열사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7월 2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1oNPLQTDcVs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노성태입니다.


◇ 지창환: 오늘 역사 스토리 주제는 무엇인가요?

◆ 노성태: 임진왜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요. 임진왜란 때 우리 지역, 우리 지역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이순신 장군이 편지 속에서 했던 약무호남시무국가 속 국가라고 하는 말 속에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우리 지역 의병장들이 전부 진주성에 들어가서 싸우다가 순절하잖아요. 대표적인 인물이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이고 그리고 그분의 부인이 논개 부인이신데. 오늘은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 그리고 논개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애청자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생소한 분인 것 같은데 설명을 좀 해주시죠

◆ 노성태: 최경회 의병장은 화순에서 태어났는데요. 이때가 1532년이니까 한 500여년 전에 태어나셨던 분이시고. 또 문과에 급제하신 뒤에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지금 같으면 검찰 정도 되겠지요. 형조 좌랑에 이어서 옥구, 장수, 무장 그러니까 주로 전라북도 현감을 역임했고. 그리고 마지막 관직이 담양 부사였습니다. 담양 부사 시절인 선조 24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모친상을 당했고.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시묘살이 하는 도중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 지창환: 상중에 임진왜란을 맞았네요. 최경회 의병장이 돼서 다른 의병장들과는 다르게 경상도에 달려갔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다른 분들도 많이 갔지요. 살펴봤지만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이 대부분 경상도에서 싸웠고. 또 의병 총사령관이었던 김덕령이나 나주 출신 김천일, 또 광주 출신으로 고경명 의병장의 큰아들이었던 고종후 의병장도 다 경상도로 달려가서 왜군과 싸우게 됩니다. 고봉 기대승 문하에서 고경명 의병장과 최경회 의병장이 함께 공부했던 친구였고요. 그런데 고경명 의병장이 7월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8월 최경회는 전라우도의병장으로 추대가 됩니다. 최경회가 그 의병을 이끌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영남 의병장이었던 김면, 그리고 경상도 관찰사. 그때 경상도는 좌도, 우도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해옵니다. 이때 최경회의 부장들은 지금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지켜야지 호남을 버리고 영남 우도까지 가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장들은 우리 지역을 지켜야 된다.

◇ 지창환: 반대를 무릅쓰고 출전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맞습니까?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이때 영남의병장들이 구원 요청을 하자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 의병장이 되어서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려 영남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고 영남 출병을 결정합니다. 지금 화순에 가면 최병회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 이름이 충의사인데 사당이 있고. 또 사당 입구에 가면 방금 말씀드린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영호남이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이 되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최경회의 외침이라고 할까, 주장은 오늘 영호남이 화합할 수 있는 시대정신의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지창환: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리가 대승을 하고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상황이 안 좋아서 관군하고 의병마저 철수를 했잖아요. 그런데 그 진주성을 호남 의병이 지켜냈군요. 지켜낸 이유 궁금합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진주성 자체가 앞에 남강이 흐르고 있고 삼면이 험준한 형세로 되어 있어서 천혜의 요새지입니다. 진주성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전국 40%의 세금, 전세를 전담하는 호남으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군량을 보충해야 되는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군침을 삼켰던 곳이지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한 왜는 다음 해인 1593년 9월 또다시 10만 대군을 결집해서 진주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총공세를 해오는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경상도 관군은 물론 의병장 곽재우마저도 성을 버리고 철수했지요.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들어간 것은 최경회 의병장을 비롯한 호남 의병 3500이었던 것입니다.

◇ 지창환: 왜군이 10만 명인데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서 호남 의병 3500명으로 게임이 안 됐을 것 같아요.

◆ 노성태: 이순신 명량대첩 때도 130:13이었거든요. 해냈습니다만 아무튼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랄까. 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원 없이 일주일을 버텨냈지만 성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함락이 되고 그리고 호남 의병은 거의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남 의병은 전멸되었지만 힘에 부쳤던 왜군도 전라도로의 진출을 포기했기 때문에 전라도의병들이 목숨을 바쳐서 전라도를 지켜냈고. 크게 말씀을 드리면 조선의 운명도 지켜낸 셈이지요.

◇ 지창환: 진주성 전투 그렇게 많은 분이 희생됐는데 그중에서도 정말 열심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영웅이 있을 것 같아요.

◆ 노성태: 촉석루의 세 영웅, 삼장수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경회 의병장이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에 올라서 시 한 수를 읊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지거든요. 그 시가 이것입니다. ‘촉석루의 세 장수는 한 잔 술을 들이키며 강물을 가리키며 웃네.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는데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 하고 남강에 몸을 던지는데 이때 세 장수, 시 속에 등장하는 세 장수가 누굴까? 후대에 많은 사람들은 최경회 본인, 그리고 전라도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서 참여했었던 나주 출신 김천일, 그리고 광주 고경명 의병장의 큰아들로 의병 부대를 수습해서 복수장군이라고 칭했던 고종후. 아무튼 이 세 분을 진주성 전투의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영웅은 세 분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진주성에서 목숨을 걸고 전라도를 그리고 조선을 지켜낸 전라의병 전부가 영웅은 아닐까요?

◇ 지창환: 그렇지요. 장수들도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우리 의병들 전체겠지요. 진주 남강에 아까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군 장수를 껴안고 몸을 던진 분 있잖아요. 논개라고. 이분이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라고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논개의 성이 주논개입니다. 주 씨 하면 명문 성씨지요. 주희, 주자의 후손이니까.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고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지요. 숙부집에 의탁해서 살게 됐는데 숙부가 못된 것 같아요. 돈을 받아먹고 논개를 부잣집에 며느리로 팔아넘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피신해오지만 숙부가 고발해서 체포가 되고 장수 관아에 수감이 되는데 이때 장수 현감이 나중에 낭군이 되는 최경회였던 것입니다. 최경회는 당시 논개 모녀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리고 이후 돌아갈 곳이 없었던 논개 모녀가 최경회 안처 살림을 도우면서 살았고. 또 그때 최경회 부인 김 씨가 병환 중이어서 논개가 김 씨의 병환 수발을 들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수발을 들다가 인연을 맺은 것이군요.

◆ 노성태: 그래서 최경회 본처 김 씨가 병환 중일 때 말씀드린 대로 논개가 수발을 들었고. 그리고 김 씨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논개를 내 뒤에,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김 씨가 죽고 1590년 최경회가 마지막 관직인 담양 부사로 임명이 되자 논개를 부실로 맞아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최경회 족보 해주최씨 세보에도 논개는 의암 부인 신안주씨로 이렇게 올라와 있고요. 그리고 최경회 문집인 일휴당실기에도 논개는 부실로 나오고 있습니다.

◇ 지창환: 저희 학교 다닐 때는 논개하면 기생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잖아요. 보니까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네요.

◆ 노성태: 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요. 바로 잡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 지창환: 의기냐, 의녀냐 이런 논쟁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어떻게 불러야 되나요?

◆ 노성태: 당연히 오늘 애청자 여러분 무엇으로 불러야 될까요? 의녀라고 불러야 됩니다. 아까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최경회의 부실로 부부의 인연을 맺잖아요. 그리고 임진왜란이 다음 해에 일어났고 최경회가 전라의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했고 그리고 2차 진주성전투 당시에 함께 따라가서 뒷수발을 들었던 분이 논개였습니다. 진주성 함락되고 왜군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를 베풀 때 그때 한국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기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생으로 분장을 하고 축하연에 참여해서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계야무라 로쿠스케라고 하는 장수를 유인해서. 진주 남강에 가면 껴안았던 바위가 있잖아요. 그 바위가 의로운 바위해서 의암이라고 부르는데 의암으로 끌고 가서 남강에 투신해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되갚은 조선의 당당한 의녀였고요. 더 나아가서 왜군 장수를 죽인 그래서 우리가 아는 유관순 있잖아요. 남자연 있잖아요. 다 열사라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의녀를 넘어서 저는 논개는 열사로 평가받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지창환: 그런데 진주 촉석루 가면 의로운 기생들 해서 의기사라고 부르는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서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화순 충의사에 가면 논개 사당이 의암영각이고요. 그녀가 태어났던 장수에는 의암사입니다. 그런데 진주 촉석루 사당 이름이 의로운 기생이라는 뜻이잖아요. 의기사인데 이것은 몇 번 말씀을 드리지만 논개는 최경회의 부실이고 후처입니다. 그리고 열사로 추앙받아야 되실 분이거든요.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창환: 오늘 새롭게 아시는 분도 많을 텐데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기녀가 아니라 의녀, 열사로 추앙받아야 된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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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왜장 안고 남강 투신한 논개는 기생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
    • 입력 2021-07-21 12:24:48
    • 수정2021-07-30 15:33:42
    광주
-진주성 달려간 호남 의병장 최경회, 10만 왜군과 싸우다 순절<br />-왜장 안고 남강 투신한 논개는 기생 아닌 의병장 최경회 부인<br />-장수 출신 논개의 성은 朱씨, 장수현감이던 최경회와 부부 인연<br />-주논개는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갚은 조선의 의녀이자 열사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7월 2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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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노성태입니다.


◇ 지창환: 오늘 역사 스토리 주제는 무엇인가요?

◆ 노성태: 임진왜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요. 임진왜란 때 우리 지역, 우리 지역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이순신 장군이 편지 속에서 했던 약무호남시무국가 속 국가라고 하는 말 속에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우리 지역 의병장들이 전부 진주성에 들어가서 싸우다가 순절하잖아요. 대표적인 인물이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이고 그리고 그분의 부인이 논개 부인이신데. 오늘은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 그리고 논개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애청자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생소한 분인 것 같은데 설명을 좀 해주시죠

◆ 노성태: 최경회 의병장은 화순에서 태어났는데요. 이때가 1532년이니까 한 500여년 전에 태어나셨던 분이시고. 또 문과에 급제하신 뒤에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지금 같으면 검찰 정도 되겠지요. 형조 좌랑에 이어서 옥구, 장수, 무장 그러니까 주로 전라북도 현감을 역임했고. 그리고 마지막 관직이 담양 부사였습니다. 담양 부사 시절인 선조 24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모친상을 당했고.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시묘살이 하는 도중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 지창환: 상중에 임진왜란을 맞았네요. 최경회 의병장이 돼서 다른 의병장들과는 다르게 경상도에 달려갔다고 들었습니다.

◆ 노성태: 다른 분들도 많이 갔지요. 살펴봤지만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이 대부분 경상도에서 싸웠고. 또 의병 총사령관이었던 김덕령이나 나주 출신 김천일, 또 광주 출신으로 고경명 의병장의 큰아들이었던 고종후 의병장도 다 경상도로 달려가서 왜군과 싸우게 됩니다. 고봉 기대승 문하에서 고경명 의병장과 최경회 의병장이 함께 공부했던 친구였고요. 그런데 고경명 의병장이 7월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8월 최경회는 전라우도의병장으로 추대가 됩니다. 최경회가 그 의병을 이끌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영남 의병장이었던 김면, 그리고 경상도 관찰사. 그때 경상도는 좌도, 우도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 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원군을 요청해옵니다. 이때 최경회의 부장들은 지금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호남을 지켜야지 호남을 버리고 영남 우도까지 가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장들은 우리 지역을 지켜야 된다.

◇ 지창환: 반대를 무릅쓰고 출전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맞습니까?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이때 영남의병장들이 구원 요청을 하자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 의병장이 되어서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려 영남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고 영남 출병을 결정합니다. 지금 화순에 가면 최병회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 이름이 충의사인데 사당이 있고. 또 사당 입구에 가면 방금 말씀드린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영호남이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이 되는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최경회의 외침이라고 할까, 주장은 오늘 영호남이 화합할 수 있는 시대정신의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지창환: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리가 대승을 하고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상황이 안 좋아서 관군하고 의병마저 철수를 했잖아요. 그런데 그 진주성을 호남 의병이 지켜냈군요. 지켜낸 이유 궁금합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진주성 자체가 앞에 남강이 흐르고 있고 삼면이 험준한 형세로 되어 있어서 천혜의 요새지입니다. 진주성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전국 40%의 세금, 전세를 전담하는 호남으로 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군량을 보충해야 되는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도 군침을 삼켰던 곳이지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한 왜는 다음 해인 1593년 9월 또다시 10만 대군을 결집해서 진주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총공세를 해오는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경상도 관군은 물론 의병장 곽재우마저도 성을 버리고 철수했지요.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들어간 것은 최경회 의병장을 비롯한 호남 의병 3500이었던 것입니다.

◇ 지창환: 왜군이 10만 명인데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서 호남 의병 3500명으로 게임이 안 됐을 것 같아요.

◆ 노성태: 이순신 명량대첩 때도 130:13이었거든요. 해냈습니다만 아무튼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랄까. 관군과 명나라 군대의 지원 없이 일주일을 버텨냈지만 성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함락이 되고 그리고 호남 의병은 거의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남 의병은 전멸되었지만 힘에 부쳤던 왜군도 전라도로의 진출을 포기했기 때문에 전라도의병들이 목숨을 바쳐서 전라도를 지켜냈고. 크게 말씀을 드리면 조선의 운명도 지켜낸 셈이지요.

◇ 지창환: 진주성 전투 그렇게 많은 분이 희생됐는데 그중에서도 정말 열심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영웅이 있을 것 같아요.

◆ 노성태: 촉석루의 세 영웅, 삼장수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경회 의병장이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에 올라서 시 한 수를 읊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지거든요. 그 시가 이것입니다. ‘촉석루의 세 장수는 한 잔 술을 들이키며 강물을 가리키며 웃네.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는데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 하고 남강에 몸을 던지는데 이때 세 장수, 시 속에 등장하는 세 장수가 누굴까? 후대에 많은 사람들은 최경회 본인, 그리고 전라도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서 참여했었던 나주 출신 김천일, 그리고 광주 고경명 의병장의 큰아들로 의병 부대를 수습해서 복수장군이라고 칭했던 고종후. 아무튼 이 세 분을 진주성 전투의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영웅은 세 분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진주성에서 목숨을 걸고 전라도를 그리고 조선을 지켜낸 전라의병 전부가 영웅은 아닐까요?

◇ 지창환: 그렇지요. 장수들도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우리 의병들 전체겠지요. 진주 남강에 아까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군 장수를 껴안고 몸을 던진 분 있잖아요. 논개라고. 이분이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라고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논개의 성이 주논개입니다. 주 씨 하면 명문 성씨지요. 주희, 주자의 후손이니까.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고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지요. 숙부집에 의탁해서 살게 됐는데 숙부가 못된 것 같아요. 돈을 받아먹고 논개를 부잣집에 며느리로 팔아넘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피신해오지만 숙부가 고발해서 체포가 되고 장수 관아에 수감이 되는데 이때 장수 현감이 나중에 낭군이 되는 최경회였던 것입니다. 최경회는 당시 논개 모녀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리고 이후 돌아갈 곳이 없었던 논개 모녀가 최경회 안처 살림을 도우면서 살았고. 또 그때 최경회 부인 김 씨가 병환 중이어서 논개가 김 씨의 병환 수발을 들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수발을 들다가 인연을 맺은 것이군요.

◆ 노성태: 그래서 최경회 본처 김 씨가 병환 중일 때 말씀드린 대로 논개가 수발을 들었고. 그리고 김 씨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논개를 내 뒤에,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김 씨가 죽고 1590년 최경회가 마지막 관직인 담양 부사로 임명이 되자 논개를 부실로 맞아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최경회 족보 해주최씨 세보에도 논개는 의암 부인 신안주씨로 이렇게 올라와 있고요. 그리고 최경회 문집인 일휴당실기에도 논개는 부실로 나오고 있습니다.

◇ 지창환: 저희 학교 다닐 때는 논개하면 기생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잖아요. 보니까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네요.

◆ 노성태: 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요. 바로 잡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 지창환: 의기냐, 의녀냐 이런 논쟁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어떻게 불러야 되나요?

◆ 노성태: 당연히 오늘 애청자 여러분 무엇으로 불러야 될까요? 의녀라고 불러야 됩니다. 아까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최경회의 부실로 부부의 인연을 맺잖아요. 그리고 임진왜란이 다음 해에 일어났고 최경회가 전라의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했고 그리고 2차 진주성전투 당시에 함께 따라가서 뒷수발을 들었던 분이 논개였습니다. 진주성 함락되고 왜군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를 베풀 때 그때 한국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기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생으로 분장을 하고 축하연에 참여해서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계야무라 로쿠스케라고 하는 장수를 유인해서. 진주 남강에 가면 껴안았던 바위가 있잖아요. 그 바위가 의로운 바위해서 의암이라고 부르는데 의암으로 끌고 가서 남강에 투신해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되갚은 조선의 당당한 의녀였고요. 더 나아가서 왜군 장수를 죽인 그래서 우리가 아는 유관순 있잖아요. 남자연 있잖아요. 다 열사라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의녀를 넘어서 저는 논개는 열사로 평가받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지창환: 그런데 진주 촉석루 가면 의로운 기생들 해서 의기사라고 부르는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서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화순 충의사에 가면 논개 사당이 의암영각이고요. 그녀가 태어났던 장수에는 의암사입니다. 그런데 진주 촉석루 사당 이름이 의로운 기생이라는 뜻이잖아요. 의기사인데 이것은 몇 번 말씀을 드리지만 논개는 최경회의 부실이고 후처입니다. 그리고 열사로 추앙받아야 되실 분이거든요.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창환: 오늘 새롭게 아시는 분도 많을 텐데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기녀가 아니라 의녀, 열사로 추앙받아야 된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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