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日 역대 최다 금메달·기록적 코로나…“화(火)가 화(禍)를 불렀다”

입력 2021.08.01 (07:04) 수정 2021.08.01 (10:2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도쿄올림픽 서핑 경기가 한창인 일본 지바(千葉)현 쓰리가사키(釣ヶ崎) 해변 인근에 낙서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콘크리트 벽에는 고리 하나가 빠진 오륜(五輪) 마크, 그 옆에는 얼굴에 방독면을 쓴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사는 오른손에 십자가를, 왼손에는 붉은 고리를 쥐고 있습니다. 돌기가 돋은 붉은 고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연상시킵니다.

SNS에는 다양한 해석이 올라왔습니다. “5대륙(오륜)이 모이면 올림픽이야 가능하겠지만, 코로나 확산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가 도쿄올림픽에 보내는 경고”라는 식입니다.

뱅크시(Banksy)는 철저히 신상을 숨긴 채 신출귀몰하게 거리 벽화를 그린 뒤 사라지는 영국의 그래피티 예술가입니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7월 31일 자 1면 머릿기사로 도쿄올림픽에서 역대 최다인 금메일 17개를 획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일본 산케이신문이 7월 31일 자 1면 머릿기사로 도쿄올림픽에서 역대 최다인 금메일 17개를 획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역대 최다 금메달·기록적 코로나

일본은 최근 두 가지 기록을 동시에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올림픽 개막 9일째인 7월 31일 오후 6시 현재, 일본은 금메달 17개를 따 중국(20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1964년 도쿄 대회, 2004년 아테네 대회 때 세운 기존 최다기록 16개를 일찌감치 넘어섰습니다. 일주일 남짓 남는 폐막까지 ‘목표로 내건 금메달 30개도 꿈은 아니다’(교도통신)는 전망이 나옵니다.

반면에 코로나19 확진자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코로나19 하루 확진자는 최근까지 올해 1월 8일 보고된 7,957명이 최다였는데, 올림픽 기간 이 기록은 거듭 새로 쓰였습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집계를 기준으로 28일 9,573명, 29일 1만 698명, 30일 1만 744명을 기록하며 신규 확진자 수는 사흘 연속 늘었습니다.

도쿄올림픽 개막일인 7월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 앞 광장이 인파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뉴스〉도쿄올림픽 개막일인 7월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 앞 광장이 인파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올림픽 원인 아냐” VS “낙관 편향 때문”

홈그라운드 이점을 살린 일본 선수들의 선전은 반대론을 무릅쓰고 올림픽 개최를 선택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게 유리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스가 총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방역에 실패하면서 올림픽을 발판으로 임기를 연장하려던 구상과는 달리 대회가 ‘양날의 칼’이 된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스가 총리는 7월 30일, 해외 입국자에 대한 방역 강화나 무관중 경기 등을 거론하며 “올림픽이 감염 확산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도쿄(東京) 외에 사이타마(埼玉)·가나가와(神奈川)·지바(千葉)현 등 수도권 3개 광역자치단체와 오사카부(大阪府)에 8월 2일부터 긴급사태를 추가 발효하기로 한 결정을 설명하는 회견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라다 다카유키(原田隆之) 일본 쓰쿠바(筑波)대학 교수(임상심리학) 교수는 7월 28일 NHK와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개최로 코로나를 가볍게 보는 ‘낙관 편향’이 강해졌다. 반복된 긴급사태 선언은 더이상 의미도, 효과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들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 반면에 ‘감염 확대 우려 탓에 올림픽에 반대한다’는 모순된 기분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자극, 특히 일본 선수가 활약하는 ‘밝은 뉴스’를 날마다 접하게 된 거죠. 축제 분위기 속에 ‘코로나19도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결국 듣고 싶지 않은 메시지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심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졌어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7월 2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불편한 질문이 계속되자 역정을 낸 뒤 내각 홍보관을 질타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7월 2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불편한 질문이 계속되자 역정을 낸 뒤 내각 홍보관을 질타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규칙 지켜라”…발끈한 스가

스가 총리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올림픽 개막 이틀 전인 7월 21일, 스가 총리와 총리관저 출입 기자와의 약식 회견 때였습니다.

TBS 라디오 기자 : 오늘 도쿄의 하루 확진자가 1,832명이었습니다. 얼마 전 회견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셨는데, 감염자가 이 정도로 늘어나면 국민의 생명을 정말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스가 총리 : 제대로 분석을 해보세요. 도쿄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지만, 중증화 위험이 큰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중은 4%도 안 됩니다.

TBS 라디오 기자 : 그동안 총리께서는 올림픽 관계자들과 일반 국민은 동선이 다르기(이른바 ‘버블방역’)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말씀과 실제가 다른 것 아닙니까?”

스가 총리 : 그건...여기에 대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제대로 대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대회조직위원회와 연계해 잘 지켜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TBS 라디오 기자 : 결국 말씀과 실제가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스가 총리 : 룰(규칙)을 지키세요!

애매한 대답에 기자가 재차 다그쳐 묻자 스가 총리는 갑자기 안색을 확 바꿨습니다. ‘질문은 추가 질문 없이 단 1회만 해야 한다’는 총리관저 회견 규칙을 내세운 겁니다.

스가 총리는 곧바로 옆에 있던 오노 히카리코(小野日子) 내각 홍보관(대변인)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분명히 말하세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수십 명의 기자에 둘러싸이고, 카메라까지 돌아가는 가운데 자제력마저 잃은 모습을 노출한 겁니다.

7월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코로나19로 희생된 사람 등을 위한 진혼,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7월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코로나19로 희생된 사람 등을 위한 진혼,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화(火)가 화(禍)를 불렀다

스가 총리는 그동안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올림픽이 시작되면 대회 개최를 둘러싼 부정적인 국내 여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견해를 누차 밝혀 왔습니다.

화(火)는 화(禍)를 부른다고 하죠. 화(火)란 언짢아서 성을 내는 것, 화(禍)는 재난과 재앙을 일컫습니다.

올림픽 성화(火)는 필연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경계감을 허물었고, 이는 전례 없는 코로나화(禍)로 이어졌습니다. 스가 총리 입장에선 올림픽을 띄우자니 코로나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고, 코로나를 틀어막자고 올림픽을 희생시킬 수 없는 ‘덫’에 걸린 모양새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언론과 여론의 추궁이 이어지자 스가 총리는 인내심의 바닥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욕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대가입니다.

7월 31일, 올림픽 개최지 도쿄 지역 신규 확진자는 처음으로 4,000명을 넘어섰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日 역대 최다 금메달·기록적 코로나…“화(火)가 화(禍)를 불렀다”
    • 입력 2021-08-01 07:04:07
    • 수정2021-08-01 10:21:39
    특파원 리포트

도쿄올림픽 서핑 경기가 한창인 일본 지바(千葉)현 쓰리가사키(釣ヶ崎) 해변 인근에 낙서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콘크리트 벽에는 고리 하나가 빠진 오륜(五輪) 마크, 그 옆에는 얼굴에 방독면을 쓴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사는 오른손에 십자가를, 왼손에는 붉은 고리를 쥐고 있습니다. 돌기가 돋은 붉은 고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연상시킵니다.

SNS에는 다양한 해석이 올라왔습니다. “5대륙(오륜)이 모이면 올림픽이야 가능하겠지만, 코로나 확산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가 도쿄올림픽에 보내는 경고”라는 식입니다.

뱅크시(Banksy)는 철저히 신상을 숨긴 채 신출귀몰하게 거리 벽화를 그린 뒤 사라지는 영국의 그래피티 예술가입니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7월 31일 자 1면 머릿기사로 도쿄올림픽에서 역대 최다인 금메일 17개를 획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역대 최다 금메달·기록적 코로나

일본은 최근 두 가지 기록을 동시에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올림픽 개막 9일째인 7월 31일 오후 6시 현재, 일본은 금메달 17개를 따 중국(20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1964년 도쿄 대회, 2004년 아테네 대회 때 세운 기존 최다기록 16개를 일찌감치 넘어섰습니다. 일주일 남짓 남는 폐막까지 ‘목표로 내건 금메달 30개도 꿈은 아니다’(교도통신)는 전망이 나옵니다.

반면에 코로나19 확진자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코로나19 하루 확진자는 최근까지 올해 1월 8일 보고된 7,957명이 최다였는데, 올림픽 기간 이 기록은 거듭 새로 쓰였습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집계를 기준으로 28일 9,573명, 29일 1만 698명, 30일 1만 744명을 기록하며 신규 확진자 수는 사흘 연속 늘었습니다.

도쿄올림픽 개막일인 7월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 앞 광장이 인파로 붐비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올림픽 원인 아냐” VS “낙관 편향 때문”

홈그라운드 이점을 살린 일본 선수들의 선전은 반대론을 무릅쓰고 올림픽 개최를 선택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게 유리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스가 총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방역에 실패하면서 올림픽을 발판으로 임기를 연장하려던 구상과는 달리 대회가 ‘양날의 칼’이 된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스가 총리는 7월 30일, 해외 입국자에 대한 방역 강화나 무관중 경기 등을 거론하며 “올림픽이 감염 확산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도쿄(東京) 외에 사이타마(埼玉)·가나가와(神奈川)·지바(千葉)현 등 수도권 3개 광역자치단체와 오사카부(大阪府)에 8월 2일부터 긴급사태를 추가 발효하기로 한 결정을 설명하는 회견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라다 다카유키(原田隆之) 일본 쓰쿠바(筑波)대학 교수(임상심리학) 교수는 7월 28일 NHK와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개최로 코로나를 가볍게 보는 ‘낙관 편향’이 강해졌다. 반복된 긴급사태 선언은 더이상 의미도, 효과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들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 반면에 ‘감염 확대 우려 탓에 올림픽에 반대한다’는 모순된 기분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자극, 특히 일본 선수가 활약하는 ‘밝은 뉴스’를 날마다 접하게 된 거죠. 축제 분위기 속에 ‘코로나19도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결국 듣고 싶지 않은 메시지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심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졌어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7월 21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불편한 질문이 계속되자 역정을 낸 뒤 내각 홍보관을 질타하고 있다. 〈출처=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규칙 지켜라”…발끈한 스가

스가 총리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올림픽 개막 이틀 전인 7월 21일, 스가 총리와 총리관저 출입 기자와의 약식 회견 때였습니다.

TBS 라디오 기자 : 오늘 도쿄의 하루 확진자가 1,832명이었습니다. 얼마 전 회견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셨는데, 감염자가 이 정도로 늘어나면 국민의 생명을 정말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스가 총리 : 제대로 분석을 해보세요. 도쿄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지만, 중증화 위험이 큰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중은 4%도 안 됩니다.

TBS 라디오 기자 : 그동안 총리께서는 올림픽 관계자들과 일반 국민은 동선이 다르기(이른바 ‘버블방역’)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말씀과 실제가 다른 것 아닙니까?”

스가 총리 : 그건...여기에 대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제대로 대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대회조직위원회와 연계해 잘 지켜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TBS 라디오 기자 : 결국 말씀과 실제가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스가 총리 : 룰(규칙)을 지키세요!

애매한 대답에 기자가 재차 다그쳐 묻자 스가 총리는 갑자기 안색을 확 바꿨습니다. ‘질문은 추가 질문 없이 단 1회만 해야 한다’는 총리관저 회견 규칙을 내세운 겁니다.

스가 총리는 곧바로 옆에 있던 오노 히카리코(小野日子) 내각 홍보관(대변인)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분명히 말하세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수십 명의 기자에 둘러싸이고, 카메라까지 돌아가는 가운데 자제력마저 잃은 모습을 노출한 겁니다.

7월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코로나19로 희생된 사람 등을 위한 진혼,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화(火)가 화(禍)를 불렀다

스가 총리는 그동안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올림픽이 시작되면 대회 개최를 둘러싼 부정적인 국내 여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견해를 누차 밝혀 왔습니다.

화(火)는 화(禍)를 부른다고 하죠. 화(火)란 언짢아서 성을 내는 것, 화(禍)는 재난과 재앙을 일컫습니다.

올림픽 성화(火)는 필연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경계감을 허물었고, 이는 전례 없는 코로나화(禍)로 이어졌습니다. 스가 총리 입장에선 올림픽을 띄우자니 코로나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고, 코로나를 틀어막자고 올림픽을 희생시킬 수 없는 ‘덫’에 걸린 모양새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언론과 여론의 추궁이 이어지자 스가 총리는 인내심의 바닥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욕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대가입니다.

7월 31일, 올림픽 개최지 도쿄 지역 신규 확진자는 처음으로 4,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