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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코로나19’ 팬데믹
[특파원 리포트] 닥치고 방역의 시대,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입력 2021.08.01 (08:17) 수정 2021.08.01 (12:00) 특파원 리포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주민들이 생필품 지원을 받기위해 줄을 서 있다. 군인들이 통제한다.사진 AFP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주민들이 생필품 지원을 받기위해 줄을 서 있다. 군인들이 통제한다.사진 AFP

지난해 9월, 미 CDC(질병통제예방센터)는 ‘세입자 퇴거 일시 중단’ 조치를 발표했다. 월세를 내지 못하는 세입자를 집주인이 쫓아낼 수 없도록 했다. (contemporary Halt in Residential Evictions to Prevent the Further Spread of COVID-19). CDC는 세입자가 집에서 쫓겨나면 개인 위생은 물론 자가격리 등 방역이 더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경기부양 지원금 대상이거나, 또는 1)직장에서 쫓겨났거나 2)소득이 줄었거나 3)상당한 의료비 지출이 있으면 된다. 이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아래 사진) 용지에 서명해서 집주인에게 주면 된다. 그럼 월세를 못내도 쫓겨나지 않는다.


CDC(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제공하는 세입자 퇴거 유예 신청서. 하나의 해당 사항만 있다면, 설령 월세가 밀렸어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출처 CDC홈페이지 (심지어 한글 신청서까지 있다)CDC(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제공하는 세입자 퇴거 유예 신청서. 하나의 해당 사항만 있다면, 설령 월세가 밀렸어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출처 CDC홈페이지 (심지어 한글 신청서까지 있다)

당초 넉 달 동안 한시적이였던 이 조치는 이후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계속 연장됐다. 집주인들이 불만도 덩달아 커졌다. 앨라배마 부동산협회가 총대를 맸다. 매달 130억(14조 원 정도) 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다며 소송을 냈다. 느무신 재무장관은 이 조치로 4천만 명의 세입자가 추운 겨울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다며 CDC의 조치를 지원 사격했다.

지난 6월 29일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들은 5:4로 세입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보수 성향의 존 로버트 대법원장과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진보 대법관 3명과 한편에 섰다. 이들은 7월 말이면 어차피 종료될 조치이며, 정부의 임대 지원금 470억 달러(54조원)가 세입자들에 분배될 시간을 더 벌어줘야 한다고 했다.

(이 정책은 미 의회가 대체입법을 하지 못하면서 현지시간 어제(31일)를 끝으로 종료된다. 7월 2일 기준 미국에서 820만 가구가 월세나 월세 대출을 연체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권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이 정책은 하지만 유럽에선 익숙한 조치다. 코로나가 범람하고 서민들의 주거권이 위협받자, 영국과 독일 정부도 세입자의 퇴거를 강제로 막았다. 프랑스는 원래부터 겨울에는 (계약이 끝났더라도) 세입자를 쫓아낼 수 없다.

‘트레브 이베흐날(겨울의 휴전)’이라는 이 제도 덕분에 프랑스 세입자는 11월부터 3월까지 어떤 이유에서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계속 거주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이 제도를 5월까지 연장했다. (한국에서 만약 이런 정책이 나왔다면, 우리 언론은 죽은 레닌까지 살려내면서 이념논쟁으로 도배가 됐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시대. 정부는 시민의 권리를 여기저기서 도려낸다. 재산권도 거침없이 침해한다. 집단의 질서 유지를 요구한다. 집에 있으라면 집에 있어야한다. 딱 그만큼 개인의 자유가 침해된다. 명분은 ‘다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다. 공교롭게 이 원칙은 ‘공화정’과 ‘민주주의’가 더 익숙한 나라에서 더 갈등을 빚고 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이 양분법의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 유럽에선.
프랑스는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려면 백신을 맞았다는 ‘코로나패스’를 지참해야한다. 200여 년 전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면서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이 나라 국민들은 유독 국가권력이 나에게 뭔가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그래서 백신접종도 영국보다 훨씬 뒤쳐졌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국가가 선택해주면 그것을 ‘국가의 폭력’으로 인식한다.

뉴욕시 34만 명의 경찰과 교사는 이제 의무적으로 백신을 맞아야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을 권리, 백신 접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백신을 맞지 않고 가족과 강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잠시 접어야 할 시간이다. 물론 지금 남반구 시드니에선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진다. 시위대 대부분이 용감하게(?) 마스크를 벗었다.

락다운을 반대하는 시드니의 시위대 한 명이 경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시위대 대부분이 마스크를 벗었다. 사진 로이터락다운을 반대하는 시드니의 시위대 한 명이 경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시위대 대부분이 마스크를 벗었다. 사진 로이터

지금 동남아에선.
여전히 권위주의와 독재가 작동하는 동남아 국가에서는 ‘자유나 인권’에 대한 고민 없이 ‘더 쉬운’ 방역이 이뤄진다. 호치민시는 밀접접촉자만 나와도 마을이나 아파트 전체를 통째로 격리한다. 줄잡아 800만 명이 사실상 집에 갇혔다. 낮에 부부가 함께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가도 경찰에 체포될 수 있다. 호치민에선 유래 없는 저녁 6시 통금도 시작됐다.

미얀마 북부 지역에서 지역간 이동금지를 어긴 시민이 군인에게 매를 맞는 영상이 내 휴대폰에 저장돼 있다. 자카르타에선 도시봉쇄를 어기고 문을 연 식당과 상점에 소방차가 다가와 물을 뿌린다. 휴대폰 가게 주인이 젖은 휴대폰들을 바라보며 서럽게 운다.

지난해 12월, 방역이 잘 되던 태국에서 갑자기 수백 명의 확진자들이 쏟아졌다. 정부는 사뭇사콘의 한 수산시장을 통째로 봉쇄했다. 천여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갑자기 철조망 안에 갇혔다. 현장을 취재하다가 문득, 아직 감염되지 않은 수백여 명의 주민들이 그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봉쇄된 마을 한 켠에서 한 할머니가 창가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해 12월 태국 사뭇사콘의 한 어시장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는 마을을 통째로 폐쇄했다. 마을안에는 물론 아직 감염이 안된 수백 명의 주민이 함께 살고 있었다.지난해 12월 태국 사뭇사콘의 한 어시장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는 마을을 통째로 폐쇄했다. 마을안에는 물론 아직 감염이 안된 수백 명의 주민이 함께 살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툭하면 공장직원들의 퇴근까지 금지한다. 이틀전 빈증성에선 ‘퇴근이 금지돼 함께 공장에서 숙식을 하던 직원 248명’이 모두 확진됐다. 만약 미국의 한 시민이 집단 감염된 다른 근로자와 공장에 격리됐다가 이후 확진 판정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정부를 상대로 수백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할 게 틀림없다.

“닥치고 방역...”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시대, 400만 명이 죽었다. 곧 확진자가 2억 명을 넘는다. 국가의 권한은 어느 전쟁 때보다 더 커졌다(어느 전쟁 때보다 더 많이 죽었다) 국가는 어디까지 우리 삶을 규제할 수 있을까.

한국과 싱가포르가 월등하게 방역에 성공한 이유도 감염 사슬을 추적하면서 개인 정보를 ‘합법적’으로 뒤져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뒤져본 뒤에 대중들에게 공개까지 했다.(민변은 정부가 이태원 클럽 방문자를 확인하기위해 시민 1만여 명의 기지국 통신 접속 정보를 수집한 것은 우리 헌법정신을 위배했다며 헌법소원을 냈었다).

이 가치를 포기하지 못해 주저했던 수많은 유럽의 선진국들은 지난해 혹독한 대가를 치뤘다.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국가 권력과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가 맞부딪혔다. 정부는 머뭇거렸고, 그 대가는 ‘다수의 죽음’으로 지불됐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순간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은 자유와 안전 모두 영위할 자격이 없다(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고 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우리 시민사회 이념의 근간을 대변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이 가치를 흔든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의 일부를 포기할 시간이다. 물론 시드니의 시위대는 포기하지 않겠지만...

국가는 인권과 자유를 최소한으로 침해하며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의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변이 바이러스가 번지며 또 사람들이 죽는다. 그러니 지금은 ‘나보다 공동체’다. 자유보다 연대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을 맞을 때다.

그것이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한 본질적 자유를 하루라도 빨리 되찾는 길이다. 지금 이 제도들이 얼마나 무식했는지는 일단 이 죽음의 행렬이 끝난 다음에 논의하도록 하자. 다시 마스크를 주문할 시간이다. 다시 ‘닥치고 방역’이다.


  • [특파원 리포트] 닥치고 방역의 시대,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 입력 2021-08-01 09:17:26
    • 수정2021-08-01 12:00:29
    특파원 리포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주민들이 생필품 지원을 받기위해 줄을 서 있다. 군인들이 통제한다.사진 AFP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주민들이 생필품 지원을 받기위해 줄을 서 있다. 군인들이 통제한다.사진 AFP

지난해 9월, 미 CDC(질병통제예방센터)는 ‘세입자 퇴거 일시 중단’ 조치를 발표했다. 월세를 내지 못하는 세입자를 집주인이 쫓아낼 수 없도록 했다. (contemporary Halt in Residential Evictions to Prevent the Further Spread of COVID-19). CDC는 세입자가 집에서 쫓겨나면 개인 위생은 물론 자가격리 등 방역이 더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경기부양 지원금 대상이거나, 또는 1)직장에서 쫓겨났거나 2)소득이 줄었거나 3)상당한 의료비 지출이 있으면 된다. 이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아래 사진) 용지에 서명해서 집주인에게 주면 된다. 그럼 월세를 못내도 쫓겨나지 않는다.


CDC(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제공하는 세입자 퇴거 유예 신청서. 하나의 해당 사항만 있다면, 설령 월세가 밀렸어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출처 CDC홈페이지 (심지어 한글 신청서까지 있다)CDC(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제공하는 세입자 퇴거 유예 신청서. 하나의 해당 사항만 있다면, 설령 월세가 밀렸어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출처 CDC홈페이지 (심지어 한글 신청서까지 있다)

당초 넉 달 동안 한시적이였던 이 조치는 이후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계속 연장됐다. 집주인들이 불만도 덩달아 커졌다. 앨라배마 부동산협회가 총대를 맸다. 매달 130억(14조 원 정도) 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다며 소송을 냈다. 느무신 재무장관은 이 조치로 4천만 명의 세입자가 추운 겨울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다며 CDC의 조치를 지원 사격했다.

지난 6월 29일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들은 5:4로 세입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보수 성향의 존 로버트 대법원장과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진보 대법관 3명과 한편에 섰다. 이들은 7월 말이면 어차피 종료될 조치이며, 정부의 임대 지원금 470억 달러(54조원)가 세입자들에 분배될 시간을 더 벌어줘야 한다고 했다.

(이 정책은 미 의회가 대체입법을 하지 못하면서 현지시간 어제(31일)를 끝으로 종료된다. 7월 2일 기준 미국에서 820만 가구가 월세나 월세 대출을 연체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권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이 정책은 하지만 유럽에선 익숙한 조치다. 코로나가 범람하고 서민들의 주거권이 위협받자, 영국과 독일 정부도 세입자의 퇴거를 강제로 막았다. 프랑스는 원래부터 겨울에는 (계약이 끝났더라도) 세입자를 쫓아낼 수 없다.

‘트레브 이베흐날(겨울의 휴전)’이라는 이 제도 덕분에 프랑스 세입자는 11월부터 3월까지 어떤 이유에서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계속 거주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이 제도를 5월까지 연장했다. (한국에서 만약 이런 정책이 나왔다면, 우리 언론은 죽은 레닌까지 살려내면서 이념논쟁으로 도배가 됐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시대. 정부는 시민의 권리를 여기저기서 도려낸다. 재산권도 거침없이 침해한다. 집단의 질서 유지를 요구한다. 집에 있으라면 집에 있어야한다. 딱 그만큼 개인의 자유가 침해된다. 명분은 ‘다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다. 공교롭게 이 원칙은 ‘공화정’과 ‘민주주의’가 더 익숙한 나라에서 더 갈등을 빚고 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이 양분법의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 유럽에선.
프랑스는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려면 백신을 맞았다는 ‘코로나패스’를 지참해야한다. 200여 년 전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면서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이 나라 국민들은 유독 국가권력이 나에게 뭔가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그래서 백신접종도 영국보다 훨씬 뒤쳐졌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국가가 선택해주면 그것을 ‘국가의 폭력’으로 인식한다.

뉴욕시 34만 명의 경찰과 교사는 이제 의무적으로 백신을 맞아야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을 권리, 백신 접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백신을 맞지 않고 가족과 강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잠시 접어야 할 시간이다. 물론 지금 남반구 시드니에선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진다. 시위대 대부분이 용감하게(?) 마스크를 벗었다.

락다운을 반대하는 시드니의 시위대 한 명이 경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시위대 대부분이 마스크를 벗었다. 사진 로이터락다운을 반대하는 시드니의 시위대 한 명이 경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시위대 대부분이 마스크를 벗었다. 사진 로이터

지금 동남아에선.
여전히 권위주의와 독재가 작동하는 동남아 국가에서는 ‘자유나 인권’에 대한 고민 없이 ‘더 쉬운’ 방역이 이뤄진다. 호치민시는 밀접접촉자만 나와도 마을이나 아파트 전체를 통째로 격리한다. 줄잡아 800만 명이 사실상 집에 갇혔다. 낮에 부부가 함께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가도 경찰에 체포될 수 있다. 호치민에선 유래 없는 저녁 6시 통금도 시작됐다.

미얀마 북부 지역에서 지역간 이동금지를 어긴 시민이 군인에게 매를 맞는 영상이 내 휴대폰에 저장돼 있다. 자카르타에선 도시봉쇄를 어기고 문을 연 식당과 상점에 소방차가 다가와 물을 뿌린다. 휴대폰 가게 주인이 젖은 휴대폰들을 바라보며 서럽게 운다.

지난해 12월, 방역이 잘 되던 태국에서 갑자기 수백 명의 확진자들이 쏟아졌다. 정부는 사뭇사콘의 한 수산시장을 통째로 봉쇄했다. 천여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갑자기 철조망 안에 갇혔다. 현장을 취재하다가 문득, 아직 감염되지 않은 수백여 명의 주민들이 그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봉쇄된 마을 한 켠에서 한 할머니가 창가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난해 12월 태국 사뭇사콘의 한 어시장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는 마을을 통째로 폐쇄했다. 마을안에는 물론 아직 감염이 안된 수백 명의 주민이 함께 살고 있었다.지난해 12월 태국 사뭇사콘의 한 어시장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는 마을을 통째로 폐쇄했다. 마을안에는 물론 아직 감염이 안된 수백 명의 주민이 함께 살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툭하면 공장직원들의 퇴근까지 금지한다. 이틀전 빈증성에선 ‘퇴근이 금지돼 함께 공장에서 숙식을 하던 직원 248명’이 모두 확진됐다. 만약 미국의 한 시민이 집단 감염된 다른 근로자와 공장에 격리됐다가 이후 확진 판정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정부를 상대로 수백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할 게 틀림없다.

“닥치고 방역...”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시대, 400만 명이 죽었다. 곧 확진자가 2억 명을 넘는다. 국가의 권한은 어느 전쟁 때보다 더 커졌다(어느 전쟁 때보다 더 많이 죽었다) 국가는 어디까지 우리 삶을 규제할 수 있을까.

한국과 싱가포르가 월등하게 방역에 성공한 이유도 감염 사슬을 추적하면서 개인 정보를 ‘합법적’으로 뒤져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뒤져본 뒤에 대중들에게 공개까지 했다.(민변은 정부가 이태원 클럽 방문자를 확인하기위해 시민 1만여 명의 기지국 통신 접속 정보를 수집한 것은 우리 헌법정신을 위배했다며 헌법소원을 냈었다).

이 가치를 포기하지 못해 주저했던 수많은 유럽의 선진국들은 지난해 혹독한 대가를 치뤘다.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국가 권력과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가 맞부딪혔다. 정부는 머뭇거렸고, 그 대가는 ‘다수의 죽음’으로 지불됐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순간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은 자유와 안전 모두 영위할 자격이 없다(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고 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우리 시민사회 이념의 근간을 대변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이 가치를 흔든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의 일부를 포기할 시간이다. 물론 시드니의 시위대는 포기하지 않겠지만...

국가는 인권과 자유를 최소한으로 침해하며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의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변이 바이러스가 번지며 또 사람들이 죽는다. 그러니 지금은 ‘나보다 공동체’다. 자유보다 연대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백신을 맞을 때다.

그것이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한 본질적 자유를 하루라도 빨리 되찾는 길이다. 지금 이 제도들이 얼마나 무식했는지는 일단 이 죽음의 행렬이 끝난 다음에 논의하도록 하자. 다시 마스크를 주문할 시간이다. 다시 ‘닥치고 방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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