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폭염 속 사투…화재 현장의 ‘탐정들’

입력 2021.08.01 (09:17) 수정 2021.08.0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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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새벽 6시 20분쯤,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습니다.

"기자님, 조금 전 한림읍 창고에서 큰불이 나 급하게 출동하려 합니다. 오실 수 있을까요?"

화재 현장에서 불이 난 원인을 조사하는,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광역화재 조사단(이하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의 전화였습니다.

이날은 출범 1주년을 맞은 조사단의 근무 현장을 동행 취재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제주시 우도의 연립주택에서 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함께 우도로 가기로 계획했던 상황. 하지만 이날 새벽 더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조사단이 급히 제주시 한림읍으로 출동해야 했던 겁니다.

취재진은 조사단을 따라 불이 난 한림읍 창고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막 큰 불씨가 잡힌 화재 현장에는 여전히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연기에, 30도를 웃도는 푹푹 찌는 더위까지 겹쳐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소방관들은 막 진압을 마치고 물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방역복처럼 생긴 조사 복장을 덧대 입고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채비를 마친 뒤, 망설임 없이 뿌연 연기가 새 나오던 화재 현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천장을 떠받치던 골조가 휘면서, 곧 내려앉을 것만 같았던 창고 안. 그 안에서 조사관들은 현장 곳곳을 살폈습니다.

끊어진 전선 하나도 유심히 살펴보고, 새까맣게 타버린 기계에 연결된 전선을 발견해 사진찍기를 반복했습니다.

10분이 훌쩍 지나 창고 밖으로 하나둘 나오던 조사관들. 이들은 조사를 마친 뒤에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유독가스가 새 나오는 상황에서, 불이 완전히 꺼지고 조사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김승숙 제주 광역화재조사단 조정관은 "잔불을 끄려면 포크레인으로 창고를 허물어야 하는데, 그때 화재 원인을 밝혀줄 증거들이 훼손될 수도 있다"며 "유독가스 탓에 피부 곳곳이 간지럽고 하지만, 불이 난 원인을 빨리 밝히려면 지금 들어가는 게 낫다"고 답했습니다.

불을 끄는 것과 불이 난 원인을 조사하는 것. 어느 것 하나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둘 사이에서, 조사관들은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 화재 원인 밝혀내는 광역화재 조사단

지난해 7월 출범해 올해로 출범 1주년을 맞은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 강원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돼 운영되고 있습니다.

도내 소방서에도 화재 조사관들은 있지만, 이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전문성입니다. 화재 규모가 크거나 특이점이 있는 경우 출동해 불이 난 원인을 추적하는, 화재 현장의 '탐정들'입니다.

지난해 7월 16일, 제주시 연동의 한 대형 호텔 객실 CCTV 화면.                                                                                    복도로 연기가 새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지난해 7월 16일, 제주시 연동의 한 대형 호텔 객실 CCTV 화면. 복도로 연기가 새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현장에 남겨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 화재 원인을 밝혀내는 이들. 이들의 활약 덕분에 방화범이 잡히거나, 제품의 결함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지난해 7월 16일 새벽 2시 25분쯤, 제주시 연동의 한 대형 호텔 객실에서 불이 났습니다. 당시 같은 층에 머물던 투숙객 등 40여 명이 급히 대피하는 등 소동이 빚어졌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객실 소파와 욕실에서 불이 붙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소파 위엔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욕실에 걸린 수건은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조사단은 이 화재 원인을 '방화'로 추정했습니다.

객실 소파에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객실 소파에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전기나 기계로 인한 화재 요인들이 발견되지 않았고, 종이처럼 불이 잘 붙는 물질로 소파를 태운 흔적들이 식별된 겁니다. 또 CCTV 확인 결과, 피의자가 객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짙은 연기가 새 나온 흔적도 확인됐습니다.

조사단은 방화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그 즉시 경찰에 알렸고,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 모 씨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 제품 화재의 원인 규명해 소비자 보상 돕기도

제품의 기계적 이유로 불이 난 사실을 확인해, 소비자 보상을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정집 냉장고 안에서 난 불. 제품의 기계적 문제로 확인됐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가정집 냉장고 안에서 난 불. 제품의 기계적 문제로 확인됐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지난 3월 7일 정오쯤, 제주시 노형동의 한 아파트에 있던 냉장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당시 집 안에 있던 주민은 냉장고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냉장고 문을 연 뒤 안에서 연기와 불꽃을 보고는 119에 신고했습니다.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주민과 대화하던 중 불이 나기 일주일쯤 전부터, 냉장실에 있던 음식들이 조금씩 얼고, 성에가 꼈다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불이 난 냉장고 안에 성에가 껴있는 모습.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불이 난 냉장고 안에 성에가 껴있는 모습.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실제 냉장고 안을 들여다 보니, 냉장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제상히터'에서 불이 시작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이 제상히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온도 조절에 문제가 생겼고, 여기서 난 불이 주변으로 옮겨 붙으며 불꽃이 튀었던 겁니다.

제조물 책임법에 따라 제품 결함으로 손해가 발생했을 땐 제조사가 이를 배상해야 합니다.

제품의 기계적 문제로 불이 난 사실이 확인되면, 주민은 제조사로부터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 덕에 소비자 보상이 이뤄진 경우는 지난 한 해 7건으로 집계됐습니다. 그 전에는 단 1건도 없었지만, 조사단 출범 이후 7건으로 증가한 겁니다.

호텔 화재처럼 방화로 확인한 경우도 17건으로, 전년 13건 대비 소폭 늘었습니다.

전문적으로 화재 원인을 조사하는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 전문성 높일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다만 내부적으로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나옵니다.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에 소속된 조사관들은 10명. 이들은 모두 도내 소방서 소속으로 광역화재 조사단으로 파견돼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든지 소방서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화재 조사의 '전문성'을 높여가는 게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아쉬운 목소리가 내부적으로 나오는 이유입니다.

비슷한 화재가 반복돼 누군가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화재 원인 조사에 몰두하는 광역화재 조사단들. 이들은 내부적인 과제를 안고 오늘도 폭염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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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폭염 속 사투…화재 현장의 ‘탐정들’
    • 입력 2021-08-01 09:17:26
    • 수정2021-08-01 09:17:33
    취재후·사건후

28일 새벽 6시 20분쯤,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습니다.

"기자님, 조금 전 한림읍 창고에서 큰불이 나 급하게 출동하려 합니다. 오실 수 있을까요?"

화재 현장에서 불이 난 원인을 조사하는,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광역화재 조사단(이하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의 전화였습니다.

이날은 출범 1주년을 맞은 조사단의 근무 현장을 동행 취재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원래는 제주시 우도의 연립주택에서 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함께 우도로 가기로 계획했던 상황. 하지만 이날 새벽 더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조사단이 급히 제주시 한림읍으로 출동해야 했던 겁니다.

취재진은 조사단을 따라 불이 난 한림읍 창고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막 큰 불씨가 잡힌 화재 현장에는 여전히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연기에, 30도를 웃도는 푹푹 찌는 더위까지 겹쳐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소방관들은 막 진압을 마치고 물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방역복처럼 생긴 조사 복장을 덧대 입고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채비를 마친 뒤, 망설임 없이 뿌연 연기가 새 나오던 화재 현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천장을 떠받치던 골조가 휘면서, 곧 내려앉을 것만 같았던 창고 안. 그 안에서 조사관들은 현장 곳곳을 살폈습니다.

끊어진 전선 하나도 유심히 살펴보고, 새까맣게 타버린 기계에 연결된 전선을 발견해 사진찍기를 반복했습니다.

10분이 훌쩍 지나 창고 밖으로 하나둘 나오던 조사관들. 이들은 조사를 마친 뒤에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유독가스가 새 나오는 상황에서, 불이 완전히 꺼지고 조사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김승숙 제주 광역화재조사단 조정관은 "잔불을 끄려면 포크레인으로 창고를 허물어야 하는데, 그때 화재 원인을 밝혀줄 증거들이 훼손될 수도 있다"며 "유독가스 탓에 피부 곳곳이 간지럽고 하지만, 불이 난 원인을 빨리 밝히려면 지금 들어가는 게 낫다"고 답했습니다.

불을 끄는 것과 불이 난 원인을 조사하는 것. 어느 것 하나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둘 사이에서, 조사관들은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 화재 원인 밝혀내는 광역화재 조사단

지난해 7월 출범해 올해로 출범 1주년을 맞은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 강원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돼 운영되고 있습니다.

도내 소방서에도 화재 조사관들은 있지만, 이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전문성입니다. 화재 규모가 크거나 특이점이 있는 경우 출동해 불이 난 원인을 추적하는, 화재 현장의 '탐정들'입니다.

지난해 7월 16일, 제주시 연동의 한 대형 호텔 객실 CCTV 화면.                                                                                    복도로 연기가 새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현장에 남겨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 화재 원인을 밝혀내는 이들. 이들의 활약 덕분에 방화범이 잡히거나, 제품의 결함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지난해 7월 16일 새벽 2시 25분쯤, 제주시 연동의 한 대형 호텔 객실에서 불이 났습니다. 당시 같은 층에 머물던 투숙객 등 40여 명이 급히 대피하는 등 소동이 빚어졌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객실 소파와 욕실에서 불이 붙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소파 위엔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욕실에 걸린 수건은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조사단은 이 화재 원인을 '방화'로 추정했습니다.

객실 소파에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전기나 기계로 인한 화재 요인들이 발견되지 않았고, 종이처럼 불이 잘 붙는 물질로 소파를 태운 흔적들이 식별된 겁니다. 또 CCTV 확인 결과, 피의자가 객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짙은 연기가 새 나온 흔적도 확인됐습니다.

조사단은 방화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그 즉시 경찰에 알렸고,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 모 씨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 제품 화재의 원인 규명해 소비자 보상 돕기도

제품의 기계적 이유로 불이 난 사실을 확인해, 소비자 보상을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정집 냉장고 안에서 난 불. 제품의 기계적 문제로 확인됐다.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지난 3월 7일 정오쯤, 제주시 노형동의 한 아파트에 있던 냉장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당시 집 안에 있던 주민은 냉장고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냉장고 문을 연 뒤 안에서 연기와 불꽃을 보고는 119에 신고했습니다.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은 주민과 대화하던 중 불이 나기 일주일쯤 전부터, 냉장실에 있던 음식들이 조금씩 얼고, 성에가 꼈다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불이 난 냉장고 안에 성에가 껴있는 모습. (화면 출처: 제주도 소방안전본부)
실제 냉장고 안을 들여다 보니, 냉장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제상히터'에서 불이 시작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이 제상히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온도 조절에 문제가 생겼고, 여기서 난 불이 주변으로 옮겨 붙으며 불꽃이 튀었던 겁니다.

제조물 책임법에 따라 제품 결함으로 손해가 발생했을 땐 제조사가 이를 배상해야 합니다.

제품의 기계적 문제로 불이 난 사실이 확인되면, 주민은 제조사로부터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 덕에 소비자 보상이 이뤄진 경우는 지난 한 해 7건으로 집계됐습니다. 그 전에는 단 1건도 없었지만, 조사단 출범 이후 7건으로 증가한 겁니다.

호텔 화재처럼 방화로 확인한 경우도 17건으로, 전년 13건 대비 소폭 늘었습니다.

전문적으로 화재 원인을 조사하는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 전문성 높일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다만 내부적으로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나옵니다.

제주 광역화재 조사단에 소속된 조사관들은 10명. 이들은 모두 도내 소방서 소속으로 광역화재 조사단으로 파견돼 일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든지 소방서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화재 조사의 '전문성'을 높여가는 게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아쉬운 목소리가 내부적으로 나오는 이유입니다.

비슷한 화재가 반복돼 누군가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화재 원인 조사에 몰두하는 광역화재 조사단들. 이들은 내부적인 과제를 안고 오늘도 폭염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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