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베를린을 감옥으로 만든 그 것…‘베를린 장벽’ 건설 60주년

입력 2021.08.1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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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건설 60주년을 맞아 슈타인마이어(앞줄 오른쪽 끝) 독일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벽 공원(Mauer Park)’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베를린 장벽이 건설 60주년을 맞아 슈타인마이어(앞줄 오른쪽 끝) 독일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벽 공원(Mauer Park)’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이 8월 13일로 세워진 지 딱 60년이 됐습니다.

이날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장벽 건설 6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을 "절망적인 실패에 대한 증언"이라고 표현하며,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다가 숨진 영혼들을 추모했습니다.

독일인, 특히 베를린 주민들에게 장벽이 세워진 날은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아래 말과 같이 기억됩니다.
"1961년 8월 13일은 독일인과 세상에게 운명적인 날이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파괴한 날로, 부모와 조부모들로부터 자녀들을 억지로 분리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던 했던 날입니다. 오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1961년 8월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처음에는 콘크리트 벽돌로 세워졌다.1961년 8월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처음에는 콘크리트 벽돌로 세워졌다.

■"서독 탈출을 막아라"…군사작전 방불케 한 장벽 건설
동독이 장벽을 건설한 이유는 정치적인 것도 있었지만,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949년부터 장벽이 세워진 1961년까지 250만 명 이상이 동독을 탈출했는데, 특히 젊은이들과 기술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민 이탈이 계속되면 동독엔 노약자나 미숙련공만 남게 될 것이고, 동독 전체의 심각한 인구 감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독과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동독으로선 탈출을 막을 묘안이 필요했습니다.

동독 영토 안에 있던 베를린은 서독 탈출의 통로였습니다. 장벽이 생길 때까지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동이 자유로웠습니다. 동베를린에 살며 서베를린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 동베를린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서베를린에서 비행기나 기차를 이용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동베를린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동독 지역 주민들도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향한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장벽'이었던 겁니다. 동독 초대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전국의 군부대와 청년동맹 등이 비상동원돼 며칠 만에 장벽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동독 내에서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 건설의 기적'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장벽 건설은 에리히 호네커라는 젊은 공산당 간부가 지휘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하다가 1989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쫓겨난 동독의 사실상 마지막 서기장, 그 사람 맞습니다.


■처음엔 콘크리트 벽돌…끊임없는 탈출 시도에 계속 개량
베를린 장벽은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듯 처음엔 콘크리트 벽돌로 쌓았습니다. 그렇게 동서 베를린 경계 43km뿐만 아니라 서베를린 전체 155km를 둘러 장벽을 세웠습니다. 동독 브란덴부르크 안에 있던 서독은 말 그대로 '육지의 섬', '거대한 감옥'이 됐습니다.

동독 당국은 수차례에 걸쳐 장벽을 개보수했고 1980년 마지막으로 담장을 개량했습니다. 위의 그림이 붕괴 전까지의 장벽 도면입니다. 첫 벽의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넘기 어렵게 설계됐습니다. 담을 넘어도 곳곳의 감시 초소와 순찰대의 눈을 피해야 하고, 경비대가 없는 곳엔 지뢰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지 못했습니다. 콘크리트 벽돌에 철조망을 친 초기 장벽을 동독인들은 맨손으로 넘었고, 급기야 훔친 군용 차량 등 중장비를 이용해 담장을 무너뜨리고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기구를 이용하기도 했고, 서베를린까지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5,000여 명. 장벽을 넘다 사망한 사람은 140명이라고 하는데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는 훨씬 많을 거라고 합니다. 마지막 사망자는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9개월 전 동독 경비병의 총에 사살된 21살 청년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에 오른 베를린 시민들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에 오른 베를린 시민들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실수
1988년 3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신 베오그라드 선언'을 합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천명된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겁니다. 이후 동구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며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편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물결을 동독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건 한 명의 말실수, 그리고 전 세계에 타전된 오보 때문이었습니다.

동독 전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자 동독 당국은 여행 자유화라는 회유책을 내놓게 됩니다. 여행 자유화라곤 해도 여권 발급 기간 단축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시행일은 1989년 11월 10일, 그 전날인 9일 오후 7시쯤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동베를린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귄터 샤보프스키가 발표에 나섰습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 국경을 개방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발표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샤보프스키는 역사적 실수를 합니다.

"지금 당장입니다."

지금 당장 국경을 개방한다는 '오보'가 전 세계에 타전됐고, 긴가민가하던 독일 언론들은 미국을 통해 다시 들어온 '오보'를 한 시간 뒤 8시 종합뉴스 톱으로 방송했습니다. 그날 밤 장벽이 무너졌고, 독일은 이듬해 통일을 이뤘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상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독일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상징물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오보를 듣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장벽이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조금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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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베를린을 감옥으로 만든 그 것…‘베를린 장벽’ 건설 60주년
    • 입력 2021-08-14 09:59:48
    특파원 리포트
베를린 장벽이 건설 60주년을 맞아 슈타인마이어(앞줄 오른쪽 끝) 독일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벽 공원(Mauer Park)’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이 8월 13일로 세워진 지 딱 60년이 됐습니다.

이날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장벽 건설 6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을 "절망적인 실패에 대한 증언"이라고 표현하며,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다가 숨진 영혼들을 추모했습니다.

독일인, 특히 베를린 주민들에게 장벽이 세워진 날은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아래 말과 같이 기억됩니다.
"1961년 8월 13일은 독일인과 세상에게 운명적인 날이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파괴한 날로, 부모와 조부모들로부터 자녀들을 억지로 분리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던 했던 날입니다. 오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1961년 8월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처음에는 콘크리트 벽돌로 세워졌다.
■"서독 탈출을 막아라"…군사작전 방불케 한 장벽 건설
동독이 장벽을 건설한 이유는 정치적인 것도 있었지만,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949년부터 장벽이 세워진 1961년까지 250만 명 이상이 동독을 탈출했는데, 특히 젊은이들과 기술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민 이탈이 계속되면 동독엔 노약자나 미숙련공만 남게 될 것이고, 동독 전체의 심각한 인구 감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독과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동독으로선 탈출을 막을 묘안이 필요했습니다.

동독 영토 안에 있던 베를린은 서독 탈출의 통로였습니다. 장벽이 생길 때까지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동이 자유로웠습니다. 동베를린에 살며 서베를린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 동베를린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서베를린에서 비행기나 기차를 이용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동베를린 주민뿐만 아니라 다른 동독 지역 주민들도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향한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장벽'이었던 겁니다. 동독 초대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전국의 군부대와 청년동맹 등이 비상동원돼 며칠 만에 장벽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동독 내에서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 건설의 기적'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장벽 건설은 에리히 호네커라는 젊은 공산당 간부가 지휘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하다가 1989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쫓겨난 동독의 사실상 마지막 서기장, 그 사람 맞습니다.


■처음엔 콘크리트 벽돌…끊임없는 탈출 시도에 계속 개량
베를린 장벽은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듯 처음엔 콘크리트 벽돌로 쌓았습니다. 그렇게 동서 베를린 경계 43km뿐만 아니라 서베를린 전체 155km를 둘러 장벽을 세웠습니다. 동독 브란덴부르크 안에 있던 서독은 말 그대로 '육지의 섬', '거대한 감옥'이 됐습니다.

동독 당국은 수차례에 걸쳐 장벽을 개보수했고 1980년 마지막으로 담장을 개량했습니다. 위의 그림이 붕괴 전까지의 장벽 도면입니다. 첫 벽의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넘기 어렵게 설계됐습니다. 담을 넘어도 곳곳의 감시 초소와 순찰대의 눈을 피해야 하고, 경비대가 없는 곳엔 지뢰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지 못했습니다. 콘크리트 벽돌에 철조망을 친 초기 장벽을 동독인들은 맨손으로 넘었고, 급기야 훔친 군용 차량 등 중장비를 이용해 담장을 무너뜨리고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기구를 이용하기도 했고, 서베를린까지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5,000여 명. 장벽을 넘다 사망한 사람은 140명이라고 하는데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는 훨씬 많을 거라고 합니다. 마지막 사망자는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9개월 전 동독 경비병의 총에 사살된 21살 청년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문 앞의 장벽에 오른 베를린 시민들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실수
1988년 3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신 베오그라드 선언'을 합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천명된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겁니다. 이후 동구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며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편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물결을 동독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건 한 명의 말실수, 그리고 전 세계에 타전된 오보 때문이었습니다.

동독 전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자 동독 당국은 여행 자유화라는 회유책을 내놓게 됩니다. 여행 자유화라곤 해도 여권 발급 기간 단축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시행일은 1989년 11월 10일, 그 전날인 9일 오후 7시쯤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동베를린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귄터 샤보프스키가 발표에 나섰습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 국경을 개방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발표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샤보프스키는 역사적 실수를 합니다.

"지금 당장입니다."

지금 당장 국경을 개방한다는 '오보'가 전 세계에 타전됐고, 긴가민가하던 독일 언론들은 미국을 통해 다시 들어온 '오보'를 한 시간 뒤 8시 종합뉴스 톱으로 방송했습니다. 그날 밤 장벽이 무너졌고, 독일은 이듬해 통일을 이뤘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상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독일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상징물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는 오보를 듣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장벽이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조금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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