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김학순 도쿄 증언…“내가 살아있는데, 없다고 하지 마라”

입력 2021.08.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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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17살이지, (일본군이) 끌고 가서 강제로. 안 당하려고 쫓아 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30년 전인 1991년 8월 14일, 서울 정동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

당시 67살이었던 김학순(1924년생)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50년 동안 남들에게 꺼내놓지 못했던 얘기를, 꾹꾹 눌러놨던 기억을 토해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공개 증언이었습니다.

김학순의 증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석 달 뒤, 일본 도쿄로 향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인들 앞에서 일본군의 만행과 위안부의 존재를 고발했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 '내가 위안부다'...존재로 반박한 김학순의 도쿄 증언

1991년 12월 9일, 일본 도쿄 '재일본 한국 YMCA' 건물.

일본 시민단체가 주최한 '김학순 씨의 증언을 듣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120명이 정원인 공간에 400명 넘는 일본인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할머니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김혜원 선생(정대협 창립멤버)은 12월인데도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더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던 것, 17살 되던 해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게 된 일을 담담히 풀어놨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바른대로 말을 다 들려 드리고 싶어서. 이 말을 한다니까 가슴이 막히네요.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옷을 확 찢어 버리데요. 그래가지고는 그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여자로서 생전 처음 당한, 그런 고통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은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하니까."

김학순 할머니는 50년 전 그때가 떠오를 땐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울음을 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위안부 피해자도 만나봤느냐'는 일본인 청중의 질문에도 할머니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많습니다. 현재 부산에도 있고요. 이번에도 같이 오려다가 그 사람이 나와 같이 재판소에다 제출을 안 해놓으니까 요번에 못 왔어요. 비행기 표도 안 되고 그래서 여기 못 오고…. 그 사람은 열 살에 끌려가 가지고 장교네 집에서 열다섯 살 나는 동안 5~6년간을 갖은 시중을 다 들었어요. 열여섯 살 나던 해에 자기네는 가족들 데리고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가 버리고, 대만 쪽이랬는데 가버리고, 자기만 군대에다가 밀어 넣어가지고 그때서부터 군인한테 그런 거시기를 당했다 그래요."

■ "내가 희생자다...내가 살아있는데 없다고 하지 말아라"

김학순 할머니에게 '도쿄 증언'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행 비행기에 타서 본 일장기에 숨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숙소의 다다미방만 봐도 할머니는 '그때 그 날'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주변인들에게 털어놨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천식을 앓았고 심장도 좋지 않았습니다. 오래 걷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증언 내내 연단에서 할머니를 지켜봤던 김혜원 선생은 조마조마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립니다.

취재팀과 만난 김혜원 선생은 "천식이 심해 조금만 말을 해도 숨이 가빴다"라며 "조명이 강렬해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씀을 하시더라. 옆에서 손수건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끌고, 도쿄에서 증언한 이유는 뭘까. 그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당했는데, 나는 희생자의 한 사람이에요. 그걸 부끄럽다고 생각해선 안 되죠. 예, 할 말은 당연히 해야죠. 왜 부끄러워. 난 부끄럽게 생각 안 해요."

"와가지고 보니까, (일본)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일본 정부에서 없다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있는데…."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희생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로서 자신을 드러내 그 '존재'를 증명하기로 한 겁니다.

일부러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도 입었다고 했습니다.

김혜원 선생은 "우리가 보통 슬픈 일을 겪으면 흰옷을 입는데 할머니들이 큰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 아픔을 상징하는 옷을 입은 것"이라며 "조선의 딸로, 조선의 여자로 당한 일이기 때문에 할머니와 상의해서 한복을 입고 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30년 전 김학순의 부탁...'사죄'와 '교육' 그리고 '평화'

할머니는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역사가 가르쳐줘야 알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 청년이나 일본 청년들이 그거를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알려줘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일본 정부에서도 잘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했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한국에서, 또 일본 도쿄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메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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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김학순 도쿄 증언…“내가 살아있는데, 없다고 하지 마라”
    • 입력 2021-08-15 07:01:52
    취재K

"말이 17살이지, (일본군이) 끌고 가서 강제로. 안 당하려고 쫓아 나오면 붙잡고 안 놔줘요.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30년 전인 1991년 8월 14일, 서울 정동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

당시 67살이었던 김학순(1924년생)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50년 동안 남들에게 꺼내놓지 못했던 얘기를, 꾹꾹 눌러놨던 기억을 토해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공개 증언이었습니다.

김학순의 증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석 달 뒤, 일본 도쿄로 향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인들 앞에서 일본군의 만행과 위안부의 존재를 고발했습니다. 당시 영상을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기증받아 KBS에 제공했습니다.

■ '내가 위안부다'...존재로 반박한 김학순의 도쿄 증언

1991년 12월 9일, 일본 도쿄 '재일본 한국 YMCA' 건물.

일본 시민단체가 주최한 '김학순 씨의 증언을 듣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120명이 정원인 공간에 400명 넘는 일본인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할머니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김혜원 선생(정대협 창립멤버)은 12월인데도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더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던 것, 17살 되던 해 중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게 된 일을 담담히 풀어놨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바른대로 말을 다 들려 드리고 싶어서. 이 말을 한다니까 가슴이 막히네요.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옷을 확 찢어 버리데요. 그래가지고는 그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여자로서 생전 처음 당한, 그런 고통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아요. 그때는, 들어오면, 들어오면은 열 명 붙었다 스무 명 붙었다. 그대로 그대로 응해줘야 하니까."

김학순 할머니는 50년 전 그때가 떠오를 땐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울음을 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위안부 피해자도 만나봤느냐'는 일본인 청중의 질문에도 할머니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많습니다. 현재 부산에도 있고요. 이번에도 같이 오려다가 그 사람이 나와 같이 재판소에다 제출을 안 해놓으니까 요번에 못 왔어요. 비행기 표도 안 되고 그래서 여기 못 오고…. 그 사람은 열 살에 끌려가 가지고 장교네 집에서 열다섯 살 나는 동안 5~6년간을 갖은 시중을 다 들었어요. 열여섯 살 나던 해에 자기네는 가족들 데리고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가 버리고, 대만 쪽이랬는데 가버리고, 자기만 군대에다가 밀어 넣어가지고 그때서부터 군인한테 그런 거시기를 당했다 그래요."

■ "내가 희생자다...내가 살아있는데 없다고 하지 말아라"

김학순 할머니에게 '도쿄 증언'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행 비행기에 타서 본 일장기에 숨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숙소의 다다미방만 봐도 할머니는 '그때 그 날'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주변인들에게 털어놨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천식을 앓았고 심장도 좋지 않았습니다. 오래 걷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증언 내내 연단에서 할머니를 지켜봤던 김혜원 선생은 조마조마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립니다.

취재팀과 만난 김혜원 선생은 "천식이 심해 조금만 말을 해도 숨이 가빴다"라며 "조명이 강렬해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씀을 하시더라. 옆에서 손수건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끌고, 도쿄에서 증언한 이유는 뭘까. 그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당했는데, 나는 희생자의 한 사람이에요. 그걸 부끄럽다고 생각해선 안 되죠. 예, 할 말은 당연히 해야죠. 왜 부끄러워. 난 부끄럽게 생각 안 해요."

"와가지고 보니까, (일본)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젊은 사람들한테 지나간 과거를 말을 안 해주니까. 일본 정부에서 없다만 하지 말고. 엄연히 (내가) 살아있는데…."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희생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로서 자신을 드러내 그 '존재'를 증명하기로 한 겁니다.

일부러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도 입었다고 했습니다.

김혜원 선생은 "우리가 보통 슬픈 일을 겪으면 흰옷을 입는데 할머니들이 큰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 아픔을 상징하는 옷을 입은 것"이라며 "조선의 딸로, 조선의 여자로 당한 일이기 때문에 할머니와 상의해서 한복을 입고 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30년 전 김학순의 부탁...'사죄'와 '교육' 그리고 '평화'

할머니는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가슴에 품은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그러니까 일본 정부에다 하는 말은 다른 말은 없어요. 앞으로는 전쟁도 하지 말고. 역사가 가르쳐줘야 알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 청년이나 일본 청년들이 그거를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알려줘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일본 정부에서도 잘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잘못했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고…."

한국에서, 또 일본 도쿄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의 메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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