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이냐 항일이냐, ‘미담’이 소환한 조상의 행적

입력 2021.08.19 (07:00) 수정 2021.08.1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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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가 18일 "조상의 과거사로 국민 분열을 시키는 구태정치를 끝내야 한다."라며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 최근 조부와 증조부를 친일파로 프레임 씌워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 가족사를 넘어 우리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간 친일파 문제여서 직접 해명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선 주자의 조부, 증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간 논란은 캠프 측이 최 후보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홍보한데서 출발했습니다. 일부 언론과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가 검증에 나서 독립운동보다 오히려 일제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KBS는 조선총독부 관보와 당시 신문기사 등 관련 사료를 직접 확인하고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해 사실관계를 따져봤습니다.

■ 증조부의 18년 간 면장 이력…친일 논란①

민족문제연구소는 먼저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가 일제 강점기 시대 18년 간 면장을 한 이력을 들어 독립운동가 집안이 아닌,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재형 캠프 측은 "면장은 한 것은 맞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면장을 오래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혐의 덮어씌우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반박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던 직원록을 확인해 보면, 1919년 당시 증조부 최승현의 이름이 평강군 유진면의 면장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 후 1936년, 한국에 일본어로 발행되는 조선신문에는 증조부 최 씨가 나이가 들어 면장직을 그만 둔다고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면장의 이력, 친일의 근거일까요?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기본적으로 면사무소는 조선총독부 식민 통치의 말단 조직으로 지배 정책을 면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 면장을 지냈다는 게 친일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독립운동가로서 떳떳하게 투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부연했습니다.

■ 일제가 수여한 '국세조사기념장' …친일 논란②

민족문제연구소는 증조부 최 씨가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은 것을 두고도 일제에 협력한 것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기념장을 받은 건 맞다면서도 "당시 인구조사를 끝낸 뒤에 수많은 면장에게 준 기념장이다. 그러면 이 기념장을 받은 면장과 유지들은 다 친일파인가"라고 반박했습니다.


1933년 7월 자 조선총독부 관보를 살펴보니, 평강군 유진면장인 증조부 최 씨가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학자들은 국세조사기념장은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대구·경북 근현대연구소의 강철민 소장은 "기념장은 일부 지역에서 면장 등 말단 관리로 일했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며 "국세조사기념장보다 윗격인 작위 수여 부문부터는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조부의 '일제 국방 헌금'…친일 논란③

민족문제연구소는 조부 최병규와 큰할아버지 최병열이 일제에 국방 헌금을 낸 사실이 친일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미담 기사로 실린 것 또한 친일의 근거 중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일제 강점기 국방 헌금을 낸 것이 맞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시 일제는 협조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을 했을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매일신보를 찾아보니 1938년, 조부 최 씨가 형과 함께 증조부의 회갑연 비용을 아껴 일제에 20원의 국방 헌금을 냈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최 전 원장은 언론에 기사 한 줄 실렸다고 친일파라는 게 가당하냐고 했는데요.

학자들은 당시 일제가 일반 국민들에게 국방 헌금을 강요한 건 맞지만, 조부 최병규 등 일가 또한 증조부가 면장을 했던 곳의 면협의원(당시 지자체 의원)을 맡았던 지역 유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조부 최병규는 증조부 최 씨가 면장을 그만두기 1년 전인 1935년, 유진면의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매일신보에 기록돼 있었습니다.


2년 뒤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입후보한 이력도 매일신보에서 확인됐습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고태우 교수는 "엄밀히 말하면 그런 직책을 맡아 헌금을 냈다고 친일이냐를 확정 짓는 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역사의 경로 속에서 최 후보의 집안은 지역에서 상당히 유력하고 힘 있는 편으로 보인다. 국방 헌금까지 미화 기사가 난다면 통상의 독립운동보다는 협력 행위에 가깝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 조부 최병규의 만선일보 축전…친일 논란④

민족문제연구소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로 넘어가 조리원(부촌장)에 선출되고, 만주 최대 친일 신문인 만선일보에 축전을 보낸 것 또한 친일 행적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최 후보의 조부는 당시 교육수준이 꽤 높았기 때문에 만주 지역에서 부촌장도 맡았고, 당연히 신문에 이름이 등장했다"며 " 구체적 친일 내용도 없고 단지 만선일보에 나왔다는 근거만으로 친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실제 1940년 만선일보에는 만주국 해림촌으로 넘어가 조리원(부촌장)을 맡게 된 조부 최 씨가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 광고를 낸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리원에 취임한 뒤, 인사차 만선일보를 방문했다는 것도 소개돼 있습니다.

이 행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 기본적으로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서훈을 내릴 때 면장 등 말단 직책을 맡아 한 공로로 기관지에 이름이 실리는 것은 기본적인 흠결 사유"라고 밝혔습니다.

■ 조부 최병규의 고교 시절 동맹휴학…독립운동 논란⑤

한편, 최재형 캠프 측은 조부 최 씨가 10대 시절인 춘천고보 3년학 시절 동맹휴학 후 퇴학을 당했다는 것을 들어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동맹휴학 사건은 여태까지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며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1926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체육 교사 모리가 한국 학생들을 괴롭혀 그를 배척하기 위해 7가지 가혹 행위를 열거하고 전교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학자들은 조부의 독립 운동 여부를 판단하려면, 당시의 동맹휴학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저항인지 혹은 단순히 구타를 일삼은 교사에 대한 저항인지 당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합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고태우 교수는 "일제가 부당한 조처를 했는데 그것에 항의 표시로 들고 일어났으면 항일적 요소로 볼 수 있고, 단순히 일본인 선생님 자체가 특정 차별과 언행을 해서 일어난 휴학이라면 사회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최재형 캠프의 '미담 전략'이 발목

최 전 원장 측은 이 같은 선친들의 행적을 대선 출마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도, 최 전 원장이 직접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언급을 한 적은 없다고 전했습니다.

캠프의 '미담' 전략 가운데 가족사가 주요하게 등장해 왔습니다. 결국, 조상의 과거 행적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독립운동으로 부각시켰다가 조부, 증조부까지 검증대에 오르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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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이냐 항일이냐, ‘미담’이 소환한 조상의 행적
    • 입력 2021-08-19 07:00:09
    • 수정2021-08-19 09: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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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가 18일 "조상의 과거사로 국민 분열을 시키는 구태정치를 끝내야 한다."라며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 최근 조부와 증조부를 친일파로 프레임 씌워 비난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 가족사를 넘어 우리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간 친일파 문제여서 직접 해명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선 주자의 조부, 증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간 논란은 캠프 측이 최 후보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홍보한데서 출발했습니다. 일부 언론과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가 검증에 나서 독립운동보다 오히려 일제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KBS는 조선총독부 관보와 당시 신문기사 등 관련 사료를 직접 확인하고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해 사실관계를 따져봤습니다.

■ 증조부의 18년 간 면장 이력…친일 논란①

민족문제연구소는 먼저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가 일제 강점기 시대 18년 간 면장을 한 이력을 들어 독립운동가 집안이 아닌,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재형 캠프 측은 "면장은 한 것은 맞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면장을 오래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혐의 덮어씌우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반박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던 직원록을 확인해 보면, 1919년 당시 증조부 최승현의 이름이 평강군 유진면의 면장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 후 1936년, 한국에 일본어로 발행되는 조선신문에는 증조부 최 씨가 나이가 들어 면장직을 그만 둔다고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면장의 이력, 친일의 근거일까요?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기본적으로 면사무소는 조선총독부 식민 통치의 말단 조직으로 지배 정책을 면민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 면장을 지냈다는 게 친일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독립운동가로서 떳떳하게 투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부연했습니다.

■ 일제가 수여한 '국세조사기념장' …친일 논란②

민족문제연구소는 증조부 최 씨가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은 것을 두고도 일제에 협력한 것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기념장을 받은 건 맞다면서도 "당시 인구조사를 끝낸 뒤에 수많은 면장에게 준 기념장이다. 그러면 이 기념장을 받은 면장과 유지들은 다 친일파인가"라고 반박했습니다.


1933년 7월 자 조선총독부 관보를 살펴보니, 평강군 유진면장인 증조부 최 씨가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학자들은 국세조사기념장은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대구·경북 근현대연구소의 강철민 소장은 "기념장은 일부 지역에서 면장 등 말단 관리로 일했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며 "국세조사기념장보다 윗격인 작위 수여 부문부터는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조부의 '일제 국방 헌금'…친일 논란③

민족문제연구소는 조부 최병규와 큰할아버지 최병열이 일제에 국방 헌금을 낸 사실이 친일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미담 기사로 실린 것 또한 친일의 근거 중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일제 강점기 국방 헌금을 낸 것이 맞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시 일제는 협조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을 했을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매일신보를 찾아보니 1938년, 조부 최 씨가 형과 함께 증조부의 회갑연 비용을 아껴 일제에 20원의 국방 헌금을 냈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최 전 원장은 언론에 기사 한 줄 실렸다고 친일파라는 게 가당하냐고 했는데요.

학자들은 당시 일제가 일반 국민들에게 국방 헌금을 강요한 건 맞지만, 조부 최병규 등 일가 또한 증조부가 면장을 했던 곳의 면협의원(당시 지자체 의원)을 맡았던 지역 유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조부 최병규는 증조부 최 씨가 면장을 그만두기 1년 전인 1935년, 유진면의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린 사실이 매일신보에 기록돼 있었습니다.


2년 뒤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입후보한 이력도 매일신보에서 확인됐습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고태우 교수는 "엄밀히 말하면 그런 직책을 맡아 헌금을 냈다고 친일이냐를 확정 짓는 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역사의 경로 속에서 최 후보의 집안은 지역에서 상당히 유력하고 힘 있는 편으로 보인다. 국방 헌금까지 미화 기사가 난다면 통상의 독립운동보다는 협력 행위에 가깝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 조부 최병규의 만선일보 축전…친일 논란④

민족문제연구소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로 넘어가 조리원(부촌장)에 선출되고, 만주 최대 친일 신문인 만선일보에 축전을 보낸 것 또한 친일 행적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최재형 캠프는 "최 후보의 조부는 당시 교육수준이 꽤 높았기 때문에 만주 지역에서 부촌장도 맡았고, 당연히 신문에 이름이 등장했다"며 " 구체적 친일 내용도 없고 단지 만선일보에 나왔다는 근거만으로 친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실제 1940년 만선일보에는 만주국 해림촌으로 넘어가 조리원(부촌장)을 맡게 된 조부 최 씨가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 광고를 낸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리원에 취임한 뒤, 인사차 만선일보를 방문했다는 것도 소개돼 있습니다.

이 행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 기본적으로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서훈을 내릴 때 면장 등 말단 직책을 맡아 한 공로로 기관지에 이름이 실리는 것은 기본적인 흠결 사유"라고 밝혔습니다.

■ 조부 최병규의 고교 시절 동맹휴학…독립운동 논란⑤

한편, 최재형 캠프 측은 조부 최 씨가 10대 시절인 춘천고보 3년학 시절 동맹휴학 후 퇴학을 당했다는 것을 들어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동맹휴학 사건은 여태까지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며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1926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체육 교사 모리가 한국 학생들을 괴롭혀 그를 배척하기 위해 7가지 가혹 행위를 열거하고 전교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학자들은 조부의 독립 운동 여부를 판단하려면, 당시의 동맹휴학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저항인지 혹은 단순히 구타를 일삼은 교사에 대한 저항인지 당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합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고태우 교수는 "일제가 부당한 조처를 했는데 그것에 항의 표시로 들고 일어났으면 항일적 요소로 볼 수 있고, 단순히 일본인 선생님 자체가 특정 차별과 언행을 해서 일어난 휴학이라면 사회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최재형 캠프의 '미담 전략'이 발목

최 전 원장 측은 이 같은 선친들의 행적을 대선 출마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도, 최 전 원장이 직접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언급을 한 적은 없다고 전했습니다.

캠프의 '미담' 전략 가운데 가족사가 주요하게 등장해 왔습니다. 결국, 조상의 과거 행적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독립운동으로 부각시켰다가 조부, 증조부까지 검증대에 오르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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