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위험성 말해주지 않았다”…포르말린 노출된 이주노동자

입력 2021.08.2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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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칸 모바실'은 11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을 고국에 둔채 홀로 한국에 왔습니다. 열심히 일해 가족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칸은 지난 10년간 전남 담양과 제주도 등의 양식장에서 일했습니다. 광어와 뱀장어, 미역과 다시마, 굴까지 각종 수산물을 관리하고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올들어 지난 1월 '만성 골수 백혈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칸은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투병생활을 시작한 칸은 산업재해 신청을 했습니다.

칸은 자신의 백혈병이 양식장에서 다룬 '수산용 포르말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수산용 포르말린' 뭐길래?…"아무도 위험하다고 말해주지 않아"


포르말린은 발암물질인 '폼알데하이드'의 수용액입니다. 양식장에서는 물고기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없애는 데 쓰입니다. 또 빈 수조를 청소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정부는 식품안전 차원에서 문제가 없으면 수산용 포르말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관련법에 따르면 포르말린 같은 위험물질을 다룰 땐 사업주가 특수장갑이나 방독 마스크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이를 외국인 노동자가 사용할 경우엔, 해당 물질의 위험성을 외국어로 알려야 합니다.

칸은 양식장 2곳에서 1년 3개월 동안 수산용 포르말린을 다뤘습니다. 많게는 일주일에 네 번 이상 포르말린을 만졌습니다.

하지만 칸은 그 누구도 포르말린이 위험물질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고, 적합한 보호장구 또한 지급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칸은 주로 맨손으로 포르말린을 만지거나 면장갑 하나에 의존해 일했다고 주장합니다. 작업을 할 때면 칸의 손은 포르말린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처음엔 얼굴과 눈, 팔에 포르말린이 튀기 일쑤였습니다.

일부 양식장은 빛도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환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눈물과 콧물, 가래가 나왔습니다.

칸은 "그동안 양식장에서 일할 때 포르말린이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화학물질이란 말을 아무도 해준 적이 없다" 며 "이제야 포르말린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내 친구는 지금도 양식장에서 포르말린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럭비선수 할 정도로 건강했던 칸…1년 전 백혈병 증상 나타나


칸은 고국에서 럭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 칸에게 백혈병 증상이 나타난 건 지난해였습니다.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뼈 마디마디가 아팠습니다. 몸무게도 줄기 시작했고 쉽게 피곤해졌습니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먹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돌연 오른쪽 종아리에 백혈병 증상 중 하나인 '점상 출혈'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지름 2cm였던 것이 4cm로, 8cm를 넘어 결국 14cm까지 커졌습니다. 점상 출혈은 왼쪽 가슴과 양쪽 팔, 허벅지 등으로 번졌습니다.
이후 집 근처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뚜렷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대학병원에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한 끝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 지난달 산업재해 신청…건강보험 혜택 못 받아

전문가들은 포르말린과 백혈병의 인과관계는 입증됐다고 말합니다. 조선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이철갑 교수는 "포르말린에 들어있는 폼알데하이드가 발암물질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고 이게 백혈병을 유발한다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다만 벤젠 등 다른 물질과 달리 어느 정도에 얼마나 노출되어야 암에 걸리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어 따져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계에선 수산용 포르말린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위험성에 대한 정부 조사가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동안 정부가 수산용 포르말린이 소비자의 건강이나 해양오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조사를 해왔지, 정작 이를 직접 다루는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해선 무관심했다는 겁니다.


칸은 지난달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칸의 체류자격은 산재신청과 동시에 연장됐지만, 취업비자는 만료됐습니다. 이 때문에 칸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칸은 한달에 100만원이 넘는 치료비를 모두 자비로 부담하고 있습니다. 칸은 자신의 질병의 인과성이 인정되기를, 또 포르말린에 노출된 친구들의 건강도 안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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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도 위험성 말해주지 않았다”…포르말린 노출된 이주노동자
    • 입력 2021-08-25 15:13:22
    취재K

82년생 '칸 모바실'은 11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을 고국에 둔채 홀로 한국에 왔습니다. 열심히 일해 가족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칸은 지난 10년간 전남 담양과 제주도 등의 양식장에서 일했습니다. 광어와 뱀장어, 미역과 다시마, 굴까지 각종 수산물을 관리하고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올들어 지난 1월 '만성 골수 백혈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칸은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투병생활을 시작한 칸은 산업재해 신청을 했습니다.

칸은 자신의 백혈병이 양식장에서 다룬 '수산용 포르말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수산용 포르말린' 뭐길래?…"아무도 위험하다고 말해주지 않아"


포르말린은 발암물질인 '폼알데하이드'의 수용액입니다. 양식장에서는 물고기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없애는 데 쓰입니다. 또 빈 수조를 청소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정부는 식품안전 차원에서 문제가 없으면 수산용 포르말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관련법에 따르면 포르말린 같은 위험물질을 다룰 땐 사업주가 특수장갑이나 방독 마스크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이를 외국인 노동자가 사용할 경우엔, 해당 물질의 위험성을 외국어로 알려야 합니다.

칸은 양식장 2곳에서 1년 3개월 동안 수산용 포르말린을 다뤘습니다. 많게는 일주일에 네 번 이상 포르말린을 만졌습니다.

하지만 칸은 그 누구도 포르말린이 위험물질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고, 적합한 보호장구 또한 지급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칸은 주로 맨손으로 포르말린을 만지거나 면장갑 하나에 의존해 일했다고 주장합니다. 작업을 할 때면 칸의 손은 포르말린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처음엔 얼굴과 눈, 팔에 포르말린이 튀기 일쑤였습니다.

일부 양식장은 빛도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환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눈물과 콧물, 가래가 나왔습니다.

칸은 "그동안 양식장에서 일할 때 포르말린이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화학물질이란 말을 아무도 해준 적이 없다" 며 "이제야 포르말린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내 친구는 지금도 양식장에서 포르말린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럭비선수 할 정도로 건강했던 칸…1년 전 백혈병 증상 나타나


칸은 고국에서 럭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 칸에게 백혈병 증상이 나타난 건 지난해였습니다.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뼈 마디마디가 아팠습니다. 몸무게도 줄기 시작했고 쉽게 피곤해졌습니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먹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돌연 오른쪽 종아리에 백혈병 증상 중 하나인 '점상 출혈'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지름 2cm였던 것이 4cm로, 8cm를 넘어 결국 14cm까지 커졌습니다. 점상 출혈은 왼쪽 가슴과 양쪽 팔, 허벅지 등으로 번졌습니다.
이후 집 근처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뚜렷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대학병원에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한 끝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 지난달 산업재해 신청…건강보험 혜택 못 받아

전문가들은 포르말린과 백혈병의 인과관계는 입증됐다고 말합니다. 조선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이철갑 교수는 "포르말린에 들어있는 폼알데하이드가 발암물질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고 이게 백혈병을 유발한다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다만 벤젠 등 다른 물질과 달리 어느 정도에 얼마나 노출되어야 암에 걸리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어 따져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계에선 수산용 포르말린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위험성에 대한 정부 조사가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동안 정부가 수산용 포르말린이 소비자의 건강이나 해양오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조사를 해왔지, 정작 이를 직접 다루는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해선 무관심했다는 겁니다.


칸은 지난달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칸의 체류자격은 산재신청과 동시에 연장됐지만, 취업비자는 만료됐습니다. 이 때문에 칸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칸은 한달에 100만원이 넘는 치료비를 모두 자비로 부담하고 있습니다. 칸은 자신의 질병의 인과성이 인정되기를, 또 포르말린에 노출된 친구들의 건강도 안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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