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일본의 ‘굴욕’ 아프간 작전…기-승-전-개헌?

입력 2021.09.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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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오른 일본의 아프간 대피 작전

일본 뒤늦어…대피 실패 (9월 1일 아사히 조간)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끝났지만 일본의 신문 지면에서는 작전 실패에 대한 비판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피자는 일본인 1명
현지인 직원들은 방치


직접적으로 '굴욕'이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기사는 '굴욕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숫자를 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국가별 수송기 대피작전 (출처:아사히신문)

※ 자국민 (현지인)
미국 6천 명(7만 3500명)
영국 5천 명(1만 명)
독일 530명(4천 800명)
프랑 142명(2천 7백 명)
터키 1천 명(확인 안됨)
한국 미공개(390명)
인도네시아 26명(7명)
일본 1명(미국 요청으로 이송한 현지인 14명)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도, 산케이까지 가세해 '정부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손 흔들며 떠난 자위대…'빈손이라니'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과제'라며 8월 23일 자위대 파견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위대법 84조의 4-외국에 있어서 재해, 소란 그 밖의 긴급사태'
'일본인 대상 4번 파견, 외국인 대상 작전은 처음'


일본의 파견이 늦어진 '구실'이라도 만들어주듯, 일본 언론의 기사에는 자위대 파견의 근거와 역사까지 열거됐습니다. TV뉴스에서는 손을 흔드는 사람들 넘어 이륙하는 자위대 수송기의 모습이 흘러나왔습니다. '아프간 구출 작전'이 항공기가 뜨기 전부터 미리 홍보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을 텐데요.

자위대 수송기가 아프간 대피 작전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자위대 수송기가 아프간 대피 작전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계획한 아프간 대피 인원은 현지에 남아있는 일본인과 일본대사관, 국제협력기구의 아프간인 직원 등 5백 여명. 대피 작전을 수행할 자위대 수송기 3대, 정부 전용기 1대, 대원 300명을 파견했습니다.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씩, 현지 사정이 좋진 않았지만 주요 국가들의 아프간 구출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설마 일본이 '빈손'으로 돌아올 줄이야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 자국민 보호? 아니, 나홀로 탈출

자위대는 아프간 현지로 떠났지만, 그 곳 사정에 가장 훤한 일본대사관 직원들은 진작에 떠나고 없었습니다. 카불 함락 사흘째인 8월 17일, 그들은 영국 군용기에 몸을 싣고 빠져나갔습니다. 일찌감치 '나홀로 탈출'에 나선 겁니다. 그리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대피 작전을 계획했던 현지인 조력자들과 가족 수백 명은 그렇게 방치됐고, 미군 철수가 끝날 때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위대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의 만행(?)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대피하게 해달라"
"제3국이라도 좋다"


8월 29일 일본 민영방송 'ANN'과 화상인터뷰한 현지인 남성의 말입니다. 18년 동안 아프간 일본대사관의 경비로 근무했던 이 남성은 인터뷰에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호소했지만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도쿄와 얘기해보겠다'며 대사관 직원이 달랑 한 장 쥐어줬다는 소개장도 공개했습니다.

요미우리신문도 대사관 직원 12명이 '아프간인 조력자를 대피시킬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로 먼저 탈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日언론에 불 붙인 '미라클 작전'

일본 정부의 실책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 건 한국의 대응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현지 대응을 날짜별로 비교한 기사 일부한국과 일본의 현지 대응을 날짜별로 비교한 기사 일부

한국이 미군의 협력을 얻어 '버스 대피'에 성공한 건 8월 26일. 일본도 하루 뒷날 대피용 버스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자폭 테러가 발생하면서 대피 희망자들은 약속장소인 카불공항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본대사관 직원은 '원격'으로 겨우 현장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당연히 정보수집도, 신속한 현장 대응도 어려웠습니다.

때마침 390명을 대피시킨 한국의 미라클 작전은 화제가 됐습니다.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는 한국 외교관과 현지인 조력자의 감동적인 포옹 사진은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기-승-전-'개헌'

요리우리 지면에는 일본과 한국의 작전을 날짜별로 정리해 비교한 표까지 등장했고, 아사히신문은 사설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경위를 파악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미군 철수가 끝난 다음 날에도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묻는, 일본 정부에게는 뼈아픈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명암이 갈렸다'며 '반성하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습니다.

9월 1일자 산케이신문9월 1일자 산케이신문

예상은 했지만, 우익 성향의 산케이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위대 일본인 대피에는 헌법의 벽'

헌법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겁니다. 무력행사를 금지한 '헌법9조'가 발목을 잡아 대피 작전 수행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느라 파견 결정이 늦어졌다는 논리입니다.

일본 방위성은 8월 31일 결국 자위대의 철수를 명령했고, 말 그대로 자위대 수송기는 텅 빈 채 귀환하게 됐습니다.

이번 작전 실패가 일본에 '반성'의 재료가 되든, (산케이의 기사처럼)'개헌'의 재료가 되든, 이렇게 참담하게 끝나버렸으니 이번 일은 일본의 외교사와 방위사에 두고두고 굴욕으로 남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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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일본의 ‘굴욕’ 아프간 작전…기-승-전-개헌?
    • 입력 2021-09-02 07:00:08
    특파원 리포트

■ 도마 오른 일본의 아프간 대피 작전

일본 뒤늦어…대피 실패 (9월 1일 아사히 조간)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끝났지만 일본의 신문 지면에서는 작전 실패에 대한 비판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피자는 일본인 1명
현지인 직원들은 방치


직접적으로 '굴욕'이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기사는 '굴욕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숫자를 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국가별 수송기 대피작전 (출처:아사히신문)

※ 자국민 (현지인)
미국 6천 명(7만 3500명)
영국 5천 명(1만 명)
독일 530명(4천 800명)
프랑 142명(2천 7백 명)
터키 1천 명(확인 안됨)
한국 미공개(390명)
인도네시아 26명(7명)
일본 1명(미국 요청으로 이송한 현지인 14명)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도, 산케이까지 가세해 '정부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손 흔들며 떠난 자위대…'빈손이라니'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과제'라며 8월 23일 자위대 파견 사실을 알렸습니다.

'자위대법 84조의 4-외국에 있어서 재해, 소란 그 밖의 긴급사태'
'일본인 대상 4번 파견, 외국인 대상 작전은 처음'


일본의 파견이 늦어진 '구실'이라도 만들어주듯, 일본 언론의 기사에는 자위대 파견의 근거와 역사까지 열거됐습니다. TV뉴스에서는 손을 흔드는 사람들 넘어 이륙하는 자위대 수송기의 모습이 흘러나왔습니다. '아프간 구출 작전'이 항공기가 뜨기 전부터 미리 홍보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을 텐데요.

자위대 수송기가 아프간 대피 작전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계획한 아프간 대피 인원은 현지에 남아있는 일본인과 일본대사관, 국제협력기구의 아프간인 직원 등 5백 여명. 대피 작전을 수행할 자위대 수송기 3대, 정부 전용기 1대, 대원 300명을 파견했습니다.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씩, 현지 사정이 좋진 않았지만 주요 국가들의 아프간 구출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설마 일본이 '빈손'으로 돌아올 줄이야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 자국민 보호? 아니, 나홀로 탈출

자위대는 아프간 현지로 떠났지만, 그 곳 사정에 가장 훤한 일본대사관 직원들은 진작에 떠나고 없었습니다. 카불 함락 사흘째인 8월 17일, 그들은 영국 군용기에 몸을 싣고 빠져나갔습니다. 일찌감치 '나홀로 탈출'에 나선 겁니다. 그리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대피 작전을 계획했던 현지인 조력자들과 가족 수백 명은 그렇게 방치됐고, 미군 철수가 끝날 때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위대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의 만행(?)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대피하게 해달라"
"제3국이라도 좋다"


8월 29일 일본 민영방송 'ANN'과 화상인터뷰한 현지인 남성의 말입니다. 18년 동안 아프간 일본대사관의 경비로 근무했던 이 남성은 인터뷰에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호소했지만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도쿄와 얘기해보겠다'며 대사관 직원이 달랑 한 장 쥐어줬다는 소개장도 공개했습니다.

요미우리신문도 대사관 직원 12명이 '아프간인 조력자를 대피시킬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로 먼저 탈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日언론에 불 붙인 '미라클 작전'

일본 정부의 실책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 건 한국의 대응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현지 대응을 날짜별로 비교한 기사 일부
한국이 미군의 협력을 얻어 '버스 대피'에 성공한 건 8월 26일. 일본도 하루 뒷날 대피용 버스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자폭 테러가 발생하면서 대피 희망자들은 약속장소인 카불공항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본대사관 직원은 '원격'으로 겨우 현장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당연히 정보수집도, 신속한 현장 대응도 어려웠습니다.

때마침 390명을 대피시킨 한국의 미라클 작전은 화제가 됐습니다.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는 한국 외교관과 현지인 조력자의 감동적인 포옹 사진은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기-승-전-'개헌'

요리우리 지면에는 일본과 한국의 작전을 날짜별로 정리해 비교한 표까지 등장했고, 아사히신문은 사설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경위를 파악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미군 철수가 끝난 다음 날에도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묻는, 일본 정부에게는 뼈아픈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명암이 갈렸다'며 '반성하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습니다.

9월 1일자 산케이신문
예상은 했지만, 우익 성향의 산케이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위대 일본인 대피에는 헌법의 벽'

헌법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겁니다. 무력행사를 금지한 '헌법9조'가 발목을 잡아 대피 작전 수행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느라 파견 결정이 늦어졌다는 논리입니다.

일본 방위성은 8월 31일 결국 자위대의 철수를 명령했고, 말 그대로 자위대 수송기는 텅 빈 채 귀환하게 됐습니다.

이번 작전 실패가 일본에 '반성'의 재료가 되든, (산케이의 기사처럼)'개헌'의 재료가 되든, 이렇게 참담하게 끝나버렸으니 이번 일은 일본의 외교사와 방위사에 두고두고 굴욕으로 남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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