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 음주운전 ‘무죄’…“경찰이 음주운전 유도”

입력 2021.09.0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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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의 경찰 지구대경남 창원의 경찰 지구대

45살 이 모 씨는 지난 2019년 11월 1일 저녁, 경남 창원의 한 경찰 지구대 주차장에 자신의 승합차를 주차했습니다. 지구대 맞은편 식당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신 이 씨는 주변 숙박업소에서 잤습니다.

이튿날 오전 7시쯤, 지구대 소속 경찰관이 이 씨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습니다. 오전 업무가 시작되면 주차장이 혼잡하니 차를 빼라는 전화였습니다.

이 씨는 전날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 당장 운전할 수 없다고 답했고, 경찰관은 대리운전이나 지인을 불러서라도 차를 빼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씨가 지구대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30분쯤, 전화로 차를 빼달라던 경찰관은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했고 주간근무조 경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 씨는 지구대 주차장에서 바로 앞 도로까지 10m 거리를 운전해 차를 뺐습니다.

그런데 차를 이동시킨 직후 경찰관은 이 씨에게 음주측정을 요구했습니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처분 수준의 0.059%였습니다. 경찰은 이 씨를 음주운전으로 적발했습니다.

경찰 지구대 주차장경찰 지구대 주차장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음주운전을 할 의도가 없었고, 경찰관이 여러 차례 전화해 운전하게 했으며, 운전하자마자 음주측정을 한 건 '함정수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차를 빼지 않을 경우 지구대 주차장의 교통혼잡이 예상됐으며, 경찰관에게 술을 마신 사실을 충분히 알렸음에도 경찰관이 차를 뺄 수 있도록 순찰차를 이동시켜주기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운전은 '긴급피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단속 경찰관은 야간 근무를 하던 동료 경찰관으로부터 '이 씨와 통화했고 차를 빼주기로 했다'는 취지로 인수인계를 받았을 뿐 이 씨가 술을 마신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반박했습니다.

경찰은 또 최초 범죄인지서에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차에 타기 전부터 술 냄새가 났다'고 작성한 건 착오로 인해 잘못 작성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심 재판부는 경찰 진술을 인정했습니다.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술을 마셨는지 몰랐을 수 있고, 차량을 이동시킨 뒤 지구대 주차장에 주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과정에서 술 냄새가 나 음주단속을 한 것으로 봤습니다. 함정수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또 차를 빼라고 전화한 경찰관이 대리운전이나 지인을 부르라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한 이상
'긴급피난'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지난달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핵심은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차에 타기 전부터 술 냄새가 났다'라고 쓴 최초 범죄인지서였습니다.

1심 재판부는 범죄인지서가 착오로 인해 잘못 쓴 것이라는 단속 경찰관의 말을 신뢰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범죄인지서에 '구체적 경위에 대한 기재'가 돼 있고 이를 착오로 잘못 썼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단속 경찰관은 이 씨가 운전하기 전부터 음주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운전 직후 음주단속을 한 건 함정수사는 아니더라도 '적법한 증거 수집 절차가 아니'라고 본 겁니다.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증거는 음주운전을 뒷받침할 증거능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취지입니다.

재판부는 막을 수 있었던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방치한 뒤 곧바로 음주측정 등의 수사를 개시한 건 정당한 증거 수집 절차가 아니라고 판시했습니다.

이 씨를 변호한 오근영 변호사는 "경찰관이 시민에게 음주운전을 하도록 유발했고, 음주운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방치해 운전하게 한 직후 음주측정을 한 행위를 법원이 인정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런 경찰관의 행위는 적법 절차 원칙을 규정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명시하며 그 과정에서 수집한 증거는 위법한 증거라고 판단한 의미가 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1심과 2심이 유무죄로 엇갈린 이번 사건의 결론은 대법원에서 내려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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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m 음주운전 ‘무죄’…“경찰이 음주운전 유도”
    • 입력 2021-09-02 16:26:28
    취재K
경남 창원의 경찰 지구대
45살 이 모 씨는 지난 2019년 11월 1일 저녁, 경남 창원의 한 경찰 지구대 주차장에 자신의 승합차를 주차했습니다. 지구대 맞은편 식당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신 이 씨는 주변 숙박업소에서 잤습니다.

이튿날 오전 7시쯤, 지구대 소속 경찰관이 이 씨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습니다. 오전 업무가 시작되면 주차장이 혼잡하니 차를 빼라는 전화였습니다.

이 씨는 전날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 당장 운전할 수 없다고 답했고, 경찰관은 대리운전이나 지인을 불러서라도 차를 빼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씨가 지구대에 도착한 건 오전 8시 30분쯤, 전화로 차를 빼달라던 경찰관은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했고 주간근무조 경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 씨는 지구대 주차장에서 바로 앞 도로까지 10m 거리를 운전해 차를 뺐습니다.

그런데 차를 이동시킨 직후 경찰관은 이 씨에게 음주측정을 요구했습니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처분 수준의 0.059%였습니다. 경찰은 이 씨를 음주운전으로 적발했습니다.

경찰 지구대 주차장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음주운전을 할 의도가 없었고, 경찰관이 여러 차례 전화해 운전하게 했으며, 운전하자마자 음주측정을 한 건 '함정수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차를 빼지 않을 경우 지구대 주차장의 교통혼잡이 예상됐으며, 경찰관에게 술을 마신 사실을 충분히 알렸음에도 경찰관이 차를 뺄 수 있도록 순찰차를 이동시켜주기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운전은 '긴급피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단속 경찰관은 야간 근무를 하던 동료 경찰관으로부터 '이 씨와 통화했고 차를 빼주기로 했다'는 취지로 인수인계를 받았을 뿐 이 씨가 술을 마신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반박했습니다.

경찰은 또 최초 범죄인지서에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차에 타기 전부터 술 냄새가 났다'고 작성한 건 착오로 인해 잘못 작성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심 재판부는 경찰 진술을 인정했습니다.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술을 마셨는지 몰랐을 수 있고, 차량을 이동시킨 뒤 지구대 주차장에 주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과정에서 술 냄새가 나 음주단속을 한 것으로 봤습니다. 함정수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또 차를 빼라고 전화한 경찰관이 대리운전이나 지인을 부르라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한 이상
'긴급피난'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지난달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핵심은 단속 경찰관이 '이 씨가 차에 타기 전부터 술 냄새가 났다'라고 쓴 최초 범죄인지서였습니다.

1심 재판부는 범죄인지서가 착오로 인해 잘못 쓴 것이라는 단속 경찰관의 말을 신뢰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범죄인지서에 '구체적 경위에 대한 기재'가 돼 있고 이를 착오로 잘못 썼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단속 경찰관은 이 씨가 운전하기 전부터 음주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운전 직후 음주단속을 한 건 함정수사는 아니더라도 '적법한 증거 수집 절차가 아니'라고 본 겁니다.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증거는 음주운전을 뒷받침할 증거능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취지입니다.

재판부는 막을 수 있었던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방치한 뒤 곧바로 음주측정 등의 수사를 개시한 건 정당한 증거 수집 절차가 아니라고 판시했습니다.

이 씨를 변호한 오근영 변호사는 "경찰관이 시민에게 음주운전을 하도록 유발했고, 음주운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방치해 운전하게 한 직후 음주측정을 한 행위를 법원이 인정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런 경찰관의 행위는 적법 절차 원칙을 규정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명시하며 그 과정에서 수집한 증거는 위법한 증거라고 판단한 의미가 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1심과 2심이 유무죄로 엇갈린 이번 사건의 결론은 대법원에서 내려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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