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침’ 거짓 진술에…교사 32년 만에 무죄 “제자들 짐 내려놓길”

입력 2021.09.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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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차에 타는 순간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요”

1989년 5월 24일 11시 30분. 충북 제천의 제원고등학교(현 제천디지털전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강성호 교사에게 교장실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교장실 문을 열자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 2명이 강 교사를 맞았습니다.

“강성호 선생님 맞으시죠? 학생 문제 때문에 확인할 내용이 있습니다. 잠시 경찰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학생 문제’라는 말에 이제 막 부임한 28살의 초임교사는 형사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검정색 지프자에 올라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먹과 구둣발이 날아왔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도착한 곳은 제천경찰서 대공과 사무실. 손에는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강 교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6·25 북침설’을 교육하고 ‘북한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교육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말했습니다. 간첩 혐의가 적용됐으니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강 교사는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간첩도 아니고 친북 교육을 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강 교사의 진술을 믿지 않았습니다.

깊은 밤이 되자 경찰은 강 교사의 제자들을 조사실로 불러 대질신문을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쳤어요. 미군이 북한을 먼저 공격해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강 교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반 학생 여러 명이 수차례에 걸쳐 강 교사의 ‘친북 발언’을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지만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 발령 4개월 만에 수감된 강 교사는 출소하고도 10년 넘게 학교 밖을 맴돌아야 했습니다.

강 교사는 일련의 사건이 당시 막 결성되기 시작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노태우정부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전교조 결성식에 참여한 저를 간첩으로 몰아서 전교조가 좌경 용공집단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한 거죠”

그리고 2년 전, 명예회복을 위해 강 교사는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당시 형사들이 강 교사를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구금했다면서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재심 법정에 선 당시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과 경찰이 거짓 진술을 하라고 회유하고 압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문제가 된 수업에 결석했던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담임 교사가 학생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진술을 종용한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습니다. 경찰이 영장 없이 강 교사가 근무했던 교무실과 주거지를 압수 수색을 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32년 만에 간첩 교사라는 누명을 벗게 됐지만 강 교사는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32년 전 교실을 빠져나와 교장실로 불려간 이후부터 재심 결과가 나온 오늘까지. 법정 밖에서 제자들과 단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 교사는 여전히 32년 전 경찰서에서 제자와 만난 그 날을 가장 마음 아파했습니다.

“저를 간첩이라고 증언했던 그 제자들, 제자들은 여전히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결코 가볍지는 않죠. 그렇지만 저는 그 제자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국가보안법이 만든 하나의 희생양이죠. 제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강 교사는 다만 당시 사건의 진실 은폐에 관여한 교장과 교감 등 교육 관계자들이 즉각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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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침’ 거짓 진술에…교사 32년 만에 무죄 “제자들 짐 내려놓길”
    • 입력 2021-09-05 08:00:05
    취재K

“지프차에 타는 순간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요”

1989년 5월 24일 11시 30분. 충북 제천의 제원고등학교(현 제천디지털전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강성호 교사에게 교장실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교장실 문을 열자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 2명이 강 교사를 맞았습니다.

“강성호 선생님 맞으시죠? 학생 문제 때문에 확인할 내용이 있습니다. 잠시 경찰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학생 문제’라는 말에 이제 막 부임한 28살의 초임교사는 형사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검정색 지프자에 올라타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먹과 구둣발이 날아왔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도착한 곳은 제천경찰서 대공과 사무실. 손에는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강 교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6·25 북침설’을 교육하고 ‘북한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교육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말했습니다. 간첩 혐의가 적용됐으니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강 교사는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간첩도 아니고 친북 교육을 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강 교사의 진술을 믿지 않았습니다.

깊은 밤이 되자 경찰은 강 교사의 제자들을 조사실로 불러 대질신문을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쳤어요. 미군이 북한을 먼저 공격해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강 교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반 학생 여러 명이 수차례에 걸쳐 강 교사의 ‘친북 발언’을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지만 판결은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 발령 4개월 만에 수감된 강 교사는 출소하고도 10년 넘게 학교 밖을 맴돌아야 했습니다.

강 교사는 일련의 사건이 당시 막 결성되기 시작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노태우정부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전교조 결성식에 참여한 저를 간첩으로 몰아서 전교조가 좌경 용공집단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한 거죠”

그리고 2년 전, 명예회복을 위해 강 교사는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당시 형사들이 강 교사를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구금했다면서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재심 법정에 선 당시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과 경찰이 거짓 진술을 하라고 회유하고 압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문제가 된 수업에 결석했던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담임 교사가 학생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진술을 종용한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습니다. 경찰이 영장 없이 강 교사가 근무했던 교무실과 주거지를 압수 수색을 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32년 만에 간첩 교사라는 누명을 벗게 됐지만 강 교사는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32년 전 교실을 빠져나와 교장실로 불려간 이후부터 재심 결과가 나온 오늘까지. 법정 밖에서 제자들과 단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 교사는 여전히 32년 전 경찰서에서 제자와 만난 그 날을 가장 마음 아파했습니다.

“저를 간첩이라고 증언했던 그 제자들, 제자들은 여전히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결코 가볍지는 않죠. 그렇지만 저는 그 제자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국가보안법이 만든 하나의 희생양이죠. 제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강 교사는 다만 당시 사건의 진실 은폐에 관여한 교장과 교감 등 교육 관계자들이 즉각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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