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통기타 거리로 변한 광주 사직공원, 7080시절 동물원 관람객들로 ‘북적’

입력 2021.09.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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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제사 지내던 사직단 있던 곳에 1924년 일제가 기념공원으로 조성
-1971년 호남 최대 동물원 개장...20여 년간 호남 최고 명소로 각광
-1993년에 사직단 복원...현재 통기타 거리와 전망타워, 명물로 등장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9월 15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MH5bDPY41w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역사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난 주에는 광주 최초의 공원 광주공원 이야기를 해드렸고요. 아마 1970~1980년대 이야기니까 아시는 분 많을 것이에요. 벚꽃, 동물원, 팔각정이 있었던 공원. 그래서 남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공원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직공원입니다. 광주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공원인데 오늘까지 공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직공원이 품었던 역사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사직공원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었잖아요. 그런 기억 많이 가지고 계실 텐데. 광주의 두 번째 공원이다. 저희 KBS도 얼마 전까지는 광주 사직공원에 있었습니다.

◆ 노성태: 지금 흔적 남아 있지요.

◇ 지창환: 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이 공원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나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광주공원 1913년 신사를 만들기 위해서 조성이 됐고요. 24년도에 조성이 되니까 11년 정도 뒤에, 그러니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 때 왕이 히로히토 왕이잖아요. 히로히토가 24년도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성됐기 때문에 원래 처음 이름이 기념공원 이렇게 불렸던 것이고, 그리고 광주 공원에 공원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광주공원은 구공원, 사직공원은 새로 만들었으니까 신공원 이렇게 부르다가 해방 이후에 사직단이 있어서 사직공원 이렇게 부르게 됐던 것이지요. 아까 히로히토가 결혼식을 기념해서 만들었던 공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2년 뒤에 1926년부터 1989년까지 63년 동안이나 재위했었던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래 왕 노릇 했던 사람인데 지금 일본왕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이지요.

◇ 지창환: 일본 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해서 공원을 만들었다는 것이 꺼림칙하네요. 사직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사직단일 것 같은데. 사직단이 풍년 농사, 그리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제사 지냈던 곳이잖아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전국 곳곳에, 서울을 비롯해서 사직단을 설치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직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토지를 관할하는 신인 사와 그리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곡식을 관할하는 직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 사직단인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농업 국가 시절이었잖아요. 그러니까 토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왕이 친히 나가서 풍년, 그리고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왕이 광주까지는 올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광주에서는 광주 목사가 왕을 대신해서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역대 임금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 서울에 종묘가 있고 그리고 사직과 합해서 종묘사직이라고 불렸는데 종묘사직은 왕조 그 자체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극에 종종 보면 이렇게 나오잖아요.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할 때 사직이 바로 토지 신, 곡식 신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서울은 물론이고 지역의 큰 고을에는 사직골, 사직단이 있었잖아요. 이것이 사직단에서 비롯됐는데. 매우 의미 있는 장소였는데, 그러면 일본이 공원을 조성하면서 없앱니까?

◆ 노성태: 그 이전에 없애지요. 1905년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통감부가 들어서잖아요. 그래서 1908년 통감부 칙령으로 사직단에 대한 제사를 폐지합니다. 방치된 상태로 1960년대 말까지 오다가 60년대 말에 헐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동물원이 들어서게 되면서 헐리게 되는데 사직단을 그 뒤에 복원해야 된다 이런 여론이 일게 되고. 그래서 1991년도에 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옮겨지자 93년도에 복원이 됐고. 그리고 94년도에 다시 사직제가 행해지면서 지금도 민간단체에서 주관해서 사직제를 행하고 있지요.

◇ 지창환: 1908년에 사직단이 없어졌는데 93년에 다시 복원이 됐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 사직단에 사직공원 동물원이 들어섰고. 사직동물원 당시 큰 인기 얻었잖아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저도 어린아이 안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 지창환: 저도 수학여행을 거기로 가본 기억이 있습니다.

◆ 노성태: 그래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1970~1980년대 사직공원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인기가 있었던 장소였는데 이유는 동물원 때문이었다. 1971년도에 동물원이 개장될 때 동물 수는 21종 51마리였으니까 작은 동물원이었다가 80년대에 가면 80여종 300여마리로 늘어나게 됩니다. 개관 당시 사직공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무엇이지요? 코끼리지요?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했었던 코끼리가 없었습니다. 광주 시민을 위해서 코끼리를 사서 후원하겠다고 하는 후원자가 있었지만 동물원 측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사줘도 사육장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사직공원이 협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끼리가 없었고요. 아무튼 당시 70~80년대 볼거리가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작은 규모의 동물원이었지만 도시락 싸들고 남도 곳곳에서 찾아왔던, 엄마 손을 잡고 찾아왔던 어린이들의 최고의 놀이장소. 어른들도 많이 갔지요.

◇ 지창환: 호랑이나 원숭이만 봐도 신기한 시절이었잖아요. 당시에는 별로 놀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당시 사직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이 호랑이였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71년 개장과 동시에 뱅골산 호랑이 부부가 들어왔는데 1973년도에 3마리 새끼를 낳은 뒤에 7번에 걸쳐서 24마리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동양 신기록이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민화에도 자주 등장하고 우리 민족을 지켜내는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것인데 24마리나 출산했으니까 출산할 때마다 지역 언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았고. 언론의 뜨거운 조명, 남도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곳이지요. 광주를 연고로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 지금은 기아타이거즈입니다만 마스코트가 호랑이잖아요. 호랑이가 됐던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지창환: 해태도 사자처럼 생긴 상상 속의 동물이잖아요. 해태타이거즈, 사자와 호랑이 막강한 동물들로... 그런데 지금은 사직공원의 동물원이 없어졌잖아요.

◆ 노성태: 우치로 옮겨졌지요. 그러니까 71년도에 개장했다가 20년 만인 1991년도에 우치공원으로 이장하면서 사직공원 시대를 마감하게 되는데 우치공원은 사직공원보다 20배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치로 옮겨 가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늘어나는 식구를 감당할 수 없는 장소의 협소성.

◇ 지창환: 큰집으로 옮겼군요.

◆ 노성태: 큰집으로 평수를 넓혀서 이사한 것이지요. 그런데 꼭 그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물의 울음소리, 소음, 냄새, 모기나 파리떼의 습격. 그래서 인근 주민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도 감안된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창환: 애초에 제사 지내던 사직단이 헐리고 지금 다시 복원했지만 동물원이 들어서고 이제 다른 데로 옮기고. 지금은 시비가 많이 있잖아요. 어떤 분들 시비가 세워져 있나요?

◆ 노성태: 우리 지역은 예향이라고도 부르잖아요. 가사문학의 발상지이고 그 전통을 이어서 근현대시로 계승이 되고. 또 우리 지역에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배출이 됩니다. 이분들을 기리는 시비가 사직공원에 11기나 세워져 있습니다. 사직공원 시비 중에 나주 출신 백호 임제 시비에 새겨진 것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는다 (홍안, 아리따운 얼굴이지요.)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 지창환: 교과서에 많이 나왔습니다.

◆ 노성태: 아마 애청자 여러분의 귀에 낯익은 시라고 생각되는데 백호 임제가 개성의 황진이 묘를 찾아가서 읊었던 시잖아요.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풍류여걸 황진이를 만나기 위해서 개성에 들렀는데 석 달 전에 이미 죽잖아요. 그래서 닭 한 마리, 술 한 병 사들고 무덤을 찾게 되는데 이 사건이 이후에 임제가 중앙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기생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사대부의 체면을 구겼다고. 그래서 당시 괘씸죄 같은 것이 적용됐던 것이지요.

◇ 지창환: 황진이를 사모했겠지요?

◆ 노성태: 네. 나주에서까지 사모하셨던 것 같은데 실은 황진이가 30살 정도 앞선 시대에 살았던 분이십니다.

◇ 지창환: 그러면 맥락이 맞는 것은 아니네요.

◆ 노성태: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것이지요.

◇ 지창환: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나주 출신 임제의 시비가 있군요. 또 다른 분들도 있나요?

◆ 노성태: 많이 있는데요. 장성 필암서원의 주인이 하서 김인후 선생인데 이분의 시비도 있고 또 남도가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정신을 세웠던 신비복위소의 주인공 눌재 박상의 시비도 있고요. 그다음에 우리 국문학의 대표 시인이지요. 고산 윤선도. 오우가를 새긴 시비도 서 있습니다. 충장로의 주인공으로 언급했는데 김덕령 장군. 억울한 심정을 담은 시비도 새겨져 있고 그리고 금남로의 주인공 정충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나라를 걱정했던 우국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강술래라고 하는 현대에 쓴 이동주 시인의 시비도 있고요. 그리고 조선의 창호지를 쓴 휴전선 시인 박봉우의 시비도 있고. 그리고 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렸습니다만 이수복의 봄비 등 시비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사직공원에 가면 전망대, 전망타워가 있잖아요. 서울에 남산타워가 있다면 광주에는 전망타워가 있다.

◆ 노성태: 원래 그 자리에 나무 전망대였습니다. 나무 전망대는 굉장히 낮았지만 1920년대 광주 인구가 5만 내외였거든요. 그래서 전망대만 오르면 광주가 한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73년도에 아마 많은 광주 시민이 기억할 것 같은데 시멘트로 만든 팔각정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 팔각정 전망대가 2015년도까지 있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전망대가 전망타워로 바뀌었나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2015년도에 3층으로 만들어진 14m 높이의 멋진 전망타워가 들어서게 됩니다. 멀리서 보면 광주가 빛고을이잖아요. 빛의 이미지를 살린 외형부터 명품이고요. 전망대를 올라가 보면 광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정말 광주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직공원에 올라가시면 꼭 전망타워에 올라가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네요.

◇ 지창환: 지난주 광주공원에 이어서 사직공원까지 잘 들었고요. 다음 주 역사 이야기도 기대가 됩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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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통기타 거리로 변한 광주 사직공원, 7080시절 동물원 관람객들로 ‘북적’
    • 입력 2021-09-15 11:36:47
    광주
-제사 지내던 사직단 있던 곳에 1924년 일제가 기념공원으로 조성<br />-1971년 호남 최대 동물원 개장...20여 년간 호남 최고 명소로 각광<br />-1993년에 사직단 복원...현재 통기타 거리와 전망타워, 명물로 등장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9월 15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MH5bDPY41w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역사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난 주에는 광주 최초의 공원 광주공원 이야기를 해드렸고요. 아마 1970~1980년대 이야기니까 아시는 분 많을 것이에요. 벚꽃, 동물원, 팔각정이 있었던 공원. 그래서 남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공원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직공원입니다. 광주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공원인데 오늘까지 공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직공원이 품었던 역사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사직공원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었잖아요. 그런 기억 많이 가지고 계실 텐데. 광주의 두 번째 공원이다. 저희 KBS도 얼마 전까지는 광주 사직공원에 있었습니다.

◆ 노성태: 지금 흔적 남아 있지요.

◇ 지창환: 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이 공원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나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광주공원 1913년 신사를 만들기 위해서 조성이 됐고요. 24년도에 조성이 되니까 11년 정도 뒤에, 그러니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 때 왕이 히로히토 왕이잖아요. 히로히토가 24년도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성됐기 때문에 원래 처음 이름이 기념공원 이렇게 불렸던 것이고, 그리고 광주 공원에 공원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광주공원은 구공원, 사직공원은 새로 만들었으니까 신공원 이렇게 부르다가 해방 이후에 사직단이 있어서 사직공원 이렇게 부르게 됐던 것이지요. 아까 히로히토가 결혼식을 기념해서 만들었던 공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2년 뒤에 1926년부터 1989년까지 63년 동안이나 재위했었던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래 왕 노릇 했던 사람인데 지금 일본왕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이지요.

◇ 지창환: 일본 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해서 공원을 만들었다는 것이 꺼림칙하네요. 사직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사직단일 것 같은데. 사직단이 풍년 농사, 그리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제사 지냈던 곳이잖아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전국 곳곳에, 서울을 비롯해서 사직단을 설치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직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토지를 관할하는 신인 사와 그리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곡식을 관할하는 직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 사직단인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농업 국가 시절이었잖아요. 그러니까 토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왕이 친히 나가서 풍년, 그리고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왕이 광주까지는 올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광주에서는 광주 목사가 왕을 대신해서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역대 임금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 서울에 종묘가 있고 그리고 사직과 합해서 종묘사직이라고 불렸는데 종묘사직은 왕조 그 자체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극에 종종 보면 이렇게 나오잖아요.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할 때 사직이 바로 토지 신, 곡식 신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서울은 물론이고 지역의 큰 고을에는 사직골, 사직단이 있었잖아요. 이것이 사직단에서 비롯됐는데. 매우 의미 있는 장소였는데, 그러면 일본이 공원을 조성하면서 없앱니까?

◆ 노성태: 그 이전에 없애지요. 1905년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통감부가 들어서잖아요. 그래서 1908년 통감부 칙령으로 사직단에 대한 제사를 폐지합니다. 방치된 상태로 1960년대 말까지 오다가 60년대 말에 헐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동물원이 들어서게 되면서 헐리게 되는데 사직단을 그 뒤에 복원해야 된다 이런 여론이 일게 되고. 그래서 1991년도에 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옮겨지자 93년도에 복원이 됐고. 그리고 94년도에 다시 사직제가 행해지면서 지금도 민간단체에서 주관해서 사직제를 행하고 있지요.

◇ 지창환: 1908년에 사직단이 없어졌는데 93년에 다시 복원이 됐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 사직단에 사직공원 동물원이 들어섰고. 사직동물원 당시 큰 인기 얻었잖아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저도 어린아이 안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 지창환: 저도 수학여행을 거기로 가본 기억이 있습니다.

◆ 노성태: 그래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1970~1980년대 사직공원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던 인기가 있었던 장소였는데 이유는 동물원 때문이었다. 1971년도에 동물원이 개장될 때 동물 수는 21종 51마리였으니까 작은 동물원이었다가 80년대에 가면 80여종 300여마리로 늘어나게 됩니다. 개관 당시 사직공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무엇이지요? 코끼리지요?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했었던 코끼리가 없었습니다. 광주 시민을 위해서 코끼리를 사서 후원하겠다고 하는 후원자가 있었지만 동물원 측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사줘도 사육장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사직공원이 협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끼리가 없었고요. 아무튼 당시 70~80년대 볼거리가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작은 규모의 동물원이었지만 도시락 싸들고 남도 곳곳에서 찾아왔던, 엄마 손을 잡고 찾아왔던 어린이들의 최고의 놀이장소. 어른들도 많이 갔지요.

◇ 지창환: 호랑이나 원숭이만 봐도 신기한 시절이었잖아요. 당시에는 별로 놀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당시 사직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이 호랑이였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71년 개장과 동시에 뱅골산 호랑이 부부가 들어왔는데 1973년도에 3마리 새끼를 낳은 뒤에 7번에 걸쳐서 24마리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동양 신기록이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민화에도 자주 등장하고 우리 민족을 지켜내는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것인데 24마리나 출산했으니까 출산할 때마다 지역 언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았고. 언론의 뜨거운 조명, 남도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곳이지요. 광주를 연고로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 지금은 기아타이거즈입니다만 마스코트가 호랑이잖아요. 호랑이가 됐던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지창환: 해태도 사자처럼 생긴 상상 속의 동물이잖아요. 해태타이거즈, 사자와 호랑이 막강한 동물들로... 그런데 지금은 사직공원의 동물원이 없어졌잖아요.

◆ 노성태: 우치로 옮겨졌지요. 그러니까 71년도에 개장했다가 20년 만인 1991년도에 우치공원으로 이장하면서 사직공원 시대를 마감하게 되는데 우치공원은 사직공원보다 20배나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치로 옮겨 가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늘어나는 식구를 감당할 수 없는 장소의 협소성.

◇ 지창환: 큰집으로 옮겼군요.

◆ 노성태: 큰집으로 평수를 넓혀서 이사한 것이지요. 그런데 꼭 그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물의 울음소리, 소음, 냄새, 모기나 파리떼의 습격. 그래서 인근 주민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도 감안된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창환: 애초에 제사 지내던 사직단이 헐리고 지금 다시 복원했지만 동물원이 들어서고 이제 다른 데로 옮기고. 지금은 시비가 많이 있잖아요. 어떤 분들 시비가 세워져 있나요?

◆ 노성태: 우리 지역은 예향이라고도 부르잖아요. 가사문학의 발상지이고 그 전통을 이어서 근현대시로 계승이 되고. 또 우리 지역에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배출이 됩니다. 이분들을 기리는 시비가 사직공원에 11기나 세워져 있습니다. 사직공원 시비 중에 나주 출신 백호 임제 시비에 새겨진 것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는다 (홍안, 아리따운 얼굴이지요.)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 지창환: 교과서에 많이 나왔습니다.

◆ 노성태: 아마 애청자 여러분의 귀에 낯익은 시라고 생각되는데 백호 임제가 개성의 황진이 묘를 찾아가서 읊었던 시잖아요.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풍류여걸 황진이를 만나기 위해서 개성에 들렀는데 석 달 전에 이미 죽잖아요. 그래서 닭 한 마리, 술 한 병 사들고 무덤을 찾게 되는데 이 사건이 이후에 임제가 중앙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기생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사대부의 체면을 구겼다고. 그래서 당시 괘씸죄 같은 것이 적용됐던 것이지요.

◇ 지창환: 황진이를 사모했겠지요?

◆ 노성태: 네. 나주에서까지 사모하셨던 것 같은데 실은 황진이가 30살 정도 앞선 시대에 살았던 분이십니다.

◇ 지창환: 그러면 맥락이 맞는 것은 아니네요.

◆ 노성태: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것이지요.

◇ 지창환: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나주 출신 임제의 시비가 있군요. 또 다른 분들도 있나요?

◆ 노성태: 많이 있는데요. 장성 필암서원의 주인이 하서 김인후 선생인데 이분의 시비도 있고 또 남도가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정신을 세웠던 신비복위소의 주인공 눌재 박상의 시비도 있고요. 그다음에 우리 국문학의 대표 시인이지요. 고산 윤선도. 오우가를 새긴 시비도 서 있습니다. 충장로의 주인공으로 언급했는데 김덕령 장군. 억울한 심정을 담은 시비도 새겨져 있고 그리고 금남로의 주인공 정충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나라를 걱정했던 우국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강술래라고 하는 현대에 쓴 이동주 시인의 시비도 있고요. 그리고 조선의 창호지를 쓴 휴전선 시인 박봉우의 시비도 있고. 그리고 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렸습니다만 이수복의 봄비 등 시비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사직공원에 가면 전망대, 전망타워가 있잖아요. 서울에 남산타워가 있다면 광주에는 전망타워가 있다.

◆ 노성태: 원래 그 자리에 나무 전망대였습니다. 나무 전망대는 굉장히 낮았지만 1920년대 광주 인구가 5만 내외였거든요. 그래서 전망대만 오르면 광주가 한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73년도에 아마 많은 광주 시민이 기억할 것 같은데 시멘트로 만든 팔각정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 팔각정 전망대가 2015년도까지 있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그러면 전망대가 전망타워로 바뀌었나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2015년도에 3층으로 만들어진 14m 높이의 멋진 전망타워가 들어서게 됩니다. 멀리서 보면 광주가 빛고을이잖아요. 빛의 이미지를 살린 외형부터 명품이고요. 전망대를 올라가 보면 광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정말 광주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직공원에 올라가시면 꼭 전망타워에 올라가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네요.

◇ 지창환: 지난주 광주공원에 이어서 사직공원까지 잘 들었고요. 다음 주 역사 이야기도 기대가 됩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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