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치매 환자지만, 꿈이 있습니다”

입력 2021.09.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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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 한창 일할 나이죠. 56세 이길복 씨의 하루도 분주합니다.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뇌건강학교’에서 방문객 안내를 하고 소독과 청소, 카페에서 음료를 만들기도 합니다. 치매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영화관 직원이기도 하고요. 가끔 통신 설비 업무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프로야구 경기 시구도 했다고 하네요. 보통의 50대 남성이 그러하듯, 정말 바쁘게 살고 계시죠?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길복 씨가 치매 환자라는 점 정도일 겁니다.

■ 전체 치매의 10.7%는 ‘초로기 치매’…무력감에 사회와 단절

이길복 씨는 ‘초로기 치매’ 환자입니다. ‘초로기 치매’는 원인 질환에 상관없이 치매가 65세 이전에 발병한 것을 의미합니다. ‘젊은 치매’라고도 부르죠. 2019년 기준으로 전국의 치매 환자 가운데 10.7%(94,187명)가 65세 이전에 발병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초로기 치매’는 젊은 나이에 발병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 치매라고 인식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발병 후 진단까지 보통 2~4년 지연이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노인성 치매에 비해 진행 속도가 빨라, 진단 후 생존 기간은 짧습니다. 그만큼 무섭고, 힘든 병이죠. 무엇보다 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발병하기 때문에 경제적·사회적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는데, 그로 인한 상실감과 무력감은 실로 엄청납니다. 통신 설비 일을 30년 가까이 하던 이길복 씨에게도 2019년 갑작스럽게 받아든 치매 진단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인터뷰 중인 이길복 씨(56세)인터뷰 중인 이길복 씨(56세)

“몇 년 치 기억이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지금이 몇 년도지? 일을 하다가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내가 여기 왜 있지? 그러면서 자꾸 실수를 하게 되더라고요. 이미 한 일을 또 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요즘 말로 ‘땡땡이’라고 하죠? 일하다가 만화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책만 보고 그러기도 했어요.” (이길복 씨, 초로기 치매 환자)


■ “‘돌봄’ 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 회복이 중요”

이런 무력감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은 집 안으로 숨고, 사회와 단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증상은 더 악화 되고, 가족들도 더 힘들어지죠. 하지만 인지 저하 속도와 비교하면 신체 능력은 젊기 때문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에게 사회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초로기 치매는 노인성 치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고, 환자나 가족이 원하는 정보와 지원 서비스도 부족합니다.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돌봄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나도 아직 할 수 있구나, 나의 역할이 있구나’라는 느낌이 치매 극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강호 작업치료사, 인천광역치매센터)


■ 초로기 치매 환자로 시구 참여…“삼미 팬이었던 이유는요”

이길복 씨는 지난 8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SG:LG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습니다. 매년 9월 21일은 WHO가 정한 ‘치매 극복의 날’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뜻깊은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이길복 씨에게 시구 경험은 남다른 일이었습니다.


지난 8일 SSG 경기 전 시구에 참여한 이길복 씨지난 8일 SSG 경기 전 시구에 참여한 이길복 씨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인천 연고 구단의 팬입니다. 삼미를 왜 좋아했는지 아세요? 최다 연패 기록을 갖고 있잖아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죠. 저도 치매를 만났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요. 아직 젊으니까요.”
(이길복 씨, 초로기 치매 환자)


■ “초로기 치매 환자지만, 꿈이 있습니다”

이길복 씨에게 시구 외에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여행’같은 특별한 경험을 말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답은 ‘꿈’이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태양광 쪽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그쪽 설비도 궁금하고, 새로운 영역인데 알고 싶더라고요. 공부를 해서 그쪽 일을 하고 싶어요.”

또 다른 초로기 치매 환자 한창규 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역시 대답은, 꿈이었습니다.

“저는 치매 진단을 받기 전에 사진 찍는 일을 했어요. 장비 만지는 것도 서툴러져서 그만 뒀지만, 해보고 싶은 건 사진을 다시 연구하고 싶어요. 새로운 기술도 배워서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뇌건강학교 쉼터 프로그램’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참여하고 있다.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뇌건강학교 쉼터 프로그램’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캐나다와 영국, 호주 등에서는 친교 활동과 여가 활동, 직업 활동 등 다양한 형태로 초로기 치매 환자들의 사회 활동 참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만나본 초로기 치매 환자들도 저마다의 꿈이 있다고 말합니다. 꿈을 꾸는 그들에게 치매는 그저 앞으로 남은 날들을 함께 가는 친구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그 동행이 안정적으로 계속될 수 있도록, 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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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치매 환자지만, 꿈이 있습니다”
    • 입력 2021-09-21 07:01:38
    취재K

56세, 한창 일할 나이죠. 56세 이길복 씨의 하루도 분주합니다.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뇌건강학교’에서 방문객 안내를 하고 소독과 청소, 카페에서 음료를 만들기도 합니다. 치매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영화관 직원이기도 하고요. 가끔 통신 설비 업무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프로야구 경기 시구도 했다고 하네요. 보통의 50대 남성이 그러하듯, 정말 바쁘게 살고 계시죠?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길복 씨가 치매 환자라는 점 정도일 겁니다.

■ 전체 치매의 10.7%는 ‘초로기 치매’…무력감에 사회와 단절

이길복 씨는 ‘초로기 치매’ 환자입니다. ‘초로기 치매’는 원인 질환에 상관없이 치매가 65세 이전에 발병한 것을 의미합니다. ‘젊은 치매’라고도 부르죠. 2019년 기준으로 전국의 치매 환자 가운데 10.7%(94,187명)가 65세 이전에 발병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초로기 치매’는 젊은 나이에 발병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 치매라고 인식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발병 후 진단까지 보통 2~4년 지연이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노인성 치매에 비해 진행 속도가 빨라, 진단 후 생존 기간은 짧습니다. 그만큼 무섭고, 힘든 병이죠. 무엇보다 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발병하기 때문에 경제적·사회적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는데, 그로 인한 상실감과 무력감은 실로 엄청납니다. 통신 설비 일을 30년 가까이 하던 이길복 씨에게도 2019년 갑작스럽게 받아든 치매 진단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인터뷰 중인 이길복 씨(56세)
“몇 년 치 기억이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지금이 몇 년도지? 일을 하다가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내가 여기 왜 있지? 그러면서 자꾸 실수를 하게 되더라고요. 이미 한 일을 또 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요즘 말로 ‘땡땡이’라고 하죠? 일하다가 만화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책만 보고 그러기도 했어요.” (이길복 씨, 초로기 치매 환자)


■ “‘돌봄’ 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 회복이 중요”

이런 무력감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은 집 안으로 숨고, 사회와 단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증상은 더 악화 되고, 가족들도 더 힘들어지죠. 하지만 인지 저하 속도와 비교하면 신체 능력은 젊기 때문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에게 사회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초로기 치매는 노인성 치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고, 환자나 가족이 원하는 정보와 지원 서비스도 부족합니다.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돌봄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나도 아직 할 수 있구나, 나의 역할이 있구나’라는 느낌이 치매 극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강호 작업치료사, 인천광역치매센터)


■ 초로기 치매 환자로 시구 참여…“삼미 팬이었던 이유는요”

이길복 씨는 지난 8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SG:LG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습니다. 매년 9월 21일은 WHO가 정한 ‘치매 극복의 날’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뜻깊은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이길복 씨에게 시구 경험은 남다른 일이었습니다.


지난 8일 SSG 경기 전 시구에 참여한 이길복 씨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인천 연고 구단의 팬입니다. 삼미를 왜 좋아했는지 아세요? 최다 연패 기록을 갖고 있잖아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죠. 저도 치매를 만났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요. 아직 젊으니까요.”
(이길복 씨, 초로기 치매 환자)


■ “초로기 치매 환자지만, 꿈이 있습니다”

이길복 씨에게 시구 외에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여행’같은 특별한 경험을 말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답은 ‘꿈’이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태양광 쪽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그쪽 설비도 궁금하고, 새로운 영역인데 알고 싶더라고요. 공부를 해서 그쪽 일을 하고 싶어요.”

또 다른 초로기 치매 환자 한창규 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역시 대답은, 꿈이었습니다.

“저는 치매 진단을 받기 전에 사진 찍는 일을 했어요. 장비 만지는 것도 서툴러져서 그만 뒀지만, 해보고 싶은 건 사진을 다시 연구하고 싶어요. 새로운 기술도 배워서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뇌건강학교 쉼터 프로그램’에 초로기 치매 환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캐나다와 영국, 호주 등에서는 친교 활동과 여가 활동, 직업 활동 등 다양한 형태로 초로기 치매 환자들의 사회 활동 참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만나본 초로기 치매 환자들도 저마다의 꿈이 있다고 말합니다. 꿈을 꾸는 그들에게 치매는 그저 앞으로 남은 날들을 함께 가는 친구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그 동행이 안정적으로 계속될 수 있도록, 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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