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미군의 ‘오염수’에 대처하는 일본의 자세

입력 2021.09.21 (09:0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 to Okinawa. from...

지난달 말 오전 9시 5분, 오키나와현에 이메일 한 통이 도착합니다.

'9시 반쯤부터 배수처리시스템으로 처리한 물을 방류한다'

여기서 물은 과불화화합물(PFOA, PFOS 등)이 함유된 물을 말합니다. 이름이 좀 어렵긴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쓰이는 물질입니다.

과불화화합물은 주로 방수 소재나 포장지, 소화 장비 등에 사용되는 물질로 암과 생식기능 저하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잘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되기 때문에 ‘영원한 화학물질(forever chemicals)’이라고 불립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해 사용이 금지되거나 기준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이런 물을 '흘려보내겠다'고 오키나와현에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건 누구였을까요?

그것도 '방류 직전'에, '이메일'로.

발신자는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 주둔 미군 부대입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오키나와방위국(일본 방위성 소속)도 오키나와현에 같은 내용으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미군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오키나와현에 알려준 겁니다. 미군이 버린 오염수의 양은 6만 4천 리터, 드럼 320통 분량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 "처리했으니 문제없다"

미군은 오염수를 방류한 후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저농도로 처리하고 방류했기 때문에 안전하다'

후텐마 기지가 있는 기노완시 측은 즉각 항의했습니다. 기노완시가 하수를 채취해 조사한 결과, 기준치의 1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후텐마 미군기지에서 오염수를 방류한 뒤 기노완시는 오염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하수도에서 물을 채취했다후텐마 미군기지에서 오염수를 방류한 뒤 기노완시는 오염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하수도에서 물을 채취했다

오키나와현 지사도 기자회견을 열어 '강한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화가 난 건 단지 미군의 일방적인 통보와 방류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군 측은 그동안 '오염수를 업체에 위탁해 처분해왔지만, 재정부담이 크다'며 음용 가능한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결국, 지난 7월 19일, 미군 기지 내 오염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일본 정부, 오키나와현 3자가 후텐마 기지에 모였습니다.

미군 기지 자체 시스템으로 오염 제거 처리를 한 뒤, 3자가 각각 분석한 결과를 비교해보고, 그에 따라 향후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로 했던 겁니다. 3자가 다시 모이기로 한 날짜가 미군이 달랑 이메일 한 통 보내고 오염수를 방류한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미국 눈치를 살피는 일본 정부였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방위성과 환경성의 과장이 오키나와를 찾아 "미군은 안전하다고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민에 걱정을 끼쳤다"며 사죄했습니다.


■ 미군이 버리면 오염수? 일본이 버리면 처리수?

언론도 이 문제를 끈질기게 보도했습니다. 오키나와 바다에 인체에 유해한 PFOS 오염수를 흘려보내 놓고 '저농도로 희석해서 방류했으니 괜찮다.'라니…

당연히 언론도 공분을 느끼고, 강력하게 해결책을 촉구해야 할 일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을 시찰하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후쿠시마 원전을 시찰하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그런데 여기서 '오키나와'를 '태평양'으로, 그리고 'PFOS'를 '방사능'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일방적'이라고 느끼는 오키나와 미군의 태도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하는 일본의 자세와 전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연히 원전과 미군기지라는 '폐쇄성'도 비슷합니다.

일본이 피해자에서 '행위자'로 달라졌을 뿐입니다. 행위자가 다른 두 오염수를 둘러싼 논란에서 일본 언론의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언론들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하고 내보낸다는 이유로 '처리수'라고 표기해왔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처리'한 물은 (정치 성향을 떠나) 하나같이 처리수가 아닌 '오염수'라고 쓰고 있습니다.

역시 미군이 방류한 물을 '오염수'라고 표기한 한 신문은 사설에서 미군의 방류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군의 오염수와 일본의 '처리수'.

사건의 얼개는 비슷하지만 두 사건에 대처하는 언론, 아니 일본의 태도는 달라 보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미군의 ‘오염수’에 대처하는 일본의 자세
    • 입력 2021-09-21 09:09:04
    특파원 리포트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 to Okinawa. from...

지난달 말 오전 9시 5분, 오키나와현에 이메일 한 통이 도착합니다.

'9시 반쯤부터 배수처리시스템으로 처리한 물을 방류한다'

여기서 물은 과불화화합물(PFOA, PFOS 등)이 함유된 물을 말합니다. 이름이 좀 어렵긴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쓰이는 물질입니다.

과불화화합물은 주로 방수 소재나 포장지, 소화 장비 등에 사용되는 물질로 암과 생식기능 저하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잘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되기 때문에 ‘영원한 화학물질(forever chemicals)’이라고 불립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해 사용이 금지되거나 기준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이런 물을 '흘려보내겠다'고 오키나와현에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건 누구였을까요?

그것도 '방류 직전'에, '이메일'로.

발신자는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 주둔 미군 부대입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오키나와방위국(일본 방위성 소속)도 오키나와현에 같은 내용으로 연락을 취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미군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오키나와현에 알려준 겁니다. 미군이 버린 오염수의 양은 6만 4천 리터, 드럼 320통 분량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 "처리했으니 문제없다"

미군은 오염수를 방류한 후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저농도로 처리하고 방류했기 때문에 안전하다'

후텐마 기지가 있는 기노완시 측은 즉각 항의했습니다. 기노완시가 하수를 채취해 조사한 결과, 기준치의 1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후텐마 미군기지에서 오염수를 방류한 뒤 기노완시는 오염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하수도에서 물을 채취했다
오키나와현 지사도 기자회견을 열어 '강한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화가 난 건 단지 미군의 일방적인 통보와 방류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군 측은 그동안 '오염수를 업체에 위탁해 처분해왔지만, 재정부담이 크다'며 음용 가능한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결국, 지난 7월 19일, 미군 기지 내 오염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일본 정부, 오키나와현 3자가 후텐마 기지에 모였습니다.

미군 기지 자체 시스템으로 오염 제거 처리를 한 뒤, 3자가 각각 분석한 결과를 비교해보고, 그에 따라 향후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로 했던 겁니다. 3자가 다시 모이기로 한 날짜가 미군이 달랑 이메일 한 통 보내고 오염수를 방류한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미국 눈치를 살피는 일본 정부였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방위성과 환경성의 과장이 오키나와를 찾아 "미군은 안전하다고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민에 걱정을 끼쳤다"며 사죄했습니다.


■ 미군이 버리면 오염수? 일본이 버리면 처리수?

언론도 이 문제를 끈질기게 보도했습니다. 오키나와 바다에 인체에 유해한 PFOS 오염수를 흘려보내 놓고 '저농도로 희석해서 방류했으니 괜찮다.'라니…

당연히 언론도 공분을 느끼고, 강력하게 해결책을 촉구해야 할 일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을 시찰하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그런데 여기서 '오키나와'를 '태평양'으로, 그리고 'PFOS'를 '방사능'으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일방적'이라고 느끼는 오키나와 미군의 태도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하는 일본의 자세와 전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연히 원전과 미군기지라는 '폐쇄성'도 비슷합니다.

일본이 피해자에서 '행위자'로 달라졌을 뿐입니다. 행위자가 다른 두 오염수를 둘러싼 논란에서 일본 언론의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언론들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하고 내보낸다는 이유로 '처리수'라고 표기해왔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처리'한 물은 (정치 성향을 떠나) 하나같이 처리수가 아닌 '오염수'라고 쓰고 있습니다.

역시 미군이 방류한 물을 '오염수'라고 표기한 한 신문은 사설에서 미군의 방류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군의 오염수와 일본의 '처리수'.

사건의 얼개는 비슷하지만 두 사건에 대처하는 언론, 아니 일본의 태도는 달라 보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