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붙잡힌 보이스피싱 콜센터 조직원들
■ 영화 속 '보이스피싱 콜센터'…이미 4년 전 제주에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받아본 경험이 있는 보이스피싱 전화. 도대체 어디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이런 전화를 거는 것인지, 찾아가서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지난 15일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 '보이스' 역시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든 보이스피싱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전직 형사 서준은 보이스피싱 전화로 딸의 병원비와 아파트 중도금을 잃은 건설현장 동료들을 위해 중국에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잠입한다.
개인정보 수집과 인출책 섭외, 환전소 작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보이스피싱 일당의 범죄 행태를 보며 서준은 할 말을 잃는다.
이처럼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 같지만, 이미 4년 전 제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타이완 조폭이 한국인과 공모해 제주도에 콜센터를 차려 중국인을 상대로 보이스피싱을 한, 일명 '제주 타이완 보이스피싱 콜센터 사건' 이다.
이인상 제주경찰청 차장(사진=제주경찰청)
당시 서울청 외사과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던 이인상 제주경찰청 차장은 "국내에서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적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검거된 범인들은 모두 재판에 넘겨져 현재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 4년 전 그날…타이완 조폭이 한국에 콜센터 차려 보이스피싱
2017년 12월 20일. 경찰과 소방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 등 120명이 제주도 빌라 2개 동을 동시에 급습한다.
타이완(대만) 조폭이 한국인과 공모해 제주도에서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첩보가 접수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건물 출입구와 호실을 강제 개방해 현장에서 타이완인과 중국인 등 58명을 검거했다.
빌라 건물 301호와 502호에서는 범인들이 보이스피싱 시나리오 등을 파쇄하고 있었고, 일부 범인은 서류를 소각하다 붙잡히기도 했다. 범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 타이완 조폭은 왜 제주도를 택했나
타이완 타이중 지역의 폭력조직 '금오C파(金敖C派)' 두목의 직계 부하였던 A는 일본과 터키 등에서 콜센터를 차려 현지 중국인을 상대로 보이스피싱을 시도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완 수사당국에 수배되자 다른 국가를 물색했고, 한국에 있는 제주도를 선택한다.
제주는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한 무사증제도 때문에 조직원을 대규모로 손쉽게 데려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A는 과거 필리핀에서 가이드 일을 하며 알게 된 한국인 총책 B에게 연락해 범행을 공모한다.
B는 자신의 여자친구 명의로 제주도에 있는 월세 1,200만 원 상당의 빌라(17세대)를 임대하고, 인터넷과 전화 설치를 비롯해 차량 렌트와 범죄수익 계좌 등을 준비하며 A와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다.
콜센터 설치를 마친 이들은 게임방 채팅과 SNS 등을 통해 타이완과 중국 조직원을 제주도로 모집했다.
중간 관리자는 조직원들에게 보이스피싱 범행 시나리오를 교육하고, 조직원들의 여권과 핸드폰을 건네 받아 조직을 이탈하거나 외부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콜센터는 총책을 필두로 중간관리자와 3개 조로 나뉘어 운영됐다. 내부에는 보이스피싱 상담원을 비롯해 식사 제공자와 청소 담당 등도 있었다.
이들은 내부 행동지침까지 마련해 경찰에 단속되면 증거를 불태우고,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다고 진술하기로 하는 등 대응책도 마련했다.
관리자급 조직원은 상담원들의 실적을 관리하며 매월 일정한 월급을 챙겼고, 상담원들은 성과에 따라 보이스피싱 성공금액의 5~8%를 받기로 하고 범행에 나섰다.
■ 중국인 피싱 이유는 '공안에 대한 두려움'
'고객님의 휴대전화가 정지될 예정입니다. 8번을 누르시면 고객센터로 연결됩니다.'
이들은 현지 중국인들에게 전화해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전화를 유도했다.
중국통신회사 직원을 사칭한 상담원들은 '전화 요금이 연체됐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아 공안국에 연결해 드리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중국인들이 공안에 느끼는 두려움을 이용한 것이다.
실제 범행에 사용된 휴대폰과 중국 공안 신분증
이들은 피해자가 공안 사칭에 넘어가면 '자금세탁 범죄에 연루됐다'며 겁을 준 뒤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계좌로 돈을 송금하라'고 속여 피해금을 뜯어냈다.
이 과정에서 위조한 중국 공안 신분증을 이용했다. 연락은 국가 간 경계가 없는 인터넷 전화(VoIP) 프로그램인 브리아(Bria)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현장에서 압수한 장부 등을 토대로 이들이 한 달간 4억 7,000만 원 상당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보고, 실제 수십억 원을 빼돌린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보이스피싱 콜센터 조직원들
■ IP주소에서 시작된 대규모 검거 작전
검거의 단초는 타이완 경찰이 한국 경찰에게 보낸 A의 IP 주소였다.
총책 A를 쫓고 있던 타이완 경찰은 A가 2017년 3월부터 5월까지 33명의 사람을 일본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보낸 사실을 확인한다.
이후 SNS를 추적해 A가 그해 6월과 7월 한국에서 접속한 기록을 확인했다.
타이완 경찰은 한국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서울청 외사과 직원이 A의 인터넷 접속 기록을 바탕으로 추적에 나섰다.
SNS에서 확인된 타이완 총책 A와 한국총책 B
경찰은 총책의 IP 접속 기록이 서울 모 호텔과 제주도 모 빌라로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고, 제주를 오간 항공편 탑승객과 SNS 계정 등을 보강 수사해 A와 B의 관계도 특정한다.
이후 잠복 등 현장 조사를 벌여 대규모 검거 작전을 펼친다.
경찰은 건물 내부에서 범행에 사용된 휴대전화 158대와 노트북 14대, 시나리오 멘트, 근무일지, 수익 장부, 공안 신분증, 공안을 사칭할 때 활용한 전화배경음악 자료 등을 압수한다.
동시에 서울에 있던 타이완 총책 A와 한국인 총책 B 씨 등을 체포한다.
현장에서 붙잡힌 보이스피싱 콜센터 조직원들
■ 조직원 58명 구속됐지만 범행 부인…차고 넘치는 증거
검거 사흘 뒤 조직원 58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증거를 찾는 데 주력했다. 산업기술유출수사팀(산기팀)은 디지털증거 분석을, 금융팀은 계좌 추적을, 나머지는 피해자 확보에 나섰다.
산기팀은 중국어로 된 컴퓨터 운영체제와 휴대전화를 분석하며 증거를 모았다.
압수된 컴퓨터에는 단속에 대비해 암호화 기능인 '비트로커(BitLocker)'가 설정돼 있었지만, 경찰은 분석 끝에 내부 자료를 확보했고, 범인들이 녹음파일을 틀어 피해자들을 속인 사실을 확인했다.
또 포렌식을 통해 수익 장부를 확보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아이폰 120대를 분석해 안에 있던 엄청난 양의 녹음 자료도 입수했다.
하지만 피해자 확보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한국경찰이라고 설명해도 보이스피싱으로 생각해 전화를 끊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수 십여 차례 통화 시도 끝에 10명의 피해자를 간신히 확보했다. 피해자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 당초 예상했던 피해 금액도 수십억 원에서 1억 7천여만 원으로 줄었다.
일부 범인들은 마지막까지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을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며 범행을 부인했지만 증거는 이미 차고 넘쳤다.
포렌식으로 밝혀진 보이스피싱 수익장부
경찰은 방대한 수사 끝에 범행이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사기와 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 대신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다. 조직원들은 전원 기소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은 A와 B는 각각 징역 8년의 실형을, 중간관리자와 보이스피싱 상담원 등 조직원 56명에게는 집행유예부터 징역 7년의 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 중국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국경을 넘어 범행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국가 간 공조나 협력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죄질이 심각하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대규모 검거 작전이 막을 내린 순간이다.
이 사건으로 담당 경찰 1명이 경감으로 특진했고, 2명이 경찰청장 표창을 받았다.
'제주 타이완 보이스피싱 콜센터 사건'은 여전히 경찰 내부에서 보이스피싱 검거에 획을 그은 사건으로 회자 되고 있다.
■ "국제수사범죄 부서 확대해야"
이인상 차장은 타이완 콜센터 사건에 대해 "국가 공조는 나라 간 법적 절차나 제도, 관습과 성향에 따라 협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이 사건은 범죄자들이 이런 부분을 악용한 범죄"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국제 공조 수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질 것이라며 국제범죄수사 부서의 확대도 언급했다.
이 차장은 "국가수사본부 체제가 되면서 국제범죄수사대가 마약수사대 밑으로 들어가 국제범죄수사팀으로 축소됐다"며 "빠른 시일 내에 국제범죄수사부, 국제범죄수사국이 신설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제도와 협약만 맺었다고 보이스피싱이 근절될 수 없다"며 "실질적인 국가 간 공조를 통해 경찰이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스피싱은 다른 나라 수사 기관의 협력 의지가 없으면 검거부터 송환에 이르기까지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차장은 콜센터 검거 사례가 타이완 경찰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한 것처럼, 다른 국가 수사기관과의 관계 형성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어느 기관에서도 돈 요구하지 않아"
보이스피싱 수법은 매해 바뀌고 있다. 계좌 지급 정지와 30분 지연 인출 제도 등 전화사기에 대한 예방책이 나오자 이제는 직접 만나 돈을 건네받는 대면편취형 범행이 유행하고 있다.
지난 6월 제주에서 금융회사 직원을 가장해 피해자 3명으로부터 현금 1억 원 상당을 가로챈 현금수거책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발생한 제주지역 보이스피싱 372건 가운데 계좌 이체형은 104건(28%), 대면 편취형은 204건(54%)에 달한다. 수법이 진화하며 이 기간 제주에서만 72억 원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제주경찰청은 대면 편취형 추적 수사팀 11명을 증원해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계좌 이체 전 수거책을 잡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올해 4~8월 제주에서 발생한 대면편취형 사건은 76건으로,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1명의 수거책이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윗선 검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차장은 "신속한 검거 이면에는 형사들의 노고가 있다"며 "상선 추적을 위해 수사부서에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차장은 평생 힘들게 모은 돈을 빼앗아 가는 보이스피싱은 강력사건만큼 죄질이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가 4년 전에도, 현재에도 보이스피싱 검거에 주력하는 이유다.
이 차장은 지난달 보이스피싱 피의자 검거를 통한 금융사기 예방 공로로 신한금융그룹으로부터 희망영웅상을 받았다.
이 차장은 "절도나 강도는 본인이 예방할 수 없지만, 보이스피싱은 본인 노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며 "경찰, 검찰, 금융위 등 대한민국 어느 정부 기관에서도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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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전 그날…외국 조폭이 제주에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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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9-24 07:00:31
■ 영화 속 '보이스피싱 콜센터'…이미 4년 전 제주에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받아본 경험이 있는 보이스피싱 전화. 도대체 어디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이런 전화를 거는 것인지, 찾아가서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지난 15일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 '보이스' 역시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든 보이스피싱의 발신지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전직 형사 서준은 보이스피싱 전화로 딸의 병원비와 아파트 중도금을 잃은 건설현장 동료들을 위해 중국에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잠입한다.
개인정보 수집과 인출책 섭외, 환전소 작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보이스피싱 일당의 범죄 행태를 보며 서준은 할 말을 잃는다.
이처럼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 같지만, 이미 4년 전 제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타이완 조폭이 한국인과 공모해 제주도에 콜센터를 차려 중국인을 상대로 보이스피싱을 한, 일명 '제주 타이완 보이스피싱 콜센터 사건' 이다.
당시 서울청 외사과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던 이인상 제주경찰청 차장은 "국내에서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적발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검거된 범인들은 모두 재판에 넘겨져 현재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 4년 전 그날…타이완 조폭이 한국에 콜센터 차려 보이스피싱
2017년 12월 20일. 경찰과 소방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 등 120명이 제주도 빌라 2개 동을 동시에 급습한다.
타이완(대만) 조폭이 한국인과 공모해 제주도에서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첩보가 접수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건물 출입구와 호실을 강제 개방해 현장에서 타이완인과 중국인 등 58명을 검거했다.
빌라 건물 301호와 502호에서는 범인들이 보이스피싱 시나리오 등을 파쇄하고 있었고, 일부 범인은 서류를 소각하다 붙잡히기도 했다. 범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 타이완 조폭은 왜 제주도를 택했나
타이완 타이중 지역의 폭력조직 '금오C파(金敖C派)' 두목의 직계 부하였던 A는 일본과 터키 등에서 콜센터를 차려 현지 중국인을 상대로 보이스피싱을 시도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완 수사당국에 수배되자 다른 국가를 물색했고, 한국에 있는 제주도를 선택한다.
제주는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한 무사증제도 때문에 조직원을 대규모로 손쉽게 데려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A는 과거 필리핀에서 가이드 일을 하며 알게 된 한국인 총책 B에게 연락해 범행을 공모한다.
B는 자신의 여자친구 명의로 제주도에 있는 월세 1,200만 원 상당의 빌라(17세대)를 임대하고, 인터넷과 전화 설치를 비롯해 차량 렌트와 범죄수익 계좌 등을 준비하며 A와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다.
콜센터 설치를 마친 이들은 게임방 채팅과 SNS 등을 통해 타이완과 중국 조직원을 제주도로 모집했다.
중간 관리자는 조직원들에게 보이스피싱 범행 시나리오를 교육하고, 조직원들의 여권과 핸드폰을 건네 받아 조직을 이탈하거나 외부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콜센터는 총책을 필두로 중간관리자와 3개 조로 나뉘어 운영됐다. 내부에는 보이스피싱 상담원을 비롯해 식사 제공자와 청소 담당 등도 있었다.
이들은 내부 행동지침까지 마련해 경찰에 단속되면 증거를 불태우고,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다고 진술하기로 하는 등 대응책도 마련했다.
관리자급 조직원은 상담원들의 실적을 관리하며 매월 일정한 월급을 챙겼고, 상담원들은 성과에 따라 보이스피싱 성공금액의 5~8%를 받기로 하고 범행에 나섰다.
■ 중국인 피싱 이유는 '공안에 대한 두려움'
'고객님의 휴대전화가 정지될 예정입니다. 8번을 누르시면 고객센터로 연결됩니다.'
이들은 현지 중국인들에게 전화해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전화를 유도했다.
중국통신회사 직원을 사칭한 상담원들은 '전화 요금이 연체됐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아 공안국에 연결해 드리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중국인들이 공안에 느끼는 두려움을 이용한 것이다.
이들은 피해자가 공안 사칭에 넘어가면 '자금세탁 범죄에 연루됐다'며 겁을 준 뒤 '결백을 증명하고 싶으면 계좌로 돈을 송금하라'고 속여 피해금을 뜯어냈다.
이 과정에서 위조한 중국 공안 신분증을 이용했다. 연락은 국가 간 경계가 없는 인터넷 전화(VoIP) 프로그램인 브리아(Bria)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현장에서 압수한 장부 등을 토대로 이들이 한 달간 4억 7,000만 원 상당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보고, 실제 수십억 원을 빼돌린 것으로 추정했다.
■ IP주소에서 시작된 대규모 검거 작전
검거의 단초는 타이완 경찰이 한국 경찰에게 보낸 A의 IP 주소였다.
총책 A를 쫓고 있던 타이완 경찰은 A가 2017년 3월부터 5월까지 33명의 사람을 일본 보이스피싱 콜센터로 보낸 사실을 확인한다.
이후 SNS를 추적해 A가 그해 6월과 7월 한국에서 접속한 기록을 확인했다.
타이완 경찰은 한국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서울청 외사과 직원이 A의 인터넷 접속 기록을 바탕으로 추적에 나섰다.
경찰은 총책의 IP 접속 기록이 서울 모 호텔과 제주도 모 빌라로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고, 제주를 오간 항공편 탑승객과 SNS 계정 등을 보강 수사해 A와 B의 관계도 특정한다.
이후 잠복 등 현장 조사를 벌여 대규모 검거 작전을 펼친다.
경찰은 건물 내부에서 범행에 사용된 휴대전화 158대와 노트북 14대, 시나리오 멘트, 근무일지, 수익 장부, 공안 신분증, 공안을 사칭할 때 활용한 전화배경음악 자료 등을 압수한다.
동시에 서울에 있던 타이완 총책 A와 한국인 총책 B 씨 등을 체포한다.
■ 조직원 58명 구속됐지만 범행 부인…차고 넘치는 증거
검거 사흘 뒤 조직원 58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증거를 찾는 데 주력했다. 산업기술유출수사팀(산기팀)은 디지털증거 분석을, 금융팀은 계좌 추적을, 나머지는 피해자 확보에 나섰다.
산기팀은 중국어로 된 컴퓨터 운영체제와 휴대전화를 분석하며 증거를 모았다.
압수된 컴퓨터에는 단속에 대비해 암호화 기능인 '비트로커(BitLocker)'가 설정돼 있었지만, 경찰은 분석 끝에 내부 자료를 확보했고, 범인들이 녹음파일을 틀어 피해자들을 속인 사실을 확인했다.
또 포렌식을 통해 수익 장부를 확보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아이폰 120대를 분석해 안에 있던 엄청난 양의 녹음 자료도 입수했다.
하지만 피해자 확보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한국경찰이라고 설명해도 보이스피싱으로 생각해 전화를 끊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경찰은 수 십여 차례 통화 시도 끝에 10명의 피해자를 간신히 확보했다. 피해자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 당초 예상했던 피해 금액도 수십억 원에서 1억 7천여만 원으로 줄었다.
일부 범인들은 마지막까지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을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며 범행을 부인했지만 증거는 이미 차고 넘쳤다.
경찰은 방대한 수사 끝에 범행이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사기와 전기통신금융사기 특별법 대신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다. 조직원들은 전원 기소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은 A와 B는 각각 징역 8년의 실형을, 중간관리자와 보이스피싱 상담원 등 조직원 56명에게는 집행유예부터 징역 7년의 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 중국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국경을 넘어 범행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국가 간 공조나 협력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죄질이 심각하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대규모 검거 작전이 막을 내린 순간이다.
이 사건으로 담당 경찰 1명이 경감으로 특진했고, 2명이 경찰청장 표창을 받았다.
'제주 타이완 보이스피싱 콜센터 사건'은 여전히 경찰 내부에서 보이스피싱 검거에 획을 그은 사건으로 회자 되고 있다.
■ "국제수사범죄 부서 확대해야"
이인상 차장은 타이완 콜센터 사건에 대해 "국가 공조는 나라 간 법적 절차나 제도, 관습과 성향에 따라 협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이 사건은 범죄자들이 이런 부분을 악용한 범죄"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국제 공조 수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질 것이라며 국제범죄수사 부서의 확대도 언급했다.
이 차장은 "국가수사본부 체제가 되면서 국제범죄수사대가 마약수사대 밑으로 들어가 국제범죄수사팀으로 축소됐다"며 "빠른 시일 내에 국제범죄수사부, 국제범죄수사국이 신설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제도와 협약만 맺었다고 보이스피싱이 근절될 수 없다"며 "실질적인 국가 간 공조를 통해 경찰이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스피싱은 다른 나라 수사 기관의 협력 의지가 없으면 검거부터 송환에 이르기까지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차장은 콜센터 검거 사례가 타이완 경찰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한 것처럼, 다른 국가 수사기관과의 관계 형성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어느 기관에서도 돈 요구하지 않아"
보이스피싱 수법은 매해 바뀌고 있다. 계좌 지급 정지와 30분 지연 인출 제도 등 전화사기에 대한 예방책이 나오자 이제는 직접 만나 돈을 건네받는 대면편취형 범행이 유행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발생한 제주지역 보이스피싱 372건 가운데 계좌 이체형은 104건(28%), 대면 편취형은 204건(54%)에 달한다. 수법이 진화하며 이 기간 제주에서만 72억 원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제주경찰청은 대면 편취형 추적 수사팀 11명을 증원해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계좌 이체 전 수거책을 잡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다.
올해 4~8월 제주에서 발생한 대면편취형 사건은 76건으로,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1명의 수거책이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윗선 검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차장은 "신속한 검거 이면에는 형사들의 노고가 있다"며 "상선 추적을 위해 수사부서에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차장은 평생 힘들게 모은 돈을 빼앗아 가는 보이스피싱은 강력사건만큼 죄질이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가 4년 전에도, 현재에도 보이스피싱 검거에 주력하는 이유다.
이 차장은 지난달 보이스피싱 피의자 검거를 통한 금융사기 예방 공로로 신한금융그룹으로부터 희망영웅상을 받았다.
이 차장은 "절도나 강도는 본인이 예방할 수 없지만, 보이스피싱은 본인 노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며 "경찰, 검찰, 금융위 등 대한민국 어느 정부 기관에서도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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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영 기자 mjy@kbs.co.kr
문준영 기자의 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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