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바친 회사인데…2년 걸린 ‘혈관 질환’ 산재 인정

입력 2021.09.25 (07: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방산 회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을 박성부 씨.방산 회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을 박성부 씨.

■ 21년 6개월 동안 일했던 회사...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

올해 61살인 박성부 씨는 4년 전인 2017년 한 병원에서 시행한 혈액검사를 통해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을 받았습니다. '무형성 빈혈'은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가 손상돼 건강한 혈액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질환입니다.

박 씨는 '무형성 빈혈' 때문에 계단을 오르기도 어렵고, 특히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이동할 때 어지럼증이 심해 넘어질까 봐 벽을 짚고 다녀야 합니다. 당연히 증상이 심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 생계도 어려워졌는데요. 박 씨는 취재진과 대화를 하는 내내 아직 20대 초중반밖에 되지 않는 두 자녀의 앞날을 걱정했습니다.

박 씨는 1996년부터 '무형성 빈혈'을 진단받았던 2017년 7월까지 21년 6개월 동안 예전 한화테크윈이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공장에서 일했는데요. 박 씨는 블레이드 가공부서와 특수가공 열처리반에서 일하며 절삭유 연기와 세척제 등에 오래 노출된 게 '무형성 빈혈'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박 씨가 취급한 화학물질이 '무형성 빈혈'과 의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사례가 없고, 작업방식과 노출 기간 등을 고려하면 특정 질환을 유발할 수준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요.

박 씨는 젊음을 다 바친 회사가 이제 와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모른척한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참다 못한 박 씨는 2년여 전인 2019년 7월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습니다.

박 씨는 생계가 어려워 노무사 등의 도움도 없이 혼자 자료를 준비해 산재를 신청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한 직업환경의학과의원이 박 씨의 질환과 업무가 관련성이 있다고 진단한 평가서.한 직업환경의학과의원이 박 씨의 질환과 업무가 관련성이 있다고 진단한 평가서.

■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작업 현장에서 발암물질 노출"

박 씨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는 2년 동안 계속됐는데요.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선 직업환경연구원은 해당 사업장을 방문하고, 관련 자료를 입수해 검토한 결과, 업무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직업환경연구원은 박 씨가 일했던 모든 작업 현장에서 벤젠 등 발암물질의 노출량이 적어 무형성 빈혈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는데요. 하지만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박 씨가 오랜 기간 기계 가공작업을 하며, 무형성 빈혈의 직업적 위험요인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조혈기계암의 유발 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특히 위원회는 객관적인 근거는 다소 부족하지만 2000년도 이전에 벤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포름알데히드를 섞어서 사용했던 과거의 작업 환경을 고려하면 박 씨가 장기간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봤습니다.

위원회에 소속된 다수의 위원이 박 씨의 질환과 업무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박 씨가 산재 신청을 한 지 2년여 만에 나온 결과입니다.


■ 방위산업체에서 40년 일한 60대 퇴직 노동자도 산재 인정

1978년부터 40년 동안 자주포 등을 만든 다른 60대 노동자 A씨도 혈액세포가 줄어드는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산재를 인정받았습니다. A씨 역시 한화의 방산 자회사에서 일했었는데, 용접과 세척, 도장 작업 등을 하며 벤젠 등의 화학물질에 노출됐습니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는 A씨가 40년 동안 일을 하며, 표면처리 도장 작업과 석유계 화학물질이 섞인 세척제를 사용해 작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벤젠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박 씨와 A씨의 사례 모두 워낙 오래전의 작업 환경이 문제가 없었는지 밝혀내는 게 중요했습니다. 수십 년 전의 작업 현장에서 쓰인 화학물질을 모두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었는데요. 그러나 위원회는 당시에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질환이 업무와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며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벤젠 등에 대한 사용 규제가 강화되기 전인 2000년대 이전의 금속제조공정에서 장기간 작업을 한 노동자들이 혈액 관련 질환을 앓는다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상당 부분 인정한 겁니다.

이 두 퇴직 노동자가 앓고 있는 무형성 빈혈과 골수이형성증후군은 모두 백혈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질환입니다.

노동계는 두 질환이 일반적인 환경에서 발병할 확률이 낮은 만큼 쇠공장과 같은 작업 현장에서 사용한 발암물질이 섞인 화확제품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특히 도장과 금속 가공 작업 등을 하던 노동자가 혈액 이상 증상을 보이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젊음 바친 회사인데…2년 걸린 ‘혈관 질환’ 산재 인정
    • 입력 2021-09-25 07:00:06
    취재K
방산 회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을 박성부 씨.
■ 21년 6개월 동안 일했던 회사...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

올해 61살인 박성부 씨는 4년 전인 2017년 한 병원에서 시행한 혈액검사를 통해 '특발성 무형성 빈혈' 판정을 받았습니다. '무형성 빈혈'은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가 손상돼 건강한 혈액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질환입니다.

박 씨는 '무형성 빈혈' 때문에 계단을 오르기도 어렵고, 특히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이동할 때 어지럼증이 심해 넘어질까 봐 벽을 짚고 다녀야 합니다. 당연히 증상이 심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 생계도 어려워졌는데요. 박 씨는 취재진과 대화를 하는 내내 아직 20대 초중반밖에 되지 않는 두 자녀의 앞날을 걱정했습니다.

박 씨는 1996년부터 '무형성 빈혈'을 진단받았던 2017년 7월까지 21년 6개월 동안 예전 한화테크윈이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공장에서 일했는데요. 박 씨는 블레이드 가공부서와 특수가공 열처리반에서 일하며 절삭유 연기와 세척제 등에 오래 노출된 게 '무형성 빈혈'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박 씨가 취급한 화학물질이 '무형성 빈혈'과 의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사례가 없고, 작업방식과 노출 기간 등을 고려하면 특정 질환을 유발할 수준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요.

박 씨는 젊음을 다 바친 회사가 이제 와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모른척한다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참다 못한 박 씨는 2년여 전인 2019년 7월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습니다.

박 씨는 생계가 어려워 노무사 등의 도움도 없이 혼자 자료를 준비해 산재를 신청했다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한 직업환경의학과의원이 박 씨의 질환과 업무가 관련성이 있다고 진단한 평가서.
■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작업 현장에서 발암물질 노출"

박 씨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는 2년 동안 계속됐는데요.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선 직업환경연구원은 해당 사업장을 방문하고, 관련 자료를 입수해 검토한 결과, 업무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직업환경연구원은 박 씨가 일했던 모든 작업 현장에서 벤젠 등 발암물질의 노출량이 적어 무형성 빈혈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는데요. 하지만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박 씨가 오랜 기간 기계 가공작업을 하며, 무형성 빈혈의 직업적 위험요인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조혈기계암의 유발 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특히 위원회는 객관적인 근거는 다소 부족하지만 2000년도 이전에 벤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포름알데히드를 섞어서 사용했던 과거의 작업 환경을 고려하면 박 씨가 장기간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봤습니다.

위원회에 소속된 다수의 위원이 박 씨의 질환과 업무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박 씨가 산재 신청을 한 지 2년여 만에 나온 결과입니다.


■ 방위산업체에서 40년 일한 60대 퇴직 노동자도 산재 인정

1978년부터 40년 동안 자주포 등을 만든 다른 60대 노동자 A씨도 혈액세포가 줄어드는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산재를 인정받았습니다. A씨 역시 한화의 방산 자회사에서 일했었는데, 용접과 세척, 도장 작업 등을 하며 벤젠 등의 화학물질에 노출됐습니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는 A씨가 40년 동안 일을 하며, 표면처리 도장 작업과 석유계 화학물질이 섞인 세척제를 사용해 작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벤젠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박 씨와 A씨의 사례 모두 워낙 오래전의 작업 환경이 문제가 없었는지 밝혀내는 게 중요했습니다. 수십 년 전의 작업 현장에서 쓰인 화학물질을 모두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었는데요. 그러나 위원회는 당시에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질환이 업무와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며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벤젠 등에 대한 사용 규제가 강화되기 전인 2000년대 이전의 금속제조공정에서 장기간 작업을 한 노동자들이 혈액 관련 질환을 앓는다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상당 부분 인정한 겁니다.

이 두 퇴직 노동자가 앓고 있는 무형성 빈혈과 골수이형성증후군은 모두 백혈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질환입니다.

노동계는 두 질환이 일반적인 환경에서 발병할 확률이 낮은 만큼 쇠공장과 같은 작업 현장에서 사용한 발암물질이 섞인 화확제품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특히 도장과 금속 가공 작업 등을 하던 노동자가 혈액 이상 증상을 보이면 업무와의 연관성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