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에도 현역처럼’…‘흑인·여성’ 편견 맞서온 美 할머니들

입력 2021.09.2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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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생일'을 맞이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수명연장으로 100세 시대가 현실화되며 이같은 질문이 꼭 공허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100세가 아직 돼 보지 못했으니, '100세 생일'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지난 2014년 개봉된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입니다. 전 세계 8백만 부나 팔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요.

주인공은 100세 생일을 앞둔 스웨덴인 알란 할아버지입니다. 알란 할아버지는 복지선진국 스웨덴답게 요양시설에서 별 탈 없이 노년을 보내고 있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에 지쳐갑니다. 요양원 관계자들이 할아버지의 100세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 할아버지가 결국 창문 넘어 탈출을 감행하면서 '모험'은 시작됩니다.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00세의 모험, 꼭 영화 속 일만은 아닙니다. '현실 100세'의 모험과 도전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100세에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두 명의 미국 할머니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치먼드 '리벳공 로지 국립역사공원' 관리대원으로 활동 중인 베티 리드 소스킨 할머니인데요. '리벳공 로지'는 2차대전 때 전장에 투입된 남성을 대신해 공장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한 여성들을 말합니다.

전쟁의 역사적 기록이 주로 남성의 역할에 치중해 조명되다 보니, 그 그늘에 가려진 여성들의 모습을 잘 알리자는 취지에서 리벳공 로지 국립역사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 공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지난 2000년부터 했습니다. 100세 생일을 맞이한 지난 22일 할머니는 "열정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열정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계속 국립공원 관리대원으로 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할머니 이름을 딴 중학교 앞에서 100세 생일 기념사진을 찍은 베티 리드 소스킨 할머니할머니 이름을 딴 중학교 앞에서 100세 생일 기념사진을 찍은 베티 리드 소스킨 할머니

사실 소스킨 할머니가 '리벳공 로지 알리기 역사사업'에 전념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전시 군수 사업과 관련해 당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만들어냈던 일들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훗날 유명해진 것처럼, 전쟁의 뒷면에 감춰진 건 '여성'만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역시 그렇다는 것을 직접 느꼈던 것입니다.

1921년 9월 22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태생인 할머니는 흑인입니다. 소스킨 할머니가 갓 스무 살을 넘긴 1942년 할머니는 전쟁 물품을 납품하는 군수공장 여공으로 고용됐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곧 일을 그만둡니다. 당시 공장은 서류 채용을 했는데, 담당 관리자가 할머니를 백인으로 착각해 뽑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여러 가지 차별들로 인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스킨 할머니는 "리벳공 로지하면 주로 백인 여성만 떠올리는데, 전시 군수 사업에 참여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고 밝혔습니다. 100세의 나이에도 리벳공 로지를 알리는 국립공원에서 관리대원으로 일하는 열정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할머니의 노력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할머니는 2015년 백악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에 초청받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100세의 모험을 평생 일한 바다에서 지켜나가는 한 할머니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28년부터 101세인 2021년 지금까지 미국 메인주 록랜드시 해안에서 랍스터 어획을 하는 버지니아 올리버 할머니인데요. 매년 5월부터 11월까지 랍스터 수확 시기가 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바닷가로 갑니다.

101세에도 랍스터잡이를 하는 버지니아 올리버 할머니101세에도 랍스터잡이를 하는 버지니아 올리버 할머니

올리버 할머니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8살 때부터 랍스터잡이 배에 탔고, 남편과 결혼 후에도 같은 일을 이어갔으며, 이제는 78살의 아들과 함께 랍스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할머니와 랍스터잡이를 하는 아들 막스 씨는 "어머니의 체력과 직업의식은 정말 훌륭하다"며 "때때로 어머니가 잔소리해 힘들 때도 있지만, 어머니는 나의 상사"라고 말했습니다.

바닷일이 힘들고 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처음 랍스터잡이 일을 했을 때부터 여자는 나뿐이었다"며 "이 일을 좋아하고 바다와 함께 하는 일도 좋아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할머니는 주로 잡아 올린 랍스터의 무게와 크기 등을 재고 랍스터 집게에 밴드를 묶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크기가 작은 랍스터를 확인해 바다에 풀어주는 것도 할머니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할머니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호'는 올해도 랍스터 수확 철인 11월까지는 매일같이 메인주 해안을 누빌 예정입니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20여 년 먼저 진행된 미국에서 100세 할머니들의 모험 이야기가 주목받는 뉴스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100세 열전'을 전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60~70대는 노인 축에도 못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더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100세'가 많아지려면 건강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재정도 어느 정도 해결돼야 할텐데, 우리나라의 100세 노인들도 과연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2018년 기준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3.4%로, OECD 평균의 3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인 인구는 지난해 80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6%를 차지했고, 2025년이면 1,000만 명을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통한 소득 창출, 사회보험과 같은 노인 복지 문제가 또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100세 할머니들 이야기를 접하며,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노인 인구 수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인생의 건강한 모험을 즐기는 100세 노인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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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세에도 현역처럼’…‘흑인·여성’ 편견 맞서온 美 할머니들
    • 입력 2021-09-27 07:01:55
    취재K
'100세 생일'을 맞이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수명연장으로 100세 시대가 현실화되며 이같은 질문이 꼭 공허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100세가 아직 돼 보지 못했으니, '100세 생일'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지난 2014년 개봉된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입니다. 전 세계 8백만 부나 팔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요.

주인공은 100세 생일을 앞둔 스웨덴인 알란 할아버지입니다. 알란 할아버지는 복지선진국 스웨덴답게 요양시설에서 별 탈 없이 노년을 보내고 있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에 지쳐갑니다. 요양원 관계자들이 할아버지의 100세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 할아버지가 결국 창문 넘어 탈출을 감행하면서 '모험'은 시작됩니다.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00세의 모험, 꼭 영화 속 일만은 아닙니다. '현실 100세'의 모험과 도전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100세에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두 명의 미국 할머니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치먼드 '리벳공 로지 국립역사공원' 관리대원으로 활동 중인 베티 리드 소스킨 할머니인데요. '리벳공 로지'는 2차대전 때 전장에 투입된 남성을 대신해 공장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한 여성들을 말합니다.

전쟁의 역사적 기록이 주로 남성의 역할에 치중해 조명되다 보니, 그 그늘에 가려진 여성들의 모습을 잘 알리자는 취지에서 리벳공 로지 국립역사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 공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지난 2000년부터 했습니다. 100세 생일을 맞이한 지난 22일 할머니는 "열정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열정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계속 국립공원 관리대원으로 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할머니 이름을 딴 중학교 앞에서 100세 생일 기념사진을 찍은 베티 리드 소스킨 할머니
사실 소스킨 할머니가 '리벳공 로지 알리기 역사사업'에 전념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전시 군수 사업과 관련해 당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만들어냈던 일들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훗날 유명해진 것처럼, 전쟁의 뒷면에 감춰진 건 '여성'만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역시 그렇다는 것을 직접 느꼈던 것입니다.

1921년 9월 22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태생인 할머니는 흑인입니다. 소스킨 할머니가 갓 스무 살을 넘긴 1942년 할머니는 전쟁 물품을 납품하는 군수공장 여공으로 고용됐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곧 일을 그만둡니다. 당시 공장은 서류 채용을 했는데, 담당 관리자가 할머니를 백인으로 착각해 뽑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여러 가지 차별들로 인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스킨 할머니는 "리벳공 로지하면 주로 백인 여성만 떠올리는데, 전시 군수 사업에 참여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고 밝혔습니다. 100세의 나이에도 리벳공 로지를 알리는 국립공원에서 관리대원으로 일하는 열정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할머니의 노력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할머니는 2015년 백악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에 초청받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100세의 모험을 평생 일한 바다에서 지켜나가는 한 할머니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28년부터 101세인 2021년 지금까지 미국 메인주 록랜드시 해안에서 랍스터 어획을 하는 버지니아 올리버 할머니인데요. 매년 5월부터 11월까지 랍스터 수확 시기가 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바닷가로 갑니다.

101세에도 랍스터잡이를 하는 버지니아 올리버 할머니
올리버 할머니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8살 때부터 랍스터잡이 배에 탔고, 남편과 결혼 후에도 같은 일을 이어갔으며, 이제는 78살의 아들과 함께 랍스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할머니와 랍스터잡이를 하는 아들 막스 씨는 "어머니의 체력과 직업의식은 정말 훌륭하다"며 "때때로 어머니가 잔소리해 힘들 때도 있지만, 어머니는 나의 상사"라고 말했습니다.

바닷일이 힘들고 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처음 랍스터잡이 일을 했을 때부터 여자는 나뿐이었다"며 "이 일을 좋아하고 바다와 함께 하는 일도 좋아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할머니는 주로 잡아 올린 랍스터의 무게와 크기 등을 재고 랍스터 집게에 밴드를 묶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크기가 작은 랍스터를 확인해 바다에 풀어주는 것도 할머니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할머니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호'는 올해도 랍스터 수확 철인 11월까지는 매일같이 메인주 해안을 누빌 예정입니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20여 년 먼저 진행된 미국에서 100세 할머니들의 모험 이야기가 주목받는 뉴스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100세 열전'을 전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60~70대는 노인 축에도 못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더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100세'가 많아지려면 건강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재정도 어느 정도 해결돼야 할텐데, 우리나라의 100세 노인들도 과연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2018년 기준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3.4%로, OECD 평균의 3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인 인구는 지난해 80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6%를 차지했고, 2025년이면 1,000만 명을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통한 소득 창출, 사회보험과 같은 노인 복지 문제가 또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100세 할머니들 이야기를 접하며,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노인 인구 수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인생의 건강한 모험을 즐기는 100세 노인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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