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기자들Q] ‘오역’으로 잃어가는 신뢰

입력 2021.10.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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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적으로 양산되는 국제뉴스 '오역' 보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함락한 직후, 미군의 급한 철군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관심은 자연스레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의 행방으로 모아졌습니다. '100조 군사자산 탈레반 손아귀로', '97조 원어치 미군 무기 줍줍', '블랙호크 등 100조 원 美 무기 탈레반 손에' 등 잇따라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도 쏟아져나왔습니다. 국내 언론들은 100조 원의 출처에 대해 미국 통신사 AP가 보도했고 백악관도 발표했다고 전했습니다.

AP 통신 8월 17일 자 기사에 우리 돈 약 100조 원으로 환산할 수 있는 830억 달러가 언급된 것은 맞지만, 이는 지난 20년간 아프간군과 경찰을 창설하고 유지하는데 들인 유무형의 전체 예산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미군 무기와 관련한 질의 응답이 오간 건 맞지만 역시 구체적인 액수가 오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모든 군사 물자가 어디로 간 것인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고 있고 다만 상당한 규모가 탈레반 손에 넘어간 것은 맞다."라고 언급했을 뿐입니다.

결국, 탈레반이 미군 무기 100조 원어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국내 언론사들의 쌍둥이 보도들은, 확인도 없는 베껴 쓰기 기사가 빚어낸 무더기 오보였던 셈이 확인됐습니다.

■엉터리 번역 난무... 자격 미달 국제뉴스 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는 수상 소감으로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동시에 윤 씨의 영어 소감을 국내 일부 언론이 번역해 전한 내용은 논란을 빚었습니다. 윤 씨가 "I don't admire Hollywood"라고 말한 것을 "나는 할리우드를 존경하지 않는다" 로 해석해 전한 언론들이 있었는데, '동경하지 않는다' 혹은 '선망하지 않는다' 정도가 적절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국내 언론의 크고 작은 외국어 번역 오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등은 그나마 상황이 낫습니다. 언론사의 기자들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언어들인 데다, 해당 언어에 능통한 시청자나 구독자가 많아 기사로 활용할 때 더욱 정교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랍어나 러시아어 등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더욱 낯선 언어들이 기사에 사용될 때 더 많은 실수와 오보가 생깁니다. 오류를 알아채는 시청자나 구독자 역시 더 드물 것이라는 점도 감안하면, 실제 빚어지는 오보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국제부 경험이 있는 한 방송사 기자 최 모 씨는 "아랍어나 러시아어로 된 인터뷰를 외신으로 받아 사용할 경우, 이를 영어로 번역한 내용을 제공받는 경우가 많아 해당 언어를 다시 한국어로 재번역하는 상황에서 실수가 잦다." 고 말했습니다. 영문 해석을 보고 인터뷰 내용을 적더라도 정작 원어의 해당 내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최 씨는 "번역을 지어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더라도 잘 알려진 언어가 아닌 경우, 알아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고 털어놨습니다.

또 다른 방송사 기자 김 모 씨는 "요즘엔 그나마 번역기가 있어 예전보다 나아진 면은 있지만, 기사에 활용한 번역이 틀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또 "기자가 쓴 기사에 대한 데스킹 과정이 이뤄지는 것은 맞지만, 뉘앙스에 대한 확인 차원일 뿐 언어 번역에 대한 치밀한 데스킹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습니다.

■ 강대국 시각에 갇힌 국내 언론의 국제 뉴스

오역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8월 말 가자 지구에선,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일이 있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전문 온라인 매체 '더 일렉트로닉 인티파다' 등에 따르면, 13세 팔레스타인 소년 오마르는 8월 21일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에 있다 목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오마르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진 뒤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현지 언론은 오마르가 숨지면서, 가자 지구 일대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 수가 올해 들어서만 무려 73명에 이른다고 보도했습니다.


특정 국가의 어린이가, 1년도 안 된 짧은 기간 동안, 군에 의해 무더기로 세상을 떠났는데도 언론은 왜 이 소식을 전하는데 소극적이었을까요? 만약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아닌 이스라엘 어린이, 혹은 미국 어린이의 비보였다면 어땠을까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사태를 다루는 언론 보도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당위성과 관련한 보도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이 저항하는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한 보도는 한참 부족하다는 비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 언론에서 쓰이는 국제 뉴스의 상당수가 외신에 의존하는 데 따른 것입니다. < 질문하는 기자들 Q>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보도들의 외신 인용 현황을 분석해봤습니다. 이스라엘이 7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을 대대적으로 공습한 지난 5월 한 달 동안 국내 10개 종합 일간지와 연합뉴스 등 541건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541건의 기사에 외신 인용은 809번 등장했는데, 그 비율을 보면 국내 뉴스에서 팔레스타인 시각의 보도를 찾기 어려운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73.4%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언론 매체를 인용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언론 매체를 인용한 비율은 11.6%였습니다. 반면 팔레스타인 매체를 인용한 비율은 2.4%에 그쳤습니다.

백승훈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위원은 "여러 사안과 관련한 공론의 장에 특정 국가의 틀이 씌워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국익 극대화에 상당한 제한이 된다. 대한민국은 더이상 다양한 국제 이슈에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의견에 편승하는 것만으로는 대응이 쉽지 않은 상황이 됐으며 그것이 우리의 시각으로 국제 문제를 다뤄야만 하는 이유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오역'으로 잃어가는 신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일(일) 밤 10시 35분에 KBS 1TV <질문하는 기자들 Q> 1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솔희 KBS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김나나 KBS 기자가 출연합니다. 2부에선 동네사람들을 이어주는 '공동체라디오'의 미래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질문하는 기자들 Q> 다시 보기는 KBS 홈페이지유튜브 계정에서 가능합니다.
▲ 프로그램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193
▲ 유튜브 계정 <질문하는 기자들 Q>: www.youtube.com/c/질문하는기자들Q/fea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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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문하는 기자들Q] ‘오역’으로 잃어가는 신뢰
    • 입력 2021-10-02 10:00:09
    취재K

■ 주기적으로 양산되는 국제뉴스 '오역' 보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함락한 직후, 미군의 급한 철군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관심은 자연스레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의 행방으로 모아졌습니다. '100조 군사자산 탈레반 손아귀로', '97조 원어치 미군 무기 줍줍', '블랙호크 등 100조 원 美 무기 탈레반 손에' 등 잇따라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도 쏟아져나왔습니다. 국내 언론들은 100조 원의 출처에 대해 미국 통신사 AP가 보도했고 백악관도 발표했다고 전했습니다.

AP 통신 8월 17일 자 기사에 우리 돈 약 100조 원으로 환산할 수 있는 830억 달러가 언급된 것은 맞지만, 이는 지난 20년간 아프간군과 경찰을 창설하고 유지하는데 들인 유무형의 전체 예산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미군 무기와 관련한 질의 응답이 오간 건 맞지만 역시 구체적인 액수가 오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모든 군사 물자가 어디로 간 것인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고 있고 다만 상당한 규모가 탈레반 손에 넘어간 것은 맞다."라고 언급했을 뿐입니다.

결국, 탈레반이 미군 무기 100조 원어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국내 언론사들의 쌍둥이 보도들은, 확인도 없는 베껴 쓰기 기사가 빚어낸 무더기 오보였던 셈이 확인됐습니다.

■엉터리 번역 난무... 자격 미달 국제뉴스 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는 수상 소감으로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동시에 윤 씨의 영어 소감을 국내 일부 언론이 번역해 전한 내용은 논란을 빚었습니다. 윤 씨가 "I don't admire Hollywood"라고 말한 것을 "나는 할리우드를 존경하지 않는다" 로 해석해 전한 언론들이 있었는데, '동경하지 않는다' 혹은 '선망하지 않는다' 정도가 적절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국내 언론의 크고 작은 외국어 번역 오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등은 그나마 상황이 낫습니다. 언론사의 기자들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언어들인 데다, 해당 언어에 능통한 시청자나 구독자가 많아 기사로 활용할 때 더욱 정교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랍어나 러시아어 등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더욱 낯선 언어들이 기사에 사용될 때 더 많은 실수와 오보가 생깁니다. 오류를 알아채는 시청자나 구독자 역시 더 드물 것이라는 점도 감안하면, 실제 빚어지는 오보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국제부 경험이 있는 한 방송사 기자 최 모 씨는 "아랍어나 러시아어로 된 인터뷰를 외신으로 받아 사용할 경우, 이를 영어로 번역한 내용을 제공받는 경우가 많아 해당 언어를 다시 한국어로 재번역하는 상황에서 실수가 잦다." 고 말했습니다. 영문 해석을 보고 인터뷰 내용을 적더라도 정작 원어의 해당 내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최 씨는 "번역을 지어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더라도 잘 알려진 언어가 아닌 경우, 알아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고 털어놨습니다.

또 다른 방송사 기자 김 모 씨는 "요즘엔 그나마 번역기가 있어 예전보다 나아진 면은 있지만, 기사에 활용한 번역이 틀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또 "기자가 쓴 기사에 대한 데스킹 과정이 이뤄지는 것은 맞지만, 뉘앙스에 대한 확인 차원일 뿐 언어 번역에 대한 치밀한 데스킹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습니다.

■ 강대국 시각에 갇힌 국내 언론의 국제 뉴스

오역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8월 말 가자 지구에선,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일이 있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전문 온라인 매체 '더 일렉트로닉 인티파다' 등에 따르면, 13세 팔레스타인 소년 오마르는 8월 21일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에 있다 목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오마르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진 뒤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현지 언론은 오마르가 숨지면서, 가자 지구 일대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 수가 올해 들어서만 무려 73명에 이른다고 보도했습니다.


특정 국가의 어린이가, 1년도 안 된 짧은 기간 동안, 군에 의해 무더기로 세상을 떠났는데도 언론은 왜 이 소식을 전하는데 소극적이었을까요? 만약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아닌 이스라엘 어린이, 혹은 미국 어린이의 비보였다면 어땠을까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사태를 다루는 언론 보도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당위성과 관련한 보도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이 저항하는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한 보도는 한참 부족하다는 비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 언론에서 쓰이는 국제 뉴스의 상당수가 외신에 의존하는 데 따른 것입니다. < 질문하는 기자들 Q>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보도들의 외신 인용 현황을 분석해봤습니다. 이스라엘이 7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을 대대적으로 공습한 지난 5월 한 달 동안 국내 10개 종합 일간지와 연합뉴스 등 541건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541건의 기사에 외신 인용은 809번 등장했는데, 그 비율을 보면 국내 뉴스에서 팔레스타인 시각의 보도를 찾기 어려운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73.4%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언론 매체를 인용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언론 매체를 인용한 비율은 11.6%였습니다. 반면 팔레스타인 매체를 인용한 비율은 2.4%에 그쳤습니다.

백승훈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위원은 "여러 사안과 관련한 공론의 장에 특정 국가의 틀이 씌워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국익 극대화에 상당한 제한이 된다. 대한민국은 더이상 다양한 국제 이슈에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의견에 편승하는 것만으로는 대응이 쉽지 않은 상황이 됐으며 그것이 우리의 시각으로 국제 문제를 다뤄야만 하는 이유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오역'으로 잃어가는 신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일(일) 밤 10시 35분에 KBS 1TV <질문하는 기자들 Q> 1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솔희 KBS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김나나 KBS 기자가 출연합니다. 2부에선 동네사람들을 이어주는 '공동체라디오'의 미래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질문하는 기자들 Q> 다시 보기는 KBS 홈페이지유튜브 계정에서 가능합니다.
▲ 프로그램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193
▲ 유튜브 계정 <질문하는 기자들 Q>: www.youtube.com/c/질문하는기자들Q/fea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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