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투표권도 없는데”…엉망진창 베를린 선거 관리

입력 2021.10.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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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총선과 지방선거가 함께 치러진 베를린의 한 투표소.9월 26일 총선과 지방선거가 함께 치러진 베를린의 한 투표소.

점입가경입니다.

지난 달(9월) 26일 치러진 독일 총선 및 지방선거 투표에서 베를린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으로 무효표가 최소 1만 3,000여 표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파원 리포트] 베를린 지방선거 무효표가 13,000여 표…“표심 왜곡, 재투표해야”

그런데 선거가 끝난지 열흘도 안 돼 베를린시의 또 다른 '실수'가 확인됐습니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에게 투표하게 한 겁니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베를린의 선거 관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총체적 난국입니다.

■ 만 18살 미만이 총선 투표

베를린 유권자들은 지난 총선·지방선거에서 총 6번의 투표를 했습니다. 연방 하원 의원을 뽑는 투표 2차례(지역구+정당), 베를린 시 의회 의원을 뽑는 투표 2차례(지역구+정당), 베를린 기초단체 의원 한 차례(정당), 그리고 거대 부동산 회사 소유의 주택 몰수 및 공유 의견을 묻는 주민 투표 한 차례입니다.

독일에서 투표권은 만 18세 이상에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기초단체 의원, 즉 구 의회 의원 선거는 만 16세부터 투표할 수 있습니다. 즉, 선거일에 만 18세 이상인 베를린 시민은 지난 9월 26일 6번의 투표를 해야 하지만, 만 16~17세인 베를린 시민은 기초단체 의원 투표 한 번만 해야 합니다.

이쯤 되면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일부 투표소에서 만 16~17세 투표자에게 모든 투표 용지를 나눠 준 겁니다. 기표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자신이 받은 투표 용지에 모두 기표를 했습니다.

이런 황당한 사실은 만 17살의 한 투표자가 SNS에 올리면서 알려졌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유럽연합(EU) 시민들도 기초단체 의원에만 투표할 수 있는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모든 투표 용지가 배부됐고 투표가 이뤄졌습니다.

결국, 베를린 기초의회 선거 뿐만 아니라 베를린시의 총선 투표 결과도 왜곡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 베를린시 선관위 "코로나19 때문에…"

베를린시는 선거 직후 선관위의 실수로 1만 3,120표의 무효표가 확인돼 홍역을 치렀습니다.

어떤 구의 투표소에 다른 구의 투표용지가 배달됐고, 이를 확인하지 못한 유권자가 그냥 기표했던 거죠. 마포구에서 종로구 의원 투표를 한 거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다 같은 날 치러진 베를린 마라톤으로 투표용지 배달이 지연돼 마감 시간인 오후 6시를 한참 넘겨서 투표가 진행된 곳도 많았습니다. 방송사 출구 조사가 나온 진행된 투표에 대해선 '민심 왜곡'이라는 비난이 일었고요.

이 때문에 베를린시 선관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사태가 수습되긴 커녕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베를린 선관위는 코로나19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선관위는 총선 때 투표소에서 일할 자원봉사자 지원을 받았는데, 자원봉사자에게 코로나19 백신을 먼저 맞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백신이 빨리 풀리자 이미 백신을 맞은 지원자 중 상당수가 자원봉사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소도 하지 않은 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코로나19 때문에 집합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유권자들의 잘못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투표지에 표기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투표지 배부가 잘못됐다면 이를 알리고 바로 잡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선관위의 잘못이 줄어들진 않습니다. 투표자의 나이와 출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투표지를 배부했어야 합니다.

9월 26일 치러진 총선 및 지방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줄을 선 베를린 유권자9월 26일 치러진 총선 및 지방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줄을 선 베를린 유권자

■ 재검표 해봤지만…재투표 목소리 높아

베를린 선거관리위원회는 문제가 발견된 선거구에서 재검표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투표 용지가 잘못된 것인지 증명할 수 없을 겁니다. 지역구 인구 수와 투표수를 비교해 보겠지만, 투표지에 이름과 나이가 쓰여 있지 않은데 어떤 표가 무효표인지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일각에서는 베를린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며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실수'로 대량의 무효표와 민심 왜곡이 확인됐고, 얼마나 많은 표가 무효표가 될 것인지 확인조차 어려운 상황이니 당연히 재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무효표나 잘못된 투표가 베를린 기초의회나 총선에 영향이 미미할 것이기 때문에 재투표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번 투표 결과로 차기 베를린 시장이 확실한 프란치스카 기파이 전 독일 연방 여성가족부 장관이 대표적입니다.

재투표 여부와 관계없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황당한 선거 관리는, 훔볼트대학 법대 교수인 크리스티안 발트호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전례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로 두고두고 입길에 오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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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06 10:18:45
    특파원 리포트
9월 26일 총선과 지방선거가 함께 치러진 베를린의 한 투표소.
점입가경입니다.

지난 달(9월) 26일 치러진 독일 총선 및 지방선거 투표에서 베를린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으로 무효표가 최소 1만 3,000여 표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파원 리포트] 베를린 지방선거 무효표가 13,000여 표…“표심 왜곡, 재투표해야”

그런데 선거가 끝난지 열흘도 안 돼 베를린시의 또 다른 '실수'가 확인됐습니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에게 투표하게 한 겁니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베를린의 선거 관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총체적 난국입니다.

■ 만 18살 미만이 총선 투표

베를린 유권자들은 지난 총선·지방선거에서 총 6번의 투표를 했습니다. 연방 하원 의원을 뽑는 투표 2차례(지역구+정당), 베를린 시 의회 의원을 뽑는 투표 2차례(지역구+정당), 베를린 기초단체 의원 한 차례(정당), 그리고 거대 부동산 회사 소유의 주택 몰수 및 공유 의견을 묻는 주민 투표 한 차례입니다.

독일에서 투표권은 만 18세 이상에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기초단체 의원, 즉 구 의회 의원 선거는 만 16세부터 투표할 수 있습니다. 즉, 선거일에 만 18세 이상인 베를린 시민은 지난 9월 26일 6번의 투표를 해야 하지만, 만 16~17세인 베를린 시민은 기초단체 의원 투표 한 번만 해야 합니다.

이쯤 되면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일부 투표소에서 만 16~17세 투표자에게 모든 투표 용지를 나눠 준 겁니다. 기표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자신이 받은 투표 용지에 모두 기표를 했습니다.

이런 황당한 사실은 만 17살의 한 투표자가 SNS에 올리면서 알려졌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유럽연합(EU) 시민들도 기초단체 의원에만 투표할 수 있는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모든 투표 용지가 배부됐고 투표가 이뤄졌습니다.

결국, 베를린 기초의회 선거 뿐만 아니라 베를린시의 총선 투표 결과도 왜곡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 베를린시 선관위 "코로나19 때문에…"

베를린시는 선거 직후 선관위의 실수로 1만 3,120표의 무효표가 확인돼 홍역을 치렀습니다.

어떤 구의 투표소에 다른 구의 투표용지가 배달됐고, 이를 확인하지 못한 유권자가 그냥 기표했던 거죠. 마포구에서 종로구 의원 투표를 한 거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다 같은 날 치러진 베를린 마라톤으로 투표용지 배달이 지연돼 마감 시간인 오후 6시를 한참 넘겨서 투표가 진행된 곳도 많았습니다. 방송사 출구 조사가 나온 진행된 투표에 대해선 '민심 왜곡'이라는 비난이 일었고요.

이 때문에 베를린시 선관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사태가 수습되긴 커녕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베를린 선관위는 코로나19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선관위는 총선 때 투표소에서 일할 자원봉사자 지원을 받았는데, 자원봉사자에게 코로나19 백신을 먼저 맞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백신이 빨리 풀리자 이미 백신을 맞은 지원자 중 상당수가 자원봉사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소도 하지 않은 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코로나19 때문에 집합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유권자들의 잘못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투표지에 표기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투표지 배부가 잘못됐다면 이를 알리고 바로 잡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선관위의 잘못이 줄어들진 않습니다. 투표자의 나이와 출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투표지를 배부했어야 합니다.

9월 26일 치러진 총선 및 지방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줄을 선 베를린 유권자
■ 재검표 해봤지만…재투표 목소리 높아

베를린 선거관리위원회는 문제가 발견된 선거구에서 재검표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투표 용지가 잘못된 것인지 증명할 수 없을 겁니다. 지역구 인구 수와 투표수를 비교해 보겠지만, 투표지에 이름과 나이가 쓰여 있지 않은데 어떤 표가 무효표인지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일각에서는 베를린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며 재투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실수'로 대량의 무효표와 민심 왜곡이 확인됐고, 얼마나 많은 표가 무효표가 될 것인지 확인조차 어려운 상황이니 당연히 재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무효표나 잘못된 투표가 베를린 기초의회나 총선에 영향이 미미할 것이기 때문에 재투표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번 투표 결과로 차기 베를린 시장이 확실한 프란치스카 기파이 전 독일 연방 여성가족부 장관이 대표적입니다.

재투표 여부와 관계없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황당한 선거 관리는, 훔볼트대학 법대 교수인 크리스티안 발트호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전례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로 두고두고 입길에 오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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