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한·중이 주목한 ‘이 사람’…반중 감정 속 합작, 어떻게 될까?

입력 2021.10.1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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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에서는 정작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에서는 '위대한 군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가 있습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에 울려 퍼졌던 '조선의용군 행진곡',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도 만들었습니다.

지난 2014년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해 서울대에서 가진 강연에서 언급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만리장성과 정율성 선생 (출처: 중국 신문망)만리장성과 정율성 선생 (출처: 중국 신문망)

그의 이름 정율성(鄭律成),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입니다.

음악을 사랑해 율성(아름다운 선율을 완성하겠다는 뜻)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정율성 선생(1914~1976)이 2021년, 한국과 중국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한국 제작사 미래숲미디어문화주식회사와 중국의 6개 제작사가 합작으로 인물 전기 영화 '정율성', 30부작 TV 시리즈 '열혈군가' 등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제작된 TV 시리즈 ‘열혈군가’를 이미지화한 포스터 (출처: 인민망)앞으로 제작된 TV 시리즈 ‘열혈군가’를 이미지화한 포스터 (출처: 인민망)

영화 '정율성'의 경우 한국인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촬영은 중국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년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날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한령(한류 금지)이 시작된 뒤 사실상 한·중이 처음으로 힘을 합쳐 제작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왜 정율성일까요?

■ 두 나라는 왜 정율성에 주목할까?

사실 음악가 중 정율성 선생은 두 나라 관계가 무르익을 때부터 탄생 100주년 무렵 등등 여러 차례 주목받았던 인물입니다.

올해 중국 신화사 기자가 ‘정율성 거리’를 직접 찾아 방송한 모습 (출처: 신화망)올해 중국 신화사 기자가 ‘정율성 거리’를 직접 찾아 방송한 모습 (출처: 신화망)

정율성 선생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에는 '정율성 거리(남구 양림동)'가 만들어져 있고요. 또 2005년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정율성국제음악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2002년 정율성 선생과 부인 딩쉐쑹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했습니다.

중국 중앙당교가 발간하는 ‘중화혼’에 게재된 정율성 선생 기사 (‘중화혼’ 홈페이지 갈무리)중국 중앙당교가 발간하는 ‘중화혼’에 게재된 정율성 선생 기사 (‘중화혼’ 홈페이지 갈무리)

또 중국 중앙당교에서 발간하는 '중화혼'이라는 매체는 올해 5월 정율성 선생을 조명하는 '조선 음악가 정율성과 그의 "옌안쑹"'이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정율성이라는 한 사람을 공통적으로 추억하는 건 그의 인생 여러 궤적이 말 그대로 두 나라에 걸쳐있기 때문입니다.

정율성 선생 자체가 한·중 교류사의 상징인 셈입니다.

■ 정율성의 다채로운 행적…제작에는 어떤 영향?

그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중국인입니다. 1953년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율성 선생이 중국으로 건너 온건 1933년, 19살 때입니다. 항일 운동을 위해서입니다.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을 했던 터라 그 영향이 컸습니다.

상하이를 건너 난징으로 간 뒤 매형이 선생님으로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열단 간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시인 이육사도 이 간부학교 1기 입학생입니다.

그 뒤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음악 공부는 간부학교를 졸업한 뒤에 난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37년 옌안에서 촬영된 마오쩌둥(왼쪽)과 외국인 기자(오른쪽) (출처: 신화망)1937년 옌안에서 촬영된 마오쩌둥(왼쪽)과 외국인 기자(오른쪽) (출처: 신화망)

그렇게 중국 생활이 5년 정도 됐을 무렵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집니다. 정율성 선생은 난징을 떠나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는 옌안으로 향하는데요.

그의 이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참석한 집회가 열린 날, 정율성은 여성 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곡한 '옌안쑹(延安頌, 연안송)'을 노래하게 됩니다.

이 노래는 항일의 심장으로 불리는 옌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항일투쟁의 의지를 담은 노래입니다.

옌안쑹은 마오쩌둥과 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공연 이후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1945년 일본 항복 때까지 8년 동안 대표적인 항일 노래로 자리 잡게 되는데요.

2년 뒤인 1939년, 정율성 선생은 또 한번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를 작곡하게 됩니다.

중국 홍군의 대장정 길을 답사한 뒤 만든 '팔로군 행진곡'입니다.

이 곡은 중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군가로 채택됐고 1988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을 받습니다. 중국 공식 행사 때 반드시 꼭 한번은 나온다는 바로 그 곡입니다.

정율성 선생이 만든 노래를 모아 놓은 작곡집 (출처: 바이두)정율성 선생이 만든 노래를 모아 놓은 작곡집 (출처: 바이두)

그 뒤로도 정율성 선생은 300여 개가 넘는 곡을 쓰면서 현재까지 중국 3대 현대 작곡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특히 정율성 선생은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노래로 중국의 공산 혁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받아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도 뽑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정율성 선생의 행적을 아직 균형 있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반중 정서가 커진 요즘 합작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율성 선생과 부인  딩쉐쑹 (출처: 바이두)정율성 선생과 부인 딩쉐쑹 (출처: 바이두)

그는 목숨을 걸고 항일운동을 벌였지만, 중국의 공산화에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광복된 뒤 1945년, 당시 31살의 나이로 북한에 가서 5년 여 동안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 조선인민군 수락 부장을 등을 맡았습니다.

또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행진곡’을 지었습니다. 북한군의 사기를 높이는 군가를 만든 것이죠.

물론 일제를 이기고 조선을 해방 시키려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무장 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중국 공산당 가입이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또 공산당원이 된 이상,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키로 한 결정에 따라 북한에 가는게 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KBS가 2012년 제작한 정율성 선생 다큐멘터리KBS가 2012년 제작한 정율성 선생 다큐멘터리

하지만 그의 애국적 행동과 진정성과는 별개로 공산주의자로서 중국과 북한에서의 행적은 분명 논쟁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2012년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며 KBS가 제작한 정율성 선생 다큐멘터리 방송 때도 불거졌습니다.

반대로 명쾌하게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부분, 부정적인 선입견 등 때문에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성과가 폄하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중국 대륙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사실이 덮어져서도 안 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제작사는 어떻게 정율성 선생의 삶을 조명하게 될까요?

중국은 공산주의자로서의 선생의 삶을, 우리는 항일운동가로서의 삶을 비추고 싶을 겁니다.

정율성 선생은 정작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한 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부인 딩쉐쑹 회고 중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정율성 그 자신만큼이나, 이번 한·중 합작은 '어려운 줄 타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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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한·중이 주목한 ‘이 사람’…반중 감정 속 합작, 어떻게 될까?
    • 입력 2021-10-11 07:03:21
    특파원 리포트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에서는 정작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에서는 '위대한 군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가 있습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에 울려 퍼졌던 '조선의용군 행진곡',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도 만들었습니다.

지난 2014년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해 서울대에서 가진 강연에서 언급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만리장성과 정율성 선생 (출처: 중국 신문망)
그의 이름 정율성(鄭律成),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입니다.

음악을 사랑해 율성(아름다운 선율을 완성하겠다는 뜻)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정율성 선생(1914~1976)이 2021년, 한국과 중국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한국 제작사 미래숲미디어문화주식회사와 중국의 6개 제작사가 합작으로 인물 전기 영화 '정율성', 30부작 TV 시리즈 '열혈군가' 등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제작된 TV 시리즈 ‘열혈군가’를 이미지화한 포스터 (출처: 인민망)
영화 '정율성'의 경우 한국인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촬영은 중국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년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날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한령(한류 금지)이 시작된 뒤 사실상 한·중이 처음으로 힘을 합쳐 제작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왜 정율성일까요?

■ 두 나라는 왜 정율성에 주목할까?

사실 음악가 중 정율성 선생은 두 나라 관계가 무르익을 때부터 탄생 100주년 무렵 등등 여러 차례 주목받았던 인물입니다.

올해 중국 신화사 기자가 ‘정율성 거리’를 직접 찾아 방송한 모습 (출처: 신화망)
정율성 선생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에는 '정율성 거리(남구 양림동)'가 만들어져 있고요. 또 2005년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정율성국제음악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2002년 정율성 선생과 부인 딩쉐쑹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했습니다.

중국 중앙당교가 발간하는 ‘중화혼’에 게재된 정율성 선생 기사 (‘중화혼’ 홈페이지 갈무리)
또 중국 중앙당교에서 발간하는 '중화혼'이라는 매체는 올해 5월 정율성 선생을 조명하는 '조선 음악가 정율성과 그의 "옌안쑹"'이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정율성이라는 한 사람을 공통적으로 추억하는 건 그의 인생 여러 궤적이 말 그대로 두 나라에 걸쳐있기 때문입니다.

정율성 선생 자체가 한·중 교류사의 상징인 셈입니다.

■ 정율성의 다채로운 행적…제작에는 어떤 영향?

그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중국인입니다. 1953년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율성 선생이 중국으로 건너 온건 1933년, 19살 때입니다. 항일 운동을 위해서입니다.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을 했던 터라 그 영향이 컸습니다.

상하이를 건너 난징으로 간 뒤 매형이 선생님으로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열단 간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시인 이육사도 이 간부학교 1기 입학생입니다.

그 뒤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음악 공부는 간부학교를 졸업한 뒤에 난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37년 옌안에서 촬영된 마오쩌둥(왼쪽)과 외국인 기자(오른쪽) (출처: 신화망)
그렇게 중국 생활이 5년 정도 됐을 무렵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집니다. 정율성 선생은 난징을 떠나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는 옌안으로 향하는데요.

그의 이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참석한 집회가 열린 날, 정율성은 여성 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곡한 '옌안쑹(延安頌, 연안송)'을 노래하게 됩니다.

이 노래는 항일의 심장으로 불리는 옌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항일투쟁의 의지를 담은 노래입니다.

옌안쑹은 마오쩌둥과 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공연 이후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1945년 일본 항복 때까지 8년 동안 대표적인 항일 노래로 자리 잡게 되는데요.

2년 뒤인 1939년, 정율성 선생은 또 한번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를 작곡하게 됩니다.

중국 홍군의 대장정 길을 답사한 뒤 만든 '팔로군 행진곡'입니다.

이 곡은 중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군가로 채택됐고 1988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을 받습니다. 중국 공식 행사 때 반드시 꼭 한번은 나온다는 바로 그 곡입니다.

정율성 선생이 만든 노래를 모아 놓은 작곡집 (출처: 바이두)
그 뒤로도 정율성 선생은 300여 개가 넘는 곡을 쓰면서 현재까지 중국 3대 현대 작곡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특히 정율성 선생은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노래로 중국의 공산 혁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받아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도 뽑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정율성 선생의 행적을 아직 균형 있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반중 정서가 커진 요즘 합작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율성 선생과 부인  딩쉐쑹 (출처: 바이두)
그는 목숨을 걸고 항일운동을 벌였지만, 중국의 공산화에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광복된 뒤 1945년, 당시 31살의 나이로 북한에 가서 5년 여 동안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 조선인민군 수락 부장을 등을 맡았습니다.

또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행진곡’을 지었습니다. 북한군의 사기를 높이는 군가를 만든 것이죠.

물론 일제를 이기고 조선을 해방 시키려면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무장 투쟁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중국 공산당 가입이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또 공산당원이 된 이상,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키로 한 결정에 따라 북한에 가는게 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KBS가 2012년 제작한 정율성 선생 다큐멘터리
하지만 그의 애국적 행동과 진정성과는 별개로 공산주의자로서 중국과 북한에서의 행적은 분명 논쟁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2012년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며 KBS가 제작한 정율성 선생 다큐멘터리 방송 때도 불거졌습니다.

반대로 명쾌하게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부분, 부정적인 선입견 등 때문에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성과가 폄하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중국 대륙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사실이 덮어져서도 안 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제작사는 어떻게 정율성 선생의 삶을 조명하게 될까요?

중국은 공산주의자로서의 선생의 삶을, 우리는 항일운동가로서의 삶을 비추고 싶을 겁니다.

정율성 선생은 정작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한 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부인 딩쉐쑹 회고 중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정율성 그 자신만큼이나, 이번 한·중 합작은 '어려운 줄 타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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