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택수색 피해 숨고 몰래 국경 넘고…탈레반 집권 두 달 생존기

입력 2021.10.1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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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군사 시설에 탈레반 깃발이 꽂혀 있다. (출처: REUTERS-연합뉴스)지난 7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군사 시설에 탈레반 깃발이 꽂혀 있다. (출처: REUTERS-연합뉴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한 지 오늘(15일)로 두 달이 됐습니다.

탈레반 새 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은행과 병원 등 기본 시설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입니다.

로이터와 알자지라 등 해외 언론 보도를 보면, 생필품 가격이 몇 주 새 30% 오르는 등 아프간 현지 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카불의 한 무역상 말을 인용해, 통상 왕복 300달러 이하였던 카불-이슬라마바드(파키스탄) 노선 항공권 가격이 현재 편도 1,900달러까지 뛰었다고 지난 8일 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 수입 없이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실정입니다. 공무원들도 봉급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습니다. 수십 억 달러로 알려진 아프간 해외 자산은 동결됐습니다. 경제 붕괴를 우려해, 유럽연합은 최근 국제기구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약 1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정국 혼란 속에서도 인도적 지원은 이어졌지만 1,400만 명의 아프간인들이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가 지난 5일 보도자료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유니세프는 또 올해 말까지 5세 이하 아동 320만 명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들 중 최소 100만 명은 목숨이 위험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파키스탄·이란 등 인접국으로의 탈출 행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8월 말 펴낸 보고서에서, 올해 말까지 많게는 51만 명 가량의 아프간인들이 고국을 떠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탈레반 집권 두 달을 맞아, 아프간 현지에 남겨진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또는 한국 관련 기관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소통 과정에선 한국에 체류 중인 아프간인 학생들과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의 저자 김여정 작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탈레반의 방문…"신앙 없는 자들과 일한 거 다 안다, 아들 찾아내라"

카불 북쪽 도시 바그람의 미 공군기지 한국사무소에서 일했던 A 씨는, 지난 화요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메신저를 통해 묘사한 상황을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지난 12일 밤, 가족들과 함께 집에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A 씨의 아버지가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건 세 명의 탈레반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뜸 A 씨의 행방을 물었고, A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한 달 전에 카불로 떠났다.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된다"고 둘러댔습니다.

탈레반은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집 안을 수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A 씨의 아버지는 집 안에 여자들이 많아 곤란하다며 일단 저지했습니다.

그러자 탈레반 중 한 명이 "당신 아들이 신앙 없는 사람들과 함께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일했단 걸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탈레반은 미국, 그리고 우방국과 협력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색출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 씨도 그런 사람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입니다.

탈레반은 그러면서 A 씨 아버지에게 3천 달러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를 거절하자, "다음 번에도 돈을 내지 않으면 우리가 와서 결정을 내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또 A 씨 아버지에게 "A 는 당신의 아들이다. 당신이 반드시 A 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뒤 돌아갔습니다.

이날 밤 A 씨의 가족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결책을 고심했고, A 씨는 결국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친척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소식을 전한 A 씨는 "당장 먹을 음식도 없는데 (탈레반에) 어떻게 돈을 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석 달 동안 그 누구도 봉급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실업 상태"라고 푸념했습니다. 또 "만약 내가 혼자라면 이란으로 탈출하고 싶지만 (지금 내가 가버리면) 누가 내 가족을 먹여 살리겠냐"며 매우 혼란스럽다고 말했습니다.

A 씨가 두 자녀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신원 보호를 위해 사진의 색을 없애고 뿌옇게 처리했다. (출처: A 씨 제공)A 씨가 두 자녀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신원 보호를 위해 사진의 색을 없애고 뿌옇게 처리했다. (출처: A 씨 제공)

■ 브로커 통해 파키스탄으로 탈출하기도…앞날은 깜깜

한국 정부의 구출 지원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기다리다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가 카불에 지은 아프간-한국 직업훈련원(AKVTI)의 교장이었던 B 씨는, 지난달 24일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습니다.

탈레반이 집까지 찾아와 위협하자 가족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로 결심한 겁니다.

한 사람 당 800~1,000달러를 내면 파키스탄 브로커를 통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데, 지인들에게 어렵게 돈을 빌려 고국을 탈출했습니다. B 씨는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코이카 장학생으로 카이스트(KAIST) 석사 과정에 입학한 C 씨 역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최근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습니다.

당초 C 씨는 한국에서의 학업을 위해 8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을 출발해 다음날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코이카를 통해 항공권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후 파키스탄을 경유해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보겠다는 일념 하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이달 초 파키스탄으로 입국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출국 당시 들고 있었던 손가방과 담요가 사진에 표시돼 있다. (출처: C 씨 제공)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출국 당시 들고 있었던 손가방과 담요가 사진에 표시돼 있다. (출처: C 씨 제공)

C 씨는 "(브로커)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 근처에서 사흘을 보냈는데 내내 길 위에서 지내야 했다"면서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과정을 설명하긴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어 "파키스탄에 도착해서도 금전적 문제, 정신적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안전이 보장될지, 머물 곳이 있을지 등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토로했습니다.

C 씨는 "심지어 카이스트에 지원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나는 해당 학위 과정에서 유일한 여성"이라면서 "학업의 기회가 박탈된다면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들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녀가 더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여권을 분실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C 씨는 한국 비자 신청을 위해 주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에 지난 7월 말 여권을 제출했는데, 8월 15일 한국대사관이 철수하면서 여권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출입국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파키스탄행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국행 비행기 역시 탈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C 씨는 "한국 정부는 제발 내 여권을 돌려달라. 제발 도와달라"면서 "여권이 없다면 내 삶은 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KBS 인터뷰 과정에서 보내 온 영상 캡처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KBS 인터뷰 과정에서 보내 온 영상 캡처

■ "여권 찾으러 폐쇄된 한국대사관 건물 들어가…일부는 분실"

한국 비자 신청 과정에서 여권을 분실한 아프간인은 C 씨만이 아니었습니다.

외교부가 지난 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조태용 의원실(국민의힘)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주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은 8월 15일 카불 철수 이전까지 모두 28건의 비자 신청을 접수했습니다. 이에 따라 여권도 28개 제출 받았습니다.

외교부는 "모든 신청자는 비자 발급이 완료됐다"면서 "주아프간 대사관은 긴급 철수 당시, 신청자들이 여권을 용이하게 수령할 수 있도록 영사과 사증실(비자실) 탁자 위에 비치해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철수와 함께 대사관을 폐쇄하면서 대사관 안에 아프간인들의 여권을 두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외교부는 또 "공관 대표메일이나 당직 전화를 통해 여권을 되찾고 싶다고 희망해 온 민원인들에게 여권이 비치된 위치를 알려줬다"면서 "비자 신청자 28명 중 12명이 대사관을 방문해 여권을 회수했다고 우리 공관에 알려왔다"고 오늘(15일) 밝혔습니다.

폐쇄된 한국대사관 건물에 들어가 본인의 여권을 되찾은 사람들은 현재까지 12명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권을 회수하지 못한 셈입니다.

한국에 체류 중인 아프간인 유학생들은, 실제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몇 명과 사업가 1명이 여권을 찾기 위해 지난달 20일 건물만 남은 한국대사관을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는 탈레반들 중 지인이 있어서 그와 함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일부 아프간인 학생들은 당일 대사관에서 본인의 여권을 찾았고 조만간 인접국인 이란으로 이동해 한국행을 모색할 예정이지만, C 씨를 포함한 유학생 5명의 여권은 대사관 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탈레반 정부가 지난 5일부터 여권 발급을 재개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권 재발급이 모두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아닙니다.

현지시간 14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보면, 미군의 전쟁과 재건 과정에 협력했던 아프간인들은 여권 신청 과정에서 탈레반에 신원이 노출돼 보복을 당할까봐 신청을 꺼리고 있습니다.

바그람 미 공군기지 한국사무소에서 일했던 A 씨도 KBS에 "탈레반이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 여권을 신청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여권을 가진 자국민에게만 여행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행 비자를 신청했던 일부 아프간인들은, 이번 주말에도 주아프간 한국대사관 건물에 들어가 여권을 찾아볼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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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택수색 피해 숨고 몰래 국경 넘고…탈레반 집권 두 달 생존기
    • 입력 2021-10-15 15:02:43
    취재K
지난 7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군사 시설에 탈레반 깃발이 꽂혀 있다. (출처: REUTERS-연합뉴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한 지 오늘(15일)로 두 달이 됐습니다.

탈레반 새 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은행과 병원 등 기본 시설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입니다.

로이터와 알자지라 등 해외 언론 보도를 보면, 생필품 가격이 몇 주 새 30% 오르는 등 아프간 현지 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카불의 한 무역상 말을 인용해, 통상 왕복 300달러 이하였던 카불-이슬라마바드(파키스탄) 노선 항공권 가격이 현재 편도 1,900달러까지 뛰었다고 지난 8일 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 수입 없이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실정입니다. 공무원들도 봉급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습니다. 수십 억 달러로 알려진 아프간 해외 자산은 동결됐습니다. 경제 붕괴를 우려해, 유럽연합은 최근 국제기구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약 1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정국 혼란 속에서도 인도적 지원은 이어졌지만 1,400만 명의 아프간인들이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가 지난 5일 보도자료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유니세프는 또 올해 말까지 5세 이하 아동 320만 명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들 중 최소 100만 명은 목숨이 위험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파키스탄·이란 등 인접국으로의 탈출 행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는 8월 말 펴낸 보고서에서, 올해 말까지 많게는 51만 명 가량의 아프간인들이 고국을 떠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탈레반 집권 두 달을 맞아, 아프간 현지에 남겨진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또는 한국 관련 기관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소통 과정에선 한국에 체류 중인 아프간인 학생들과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의 저자 김여정 작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탈레반의 방문…"신앙 없는 자들과 일한 거 다 안다, 아들 찾아내라"

카불 북쪽 도시 바그람의 미 공군기지 한국사무소에서 일했던 A 씨는, 지난 화요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가 메신저를 통해 묘사한 상황을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지난 12일 밤, 가족들과 함께 집에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A 씨의 아버지가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건 세 명의 탈레반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뜸 A 씨의 행방을 물었고, A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한 달 전에 카불로 떠났다.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된다"고 둘러댔습니다.

탈레반은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집 안을 수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A 씨의 아버지는 집 안에 여자들이 많아 곤란하다며 일단 저지했습니다.

그러자 탈레반 중 한 명이 "당신 아들이 신앙 없는 사람들과 함께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일했단 걸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탈레반은 미국, 그리고 우방국과 협력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색출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 씨도 그런 사람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입니다.

탈레반은 그러면서 A 씨 아버지에게 3천 달러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를 거절하자, "다음 번에도 돈을 내지 않으면 우리가 와서 결정을 내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또 A 씨 아버지에게 "A 는 당신의 아들이다. 당신이 반드시 A 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뒤 돌아갔습니다.

이날 밤 A 씨의 가족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결책을 고심했고, A 씨는 결국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친척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소식을 전한 A 씨는 "당장 먹을 음식도 없는데 (탈레반에) 어떻게 돈을 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석 달 동안 그 누구도 봉급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실업 상태"라고 푸념했습니다. 또 "만약 내가 혼자라면 이란으로 탈출하고 싶지만 (지금 내가 가버리면) 누가 내 가족을 먹여 살리겠냐"며 매우 혼란스럽다고 말했습니다.

A 씨가 두 자녀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신원 보호를 위해 사진의 색을 없애고 뿌옇게 처리했다. (출처: A 씨 제공)
■ 브로커 통해 파키스탄으로 탈출하기도…앞날은 깜깜

한국 정부의 구출 지원이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기다리다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가 카불에 지은 아프간-한국 직업훈련원(AKVTI)의 교장이었던 B 씨는, 지난달 24일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습니다.

탈레반이 집까지 찾아와 위협하자 가족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로 결심한 겁니다.

한 사람 당 800~1,000달러를 내면 파키스탄 브로커를 통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데, 지인들에게 어렵게 돈을 빌려 고국을 탈출했습니다. B 씨는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코이카 장학생으로 카이스트(KAIST) 석사 과정에 입학한 C 씨 역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최근 파키스탄 국경을 넘었습니다.

당초 C 씨는 한국에서의 학업을 위해 8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을 출발해 다음날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코이카를 통해 항공권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후 파키스탄을 경유해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보겠다는 일념 하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이달 초 파키스탄으로 입국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출국 당시 들고 있었던 손가방과 담요가 사진에 표시돼 있다. (출처: C 씨 제공)
C 씨는 "(브로커)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 근처에서 사흘을 보냈는데 내내 길 위에서 지내야 했다"면서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과정을 설명하긴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어 "파키스탄에 도착해서도 금전적 문제, 정신적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안전이 보장될지, 머물 곳이 있을지 등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토로했습니다.

C 씨는 "심지어 카이스트에 지원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나는 해당 학위 과정에서 유일한 여성"이라면서 "학업의 기회가 박탈된다면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들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녀가 더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여권을 분실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C 씨는 한국 비자 신청을 위해 주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에 지난 7월 말 여권을 제출했는데, 8월 15일 한국대사관이 철수하면서 여권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출입국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파키스탄행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국행 비행기 역시 탈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C 씨는 "한국 정부는 제발 내 여권을 돌려달라. 제발 도와달라"면서 "여권이 없다면 내 삶은 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C 씨가 KBS 인터뷰 과정에서 보내 온 영상 캡처
■ "여권 찾으러 폐쇄된 한국대사관 건물 들어가…일부는 분실"

한국 비자 신청 과정에서 여권을 분실한 아프간인은 C 씨만이 아니었습니다.

외교부가 지난 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조태용 의원실(국민의힘)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주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은 8월 15일 카불 철수 이전까지 모두 28건의 비자 신청을 접수했습니다. 이에 따라 여권도 28개 제출 받았습니다.

외교부는 "모든 신청자는 비자 발급이 완료됐다"면서 "주아프간 대사관은 긴급 철수 당시, 신청자들이 여권을 용이하게 수령할 수 있도록 영사과 사증실(비자실) 탁자 위에 비치해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철수와 함께 대사관을 폐쇄하면서 대사관 안에 아프간인들의 여권을 두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외교부는 또 "공관 대표메일이나 당직 전화를 통해 여권을 되찾고 싶다고 희망해 온 민원인들에게 여권이 비치된 위치를 알려줬다"면서 "비자 신청자 28명 중 12명이 대사관을 방문해 여권을 회수했다고 우리 공관에 알려왔다"고 오늘(15일) 밝혔습니다.

폐쇄된 한국대사관 건물에 들어가 본인의 여권을 되찾은 사람들은 현재까지 12명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권을 회수하지 못한 셈입니다.

한국에 체류 중인 아프간인 유학생들은, 실제로 아프간인 한국 유학생 몇 명과 사업가 1명이 여권을 찾기 위해 지난달 20일 건물만 남은 한국대사관을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는 탈레반들 중 지인이 있어서 그와 함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일부 아프간인 학생들은 당일 대사관에서 본인의 여권을 찾았고 조만간 인접국인 이란으로 이동해 한국행을 모색할 예정이지만, C 씨를 포함한 유학생 5명의 여권은 대사관 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탈레반 정부가 지난 5일부터 여권 발급을 재개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권 재발급이 모두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아닙니다.

현지시간 14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보면, 미군의 전쟁과 재건 과정에 협력했던 아프간인들은 여권 신청 과정에서 탈레반에 신원이 노출돼 보복을 당할까봐 신청을 꺼리고 있습니다.

바그람 미 공군기지 한국사무소에서 일했던 A 씨도 KBS에 "탈레반이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 여권을 신청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여권을 가진 자국민에게만 여행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한국행 비자를 신청했던 일부 아프간인들은, 이번 주말에도 주아프간 한국대사관 건물에 들어가 여권을 찾아볼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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