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한중수교 직접 서명하려했다”…노태우 전 대통령과 중국

입력 2021.10.27 (08:01) 수정 2021.10.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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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을 보도한 KBS 뉴스91992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을 보도한 KBS 뉴스9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사망했습니다. 고인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불법 비자금 조성 등 짙은 역사적 그늘을 남겼습니다. 다만 베이징 특파원 입장에서 그의 생애 한 부분은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 관계의 커다란 분수령이 된 1992년 한중 수교 당시의 대통령이었습니다.

■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상징적 사건

한중 수교 배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붕괴와 이를 계기로 속도를 높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임기만 놓고 보면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37개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중 수교는 1990년 한소 수교와 더불어 국제 정세의 격변과 한국의 기민한 외교 활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남순강화 당시 덩샤오핑. (출처=바이두)남순강화 당시 덩샤오핑. (출처=바이두)

물론 상대인 중국에서도 1992년 남순강화로 위상을 높인 덩샤오핑이 자신의 경제 발전 구상의 실현을 위해 중국 내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중 수교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또 한국에 타이완과의 단교를 요구해 타이완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고 수교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었던 첸지천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밝혔습니다. 노태우 정부 역시 한중 수교를 통한 대북 압박과 이를 통한 한국 주도의 통일을 노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김종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중앙일보> 인터뷰)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장관(왼쪽)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출처=국가기록원)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장관(왼쪽)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한중 수교 교섭 과정의 외교문서들은 여전히 비밀의 영역에 남아있지만 이처럼 수교에 참여했던 외교관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중 수교 과정에 대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역할과 의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노태우 전 대통령, 직접 수교협정에 서명 희망…수교 직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으로 절충

이미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며 한중 양국이 어느 정도 관계 정상화에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APEC회의에 참석한 첸지천 외교부장에게 한중 수교 의사를 전달하며 정부 간 최고위급 차원에서 사실상 공식화됐습니다. (김하중 전 주중대사 회고록 <한국외교와 외교관>)

한국 측에서는 '동해사업'이란 이름으로 은밀히 추진한 한중 수교 협상 결과 1992년 8월 한중 양국은 수교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중국을 직접 방문해 수교협정에 서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대신 다음 달인 9월 중국을 국빈 방문해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습니다.

수교 협정 체결 시점이 거의 결정된 상황에서 대통령 방중을 위해 세부 계획과 인원, 숙소 등을 결정해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수교 자체가 비밀이어서 쉽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권병현 전 주중대사 '한중수교비망록' <한국일보>).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중 수교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자신의 역할을 대외적으로 부각시키기를 강하게 바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992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양상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 주석 뒤 중국 측 통역 리빈은 훗날 주한중국대사를 지냈다. (KBS 뉴스 캡처)1992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양상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 주석 뒤 중국 측 통역 리빈은 훗날 주한중국대사를 지냈다. (KBS 뉴스 캡처)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9월 27일부터 3박 4일간 중국을 공식 방문해 양상쿤 주석과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장쩌민 공산당 총서기, 리펑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양국은 한중 간 선린 협력 발전이 양국 국민의 이익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 평화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내용 등을 담은 ‘한중 공동 언론발표문’도 발표했습니다.

1991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 당시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왼쪽)의 오른쪽에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측 협상을 주도한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앉아있다. (KBS 뉴스 캡처)1991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 당시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왼쪽)의 오른쪽에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측 협상을 주도한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앉아있다. (KBS 뉴스 캡처)

1991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배석한 이상옥 외무장관.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 비핵화 등을 강조했다. (KBS 뉴스 캡처)1991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배석한 이상옥 외무장관.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 비핵화 등을 강조했다. (KBS 뉴스 캡처)

■ 주한 중국대사, 한중 수교일 앞서 노 전 대통령 방문…중국 정부 "사망에 깊은 애도"

이 같은 선친의 경험과 의지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인 노재헌씨는 일대일로연구원의 원장을 맡아 한중 교류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자녀들도 어린 시절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이 가운데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해와 올해 8월 한중 수교 기념일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만큼 싱 대사는 노재헌씨 등 노 전 대통령 가족들과 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20년 8월 19일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꽃바구니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주한중국대사관)2020년 8월 19일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꽃바구니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주한중국대사관)

올해 8월 20일 연희동 방문 당시 싱하이밍 대사는 “29년 전 양국의 전 세대 지도자들이 현명하고 정확한 결정으로 한중 양국이 수교하게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중국은 노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한중 관계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입장을 내놨습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말을 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오 대변인은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한중 수교와 양국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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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7 08:01:51
    • 수정2021-10-27 10: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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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을 보도한 KBS 뉴스9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사망했습니다. 고인은 12.12 군사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불법 비자금 조성 등 짙은 역사적 그늘을 남겼습니다. 다만 베이징 특파원 입장에서 그의 생애 한 부분은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 관계의 커다란 분수령이 된 1992년 한중 수교 당시의 대통령이었습니다.

■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상징적 사건

한중 수교 배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붕괴와 이를 계기로 속도를 높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5년 임기만 놓고 보면 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37개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중 수교는 1990년 한소 수교와 더불어 국제 정세의 격변과 한국의 기민한 외교 활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남순강화 당시 덩샤오핑. (출처=바이두)
물론 상대인 중국에서도 1992년 남순강화로 위상을 높인 덩샤오핑이 자신의 경제 발전 구상의 실현을 위해 중국 내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중 수교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또 한국에 타이완과의 단교를 요구해 타이완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고 수교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었던 첸지천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밝혔습니다. 노태우 정부 역시 한중 수교를 통한 대북 압박과 이를 통한 한국 주도의 통일을 노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김종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중앙일보> 인터뷰)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장관(왼쪽)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한중 수교 교섭 과정의 외교문서들은 여전히 비밀의 영역에 남아있지만 이처럼 수교에 참여했던 외교관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중 수교 과정에 대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역할과 의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노태우 전 대통령, 직접 수교협정에 서명 희망…수교 직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으로 절충

이미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며 한중 양국이 어느 정도 관계 정상화에 공감대를 형성한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APEC회의에 참석한 첸지천 외교부장에게 한중 수교 의사를 전달하며 정부 간 최고위급 차원에서 사실상 공식화됐습니다. (김하중 전 주중대사 회고록 <한국외교와 외교관>)

한국 측에서는 '동해사업'이란 이름으로 은밀히 추진한 한중 수교 협상 결과 1992년 8월 한중 양국은 수교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중국을 직접 방문해 수교협정에 서명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대신 다음 달인 9월 중국을 국빈 방문해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뤄졌습니다.

수교 협정 체결 시점이 거의 결정된 상황에서 대통령 방중을 위해 세부 계획과 인원, 숙소 등을 결정해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수교 자체가 비밀이어서 쉽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권병현 전 주중대사 '한중수교비망록' <한국일보>).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중 수교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자신의 역할을 대외적으로 부각시키기를 강하게 바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992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양상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 주석 뒤 중국 측 통역 리빈은 훗날 주한중국대사를 지냈다. (KBS 뉴스 캡처)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9월 27일부터 3박 4일간 중국을 공식 방문해 양상쿤 주석과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장쩌민 공산당 총서기, 리펑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양국은 한중 간 선린 협력 발전이 양국 국민의 이익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 평화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내용 등을 담은 ‘한중 공동 언론발표문’도 발표했습니다.

1991년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 당시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왼쪽)의 오른쪽에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측 협상을 주도한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앉아있다. (KBS 뉴스 캡처)
1991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배석한 이상옥 외무장관.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 비핵화 등을 강조했다. (KBS 뉴스 캡처)
■ 주한 중국대사, 한중 수교일 앞서 노 전 대통령 방문…중국 정부 "사망에 깊은 애도"

이 같은 선친의 경험과 의지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인 노재헌씨는 일대일로연구원의 원장을 맡아 한중 교류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자녀들도 어린 시절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이 가운데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해와 올해 8월 한중 수교 기념일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만큼 싱 대사는 노재헌씨 등 노 전 대통령 가족들과 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20년 8월 19일 노태우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꽃바구니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주한중국대사관)
올해 8월 20일 연희동 방문 당시 싱하이밍 대사는 “29년 전 양국의 전 세대 지도자들이 현명하고 정확한 결정으로 한중 양국이 수교하게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중국은 노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한중 관계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입장을 내놨습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말을 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오 대변인은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한중 수교와 양국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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