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대리 사과’에 열어본 10년 전 노태우 회고록

입력 2021.10.27 (17:58) 수정 2021.10.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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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89살로 세상을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지가 공개됐습니다.

아들 노재헌 씨는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국가에 대해 생각과 책임이 컸기 때문에 잘했던 일, 못했던 일 다 본인의 무한 책임이라 생각하셨다"고 고인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어 "특히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 이후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서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랐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나쁜 면은 본인이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앞의 세대는 희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평소에 하셨다"고 밝혔습니다.

아들 노재헌 씨가 대독하긴 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이 5.18 희생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며 직접 언급한 부분은 주목할 부분입니다.


다만 이 유지는 생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언급 - '노태우 회고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2011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표현했습니다.

■ "'광주사태'는 광주시민들이 군인을 잘 몰라서...유언비어도 극성"

그러면서 당시 자신은 수도경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광주에 대해서는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선을 긋고 시작합니다. 사건 발생 이후 자료를 통해 정리한 결과라면서 5.18은 '광주의 지역적 특수성'으로 생겨났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시위가 잦았던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했을 때 시민들이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광주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광주시민들은 군을 경찰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군은 후퇴할 줄 모르므로 시민들이 물러서지 않는 한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다" (노태우 회고록 중에서)

유언비어 탓으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 등 악랄한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를 뒤덮으면서 광주시민들이 치를 떨고 군과 대항하게 됐다는 겁니다.

전두환 씨에 대해서도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태 진압의 1차적 책임은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에게 있었다면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참모로서 조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진압작전과 관련된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서는 "권위과 결단력이 약했다",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고 비판하고, 청와대의 미흡한 대응으로 혼란이 이어진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다만, "정확한 원인 규명과 사인 규명을 기초로 한 처벌과 보상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사후 수습은 잘못됐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 "12.12는 돌발사고...쿠데타 아니야"

회고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에 대해서도, 역사적 평가와 다른 견해를 내놓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면서 쿠데타 음모는 없었다는 겁니다.

12.12 사태는...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 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 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 중)

■ "비자금으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 줘"

1995년 국회에서 노태우 정부 비자금을 폭로하는 박계동 의원1995년 국회에서 노태우 정부 비자금을 폭로하는 박계동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져서 징역 17년과 2,628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습니다.

5.18과 12.12에 대해서는 책임을 부인했지만,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관련해서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던 점은 이 시각까지 나의 고뇌로 남아 있다"면서 통치행위와 관련해 기업인들부터 비자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였다고 불가피성을 호소하고, 오히려 본인은 비자금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각 부품에 윤활유를 쳐주어야 했다. 통치자금은 국정수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노태우 회고록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보관하고 있던 돈이 결코 축재용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지적해두고 싶다"고 해명했습니다.

■ "내 장점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전두환"

흔히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씨와 비교해 영원한 2인자라는 평가를 내리곤 합니다.

육사 동기인 전두환 씨가 걸어왔던 인생을 노 전 대통령이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갔기 때문인데 모두 1,100페이지를 넘는 회고록에서도 전두환 씨 관련 내용은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전두환 씨에 대해서 "사관학교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장점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전두환이었고, 자신의 성격을 가장 많이 활용한 사람도 바로 전두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12.12쿠데타와 5.18을 겪고 난 다음 최규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었던 전두환에게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기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최 전 대통령이 전 씨를 불러서 가보니 권력을 맡아달라고 했고 이를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결정했다는 겁니다. 당시 전 씨의 반응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전 장군을 국가지도자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전 장군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 어려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능력이 부족하고 두렵다"고 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태우 회고록 중)


■ 아들 노재헌 씨 5.18 광주 여러 차례 사과


노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씨는 2019년부터 여러 차례 광주를 찾아 5.18 묘지를 참배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전두환 씨와는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반대로 본인이 직접 사과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한 '대리 사과'였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 회고록 내용을 봐도 아들 노재헌 씨 사과와 배치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노 전 대통령 사망으로 이제 회고록 내용과 노 전 대통령 유지 내용 중 어느 부분이 노 전 대통령의 진심인지는 이제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아들 노재헌 씨는 지난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직접 쓴 게 아니기 때문에) 회고록을 마지막으로 정리할 때 아버지의 진심이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시 출판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개정할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 '쿠데타 주역' vs '북방개척 대통령'...평가는 역사의 몫

노 전 대통령은 유족의 뜻에 의해서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묘지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주는 노 전 대통령에게 여러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1979년 육군 9사단장 시절, 노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를 위해 최전방 파주를 지키던 병력을 빼내서 서울로 진격시켰습니다.

동시에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통일의 꿈을 꾸며, 파주에 통일동산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파주에 묻히게 될 노 전 대통령이 쿠데타 주역 9사단장으로서 기억될지, 아니면 북방을 개척하고 통일의 꿈을 꾼 대통령으로서 기억될지는 이제 영원히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분명한 참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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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 ‘대리 사과’에 열어본 10년 전 노태우 회고록
    • 입력 2021-10-27 17:58:43
    • 수정2021-10-27 18:05:48
    취재K

어제 89살로 세상을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지가 공개됐습니다.

아들 노재헌 씨는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국가에 대해 생각과 책임이 컸기 때문에 잘했던 일, 못했던 일 다 본인의 무한 책임이라 생각하셨다"고 고인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어 "특히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 이후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서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랐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나쁜 면은 본인이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앞의 세대는 희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평소에 하셨다"고 밝혔습니다.

아들 노재헌 씨가 대독하긴 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이 5.18 희생자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며 직접 언급한 부분은 주목할 부분입니다.


다만 이 유지는 생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언급 - '노태우 회고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2011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표현했습니다.

■ "'광주사태'는 광주시민들이 군인을 잘 몰라서...유언비어도 극성"

그러면서 당시 자신은 수도경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광주에 대해서는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선을 긋고 시작합니다. 사건 발생 이후 자료를 통해 정리한 결과라면서 5.18은 '광주의 지역적 특수성'으로 생겨났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시위가 잦았던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했을 때 시민들이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광주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광주시민들은 군을 경찰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군은 후퇴할 줄 모르므로 시민들이 물러서지 않는 한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것 같다" (노태우 회고록 중에서)

유언비어 탓으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 등 악랄한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를 뒤덮으면서 광주시민들이 치를 떨고 군과 대항하게 됐다는 겁니다.

전두환 씨에 대해서도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태 진압의 1차적 책임은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에게 있었다면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참모로서 조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진압작전과 관련된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반면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서는 "권위과 결단력이 약했다",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고 비판하고, 청와대의 미흡한 대응으로 혼란이 이어진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다만, "정확한 원인 규명과 사인 규명을 기초로 한 처벌과 보상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사후 수습은 잘못됐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 "12.12는 돌발사고...쿠데타 아니야"

회고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에 대해서도, 역사적 평가와 다른 견해를 내놓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면서 쿠데타 음모는 없었다는 겁니다.

12.12 사태는...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 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 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 중)

■ "비자금으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 줘"

1995년 국회에서 노태우 정부 비자금을 폭로하는 박계동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져서 징역 17년과 2,628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습니다.

5.18과 12.12에 대해서는 책임을 부인했지만,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관련해서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던 점은 이 시각까지 나의 고뇌로 남아 있다"면서 통치행위와 관련해 기업인들부터 비자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였다고 불가피성을 호소하고, 오히려 본인은 비자금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각 부품에 윤활유를 쳐주어야 했다. 통치자금은 국정수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노태우 회고록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보관하고 있던 돈이 결코 축재용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지적해두고 싶다"고 해명했습니다.

■ "내 장점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전두환"

흔히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씨와 비교해 영원한 2인자라는 평가를 내리곤 합니다.

육사 동기인 전두환 씨가 걸어왔던 인생을 노 전 대통령이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갔기 때문인데 모두 1,100페이지를 넘는 회고록에서도 전두환 씨 관련 내용은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전두환 씨에 대해서 "사관학교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장점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전두환이었고, 자신의 성격을 가장 많이 활용한 사람도 바로 전두환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12.12쿠데타와 5.18을 겪고 난 다음 최규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었던 전두환에게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기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최 전 대통령이 전 씨를 불러서 가보니 권력을 맡아달라고 했고 이를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결정했다는 겁니다. 당시 전 씨의 반응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전 장군을 국가지도자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전 장군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 어려운 운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능력이 부족하고 두렵다"고 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태우 회고록 중)


■ 아들 노재헌 씨 5.18 광주 여러 차례 사과


노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씨는 2019년부터 여러 차례 광주를 찾아 5.18 묘지를 참배하고 사죄했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전두환 씨와는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반대로 본인이 직접 사과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한 '대리 사과'였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 회고록 내용을 봐도 아들 노재헌 씨 사과와 배치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노 전 대통령 사망으로 이제 회고록 내용과 노 전 대통령 유지 내용 중 어느 부분이 노 전 대통령의 진심인지는 이제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아들 노재헌 씨는 지난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직접 쓴 게 아니기 때문에) 회고록을 마지막으로 정리할 때 아버지의 진심이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시 출판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개정할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 '쿠데타 주역' vs '북방개척 대통령'...평가는 역사의 몫

노 전 대통령은 유족의 뜻에 의해서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묘지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주는 노 전 대통령에게 여러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1979년 육군 9사단장 시절, 노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를 위해 최전방 파주를 지키던 병력을 빼내서 서울로 진격시켰습니다.

동시에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통일의 꿈을 꾸며, 파주에 통일동산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파주에 묻히게 될 노 전 대통령이 쿠데타 주역 9사단장으로서 기억될지, 아니면 북방을 개척하고 통일의 꿈을 꾼 대통령으로서 기억될지는 이제 영원히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분명한 참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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