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교가 학생에게 시험지 통째로 건네…교수들은 ‘쉬쉬’

입력 2021.11.0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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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유출 사건이 벌어진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교 모습시험지 유출 사건이 벌어진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교 모습

"대학 학점이 선동열 방어율 수준이다." 과거 대학가에서 회자 되던 말이죠. 학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즐긴 분들이 자주 하던 얘기인데요, 이제는 옛말이 됐습니다. 학점이 그 정도로 낮으면 취업을 하기도, 대학원을 진학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학 성적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고등학생 못지 않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 전공시험을 앞두고 시험지가 유출됐고, 교수들이 이를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학생들 마음이 어떨까요? 지난해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요. 1년여 만에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 조교가 건넨 이메일 계정…안에는 전공 시험지 파일이

지난해 10월, 광주 모 대학교의 학생 A 씨는 학과 조교 B 씨와 전공 시험 얘기를 나눴습니다. A 학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B 조교에게 시험 과목이 많다며 걱정을 털어놨습니다. B 조교는 도움을 주겠다며 자신의 이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A 학생에게 알려줬습니다.


B 조교의 이메일 계정에 접속한 A 학생은 깜짝 놀랐습니다. 시험에 참고될 '족보' 정도의 자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뒤 치러지는 2학기 중간고사의 전공 과목 시험지 파일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A 학생이 본 파일은 이미 출제가 끝난 시험지로, 인쇄를 앞두고 교수들이 B 조교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A 학생은 문제를 확인하고 시험지를 출력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부정행위자로 몰릴 게 두렵기도 했습니다. A 학생은 결국 교수들을 찾아가 시험지를 통째로 건네받은 사실을 알렸습니다.

■ 학생이 시험지 유출 사실 알렸지만…아무 조치 안 한 교수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학과 교수들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을 학교 측에 공식 보고하지도 않았고, 학과 차원에서 시험 문제를 고치자는 논의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A 학생은 "시험 보기 전에 자진 신고를 했지만, '이런 일이 너한테만 있는 거 같냐'며 그냥 덮고 넘어갔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습니다. A 학생은 또 "시험을 따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까지 얘기했지만, 그때마다 (교수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 봐라'라고 하며 의견을 묵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시험은 그 상태로 진행됐고, 성적도 매겨졌습니다.

■ "시험 범위 넓은데"…분노하는 학생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

지난해의 '시험지 유출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최근이었습니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에 이 사건을 알리는 글이 올라오면서부터였습니다. 학생들의 분노는 컸습니다. 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관련자들의 징계와 함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어느 학생은 "학과의 특성상 시험 범위가 넓어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으면 학점을 잘 받을 수 없다"며 "미리 시험지를 받아서 성적이 잘 나왔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시험지를 유출한 조교와 이를 받아본 학생이 가장 큰 문제지만, 교수와 학교 측에 더 화가 난다"며 "적극적인 조치도 하지 않았고, 성적 손해를 본 학생들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고 꼬집었습니다.

■ 교수들은 "학교 명예 위해 덮어 달라"

질타가 빗발치고 나서야 학과 교수들은 학생들과 대화에 나섰습니다. 교수들은 시험지 유출 사실을 인지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당시 판단을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들은 여기서도 문제를 키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히려 교수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고시가 얼마 안 남았다"며 "학교의 명예를 위해 여기서 마무리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태도에 학생들은 더 실망했습니다. 한 학생은 "(교수님이) '그럴 수도 있다', '같은 학생, 같은 학과 출신이니까 봐주자',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셔서 학생 반발이 더 컸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 교수는 KBS와의 통화에서 "A 학생이 시험이 끝난 다음에 찾아와 시험지 유출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A 학생의 성적을 직전 학기 기준으로 점수를 부여하는 등 성적의 이득을 얻지 않도록 조치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시험지 유출사건에 대해 사실 관계 파악에 나섰다고 알리는 학과 게시물시험지 유출사건에 대해 사실 관계 파악에 나섰다고 알리는 학과 게시물

■ 교육부, 진상조사 요구…학교는 조사 중

'시험지 유출 사건'이 국민신문고에 민원 형태로 들어오자, 교육부는 학교 측에 사실관계 확인과 보고를 요구했습니다. 뒤늦게 조사에 나선 학교 측은 시험지 유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학교 측은 시험지가 유출된 사례가 또 있는지, 교수들의 조치가 적절했는지도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대학교 시험지가 유출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동국대에서 학생이 강사 이메일에 몰래 접속해 시험 문제를 빼냈습니다. 2016년 전북대에서는 근로장학생이 시험지를 촬영한 뒤 유출해 관련 학생들이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 학점이 마치 고교 내신처럼 중요해지면서, 그만큼 공정성에 대한 요구도 커지는 상황이죠. 출제 관리실을 두고 매뉴얼에 따라 시험을 내는 고등학교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엄정한 학사 관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대학계와 교육 당국이 새겨봐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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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교가 학생에게 시험지 통째로 건네…교수들은 ‘쉬쉬’
    • 입력 2021-11-09 10:28:58
    취재K
시험지 유출 사건이 벌어진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교 모습
"대학 학점이 선동열 방어율 수준이다." 과거 대학가에서 회자 되던 말이죠. 학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즐긴 분들이 자주 하던 얘기인데요, 이제는 옛말이 됐습니다. 학점이 그 정도로 낮으면 취업을 하기도, 대학원을 진학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학 성적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고등학생 못지 않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 전공시험을 앞두고 시험지가 유출됐고, 교수들이 이를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학생들 마음이 어떨까요? 지난해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요. 1년여 만에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 조교가 건넨 이메일 계정…안에는 전공 시험지 파일이

지난해 10월, 광주 모 대학교의 학생 A 씨는 학과 조교 B 씨와 전공 시험 얘기를 나눴습니다. A 학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B 조교에게 시험 과목이 많다며 걱정을 털어놨습니다. B 조교는 도움을 주겠다며 자신의 이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A 학생에게 알려줬습니다.


B 조교의 이메일 계정에 접속한 A 학생은 깜짝 놀랐습니다. 시험에 참고될 '족보' 정도의 자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뒤 치러지는 2학기 중간고사의 전공 과목 시험지 파일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A 학생이 본 파일은 이미 출제가 끝난 시험지로, 인쇄를 앞두고 교수들이 B 조교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A 학생은 문제를 확인하고 시험지를 출력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부정행위자로 몰릴 게 두렵기도 했습니다. A 학생은 결국 교수들을 찾아가 시험지를 통째로 건네받은 사실을 알렸습니다.

■ 학생이 시험지 유출 사실 알렸지만…아무 조치 안 한 교수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학과 교수들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을 학교 측에 공식 보고하지도 않았고, 학과 차원에서 시험 문제를 고치자는 논의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A 학생은 "시험 보기 전에 자진 신고를 했지만, '이런 일이 너한테만 있는 거 같냐'며 그냥 덮고 넘어갔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습니다. A 학생은 또 "시험을 따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까지 얘기했지만, 그때마다 (교수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 봐라'라고 하며 의견을 묵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시험은 그 상태로 진행됐고, 성적도 매겨졌습니다.

■ "시험 범위 넓은데"…분노하는 학생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
지난해의 '시험지 유출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최근이었습니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에 이 사건을 알리는 글이 올라오면서부터였습니다. 학생들의 분노는 컸습니다. 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관련자들의 징계와 함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어느 학생은 "학과의 특성상 시험 범위가 넓어서, 평소에 공부하지 않으면 학점을 잘 받을 수 없다"며 "미리 시험지를 받아서 성적이 잘 나왔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시험지를 유출한 조교와 이를 받아본 학생이 가장 큰 문제지만, 교수와 학교 측에 더 화가 난다"며 "적극적인 조치도 하지 않았고, 성적 손해를 본 학생들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고 꼬집었습니다.

■ 교수들은 "학교 명예 위해 덮어 달라"

질타가 빗발치고 나서야 학과 교수들은 학생들과 대화에 나섰습니다. 교수들은 시험지 유출 사실을 인지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당시 판단을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들은 여기서도 문제를 키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히려 교수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고시가 얼마 안 남았다"며 "학교의 명예를 위해 여기서 마무리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태도에 학생들은 더 실망했습니다. 한 학생은 "(교수님이) '그럴 수도 있다', '같은 학생, 같은 학과 출신이니까 봐주자',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셔서 학생 반발이 더 컸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 교수는 KBS와의 통화에서 "A 학생이 시험이 끝난 다음에 찾아와 시험지 유출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A 학생의 성적을 직전 학기 기준으로 점수를 부여하는 등 성적의 이득을 얻지 않도록 조치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시험지 유출사건에 대해 사실 관계 파악에 나섰다고 알리는 학과 게시물
■ 교육부, 진상조사 요구…학교는 조사 중

'시험지 유출 사건'이 국민신문고에 민원 형태로 들어오자, 교육부는 학교 측에 사실관계 확인과 보고를 요구했습니다. 뒤늦게 조사에 나선 학교 측은 시험지 유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학교 측은 시험지가 유출된 사례가 또 있는지, 교수들의 조치가 적절했는지도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대학교 시험지가 유출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동국대에서 학생이 강사 이메일에 몰래 접속해 시험 문제를 빼냈습니다. 2016년 전북대에서는 근로장학생이 시험지를 촬영한 뒤 유출해 관련 학생들이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 학점이 마치 고교 내신처럼 중요해지면서, 그만큼 공정성에 대한 요구도 커지는 상황이죠. 출제 관리실을 두고 매뉴얼에 따라 시험을 내는 고등학교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엄정한 학사 관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대학계와 교육 당국이 새겨봐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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