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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남] 집주인이 지정한 벽에 에어컨 설치하다 ‘쾅’…누구 책임?
입력 2021.11.22 (14:22) 취재K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A 씨는 집주인 B 씨와 서울 종로구 소재 한옥주택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지난해 4월부터 거주했습니다.

A 씨는 B 씨 동의를 얻어 에어컨을 설치하기로 하고, 설치업자에게 작업을 의뢰했습니다.

A 씨는 당초 도로 쪽 벽에 실외기 구멍을 내려다가, B 씨 측의 요구로 화장실 벽 쪽으로 구멍을 내게 됐습니다.

설치업체 직원은 건식코어(벽 뚫는 기계)를 사용해 구멍을 뚫기 시작했는데, 당시 화장실 바깥에는 화장실 위쪽으로 연결되는 도시가스 배관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B 씨 측은 이 과정에서 도시가스 배관 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건식코어는 도시가스 배관과 충돌해 불꽃을 일으켰고,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벽 내부 목재 등이 타고 기와지붕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B 씨 측은 집 수리를 마친 뒤 A 씨와 설치업체를 상대로 주택 수리에 지출한 3천2백여만 원을 배상하라며 지난해 7월 소송을 냈습니다.

■ "주택 보존 의무 어겨" vs "불법 배관, 언급 없었다"

B 씨 측은 "A 씨는 주택 임차인으로 주택을 관리보존할 계약상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고, 설치업체는 에어컨 설치를 의뢰받은 사람으로 작업을 함에 있어 도시가스 배관 등 위험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 이를 회피해야 할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 씨와 설치업체는 "화재 당시 주택에 설치돼 있던 도시가스 배관은 도시가스사업법을 위반해 불법 시공된 것이고, 자재나 시공방법 등도 불법적인 것으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며 "원고가 위와 같은 배관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에어컨 공사를 승낙했고, 구멍의 위치 또한 원고가 지정했다"고 맞섰습니다.

A 씨 등은 이어 "B 씨 측이 지정한 위치에 보이지 않는 도시가스 배관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화재는 B 씨 측의 귀책사유로 발생할 것일 뿐, 피고들의 과실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 법원 "임차인 아닌 설치업체가 화재 손해 책임져야"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판사 김영아)은 지난달 5일, "설치업체가 원고 B 씨에게 2천2백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화재는 임차인 A 씨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발생한 것"이라며 "화재로 원고가 입은 손해에 대해 A 씨에게 채무불이행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없다"면서, A 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A 씨가 에어컨 설치를 의뢰한 건 '도급'에 해당되는데, 수급인은 도급인으로부터 독립해 그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므로 설치업체 등은 A 씨의 피용자라고 할 수 없다"며, "A 씨는 도급 또는 지시에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설치업자가 에어컨 설치를 하면서 제3자인 원고에게 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나 설치업체에 대해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에어컨 설치 공사를 의뢰받아 벽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경우 위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선 구멍을 내는 벽 안팎을 살펴 벽을 뚫는 과정에서 문제가 될 것이 없는지 확인해 안전하게 작업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엔 배관이 드러나 있는 경우 배관이 무엇이고 어디로 연결되는지 등을 확인해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배관 등이 문제되지 않도록 작업할 의무가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설치업체나 직원이 이러한 의무를 이행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이 화재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설치업체 직원 과실로 발생했고,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설치업체 측은 "구멍을 낼 위치를 집주인 측이 정했다"며 책임을 부인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원고가 화장실 쪽 벽에 구멍을 내라고 요구한 것 외에 벽에 구멍을 뚫을 위치까지 특정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만약 원고가 그 위치를 지정했더라도 에어컨 설치업자가 구멍을 뚫는 작업에 있어 부담하는 주의의무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다하지 않은 이상 화재는 여전히 설치업자 과실로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화재 당시 도시가스 배관 중 화장실 위쪽으로 지나는 부분이 은폐된 상태였던 점 △은폐배관은 스테인레스강관, 동관, 가스용금속플레시블 배관용 호스로 시공되어야 하는데, 화재 당시 도시가스 배관은 이음매 없는 구리 및 구리합금배관 또는 이음매 없는 니켈 동합금관으로 시공돼 있었던 점 △원고가 주택 리모델링공사나 외부 화장실 증축공사를 한 당사자로 배관 위치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보임에도 실외기 연결을 위한 구멍을 화장실 벽 쪽에 내도록 요구하면서 배관에 관한 사항을 고지하거나 주의를 환기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원고가 청구한 액수의 70%만을 손해로 인정했습니다.

집주인인 원고 B 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 [판결남] 집주인이 지정한 벽에 에어컨 설치하다 ‘쾅’…누구 책임?
    • 입력 2021-11-22 14:22:33
    취재K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A 씨는 집주인 B 씨와 서울 종로구 소재 한옥주택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지난해 4월부터 거주했습니다.

A 씨는 B 씨 동의를 얻어 에어컨을 설치하기로 하고, 설치업자에게 작업을 의뢰했습니다.

A 씨는 당초 도로 쪽 벽에 실외기 구멍을 내려다가, B 씨 측의 요구로 화장실 벽 쪽으로 구멍을 내게 됐습니다.

설치업체 직원은 건식코어(벽 뚫는 기계)를 사용해 구멍을 뚫기 시작했는데, 당시 화장실 바깥에는 화장실 위쪽으로 연결되는 도시가스 배관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B 씨 측은 이 과정에서 도시가스 배관 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건식코어는 도시가스 배관과 충돌해 불꽃을 일으켰고,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벽 내부 목재 등이 타고 기와지붕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B 씨 측은 집 수리를 마친 뒤 A 씨와 설치업체를 상대로 주택 수리에 지출한 3천2백여만 원을 배상하라며 지난해 7월 소송을 냈습니다.

■ "주택 보존 의무 어겨" vs "불법 배관, 언급 없었다"

B 씨 측은 "A 씨는 주택 임차인으로 주택을 관리보존할 계약상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고, 설치업체는 에어컨 설치를 의뢰받은 사람으로 작업을 함에 있어 도시가스 배관 등 위험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 이를 회피해야 할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 씨와 설치업체는 "화재 당시 주택에 설치돼 있던 도시가스 배관은 도시가스사업법을 위반해 불법 시공된 것이고, 자재나 시공방법 등도 불법적인 것으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며 "원고가 위와 같은 배관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에어컨 공사를 승낙했고, 구멍의 위치 또한 원고가 지정했다"고 맞섰습니다.

A 씨 등은 이어 "B 씨 측이 지정한 위치에 보이지 않는 도시가스 배관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화재는 B 씨 측의 귀책사유로 발생할 것일 뿐, 피고들의 과실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 법원 "임차인 아닌 설치업체가 화재 손해 책임져야"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판사 김영아)은 지난달 5일, "설치업체가 원고 B 씨에게 2천2백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화재는 임차인 A 씨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발생한 것"이라며 "화재로 원고가 입은 손해에 대해 A 씨에게 채무불이행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없다"면서, A 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A 씨가 에어컨 설치를 의뢰한 건 '도급'에 해당되는데, 수급인은 도급인으로부터 독립해 그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므로 설치업체 등은 A 씨의 피용자라고 할 수 없다"며, "A 씨는 도급 또는 지시에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설치업자가 에어컨 설치를 하면서 제3자인 원고에게 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나 설치업체에 대해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에어컨 설치 공사를 의뢰받아 벽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경우 위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선 구멍을 내는 벽 안팎을 살펴 벽을 뚫는 과정에서 문제가 될 것이 없는지 확인해 안전하게 작업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엔 배관이 드러나 있는 경우 배관이 무엇이고 어디로 연결되는지 등을 확인해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배관 등이 문제되지 않도록 작업할 의무가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설치업체나 직원이 이러한 의무를 이행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이 화재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설치업체 직원 과실로 발생했고,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설치업체 측은 "구멍을 낼 위치를 집주인 측이 정했다"며 책임을 부인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원고가 화장실 쪽 벽에 구멍을 내라고 요구한 것 외에 벽에 구멍을 뚫을 위치까지 특정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만약 원고가 그 위치를 지정했더라도 에어컨 설치업자가 구멍을 뚫는 작업에 있어 부담하는 주의의무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다하지 않은 이상 화재는 여전히 설치업자 과실로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화재 당시 도시가스 배관 중 화장실 위쪽으로 지나는 부분이 은폐된 상태였던 점 △은폐배관은 스테인레스강관, 동관, 가스용금속플레시블 배관용 호스로 시공되어야 하는데, 화재 당시 도시가스 배관은 이음매 없는 구리 및 구리합금배관 또는 이음매 없는 니켈 동합금관으로 시공돼 있었던 점 △원고가 주택 리모델링공사나 외부 화장실 증축공사를 한 당사자로 배관 위치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보임에도 실외기 연결을 위한 구멍을 화장실 벽 쪽에 내도록 요구하면서 배관에 관한 사항을 고지하거나 주의를 환기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원고가 청구한 액수의 70%만을 손해로 인정했습니다.

집주인인 원고 B 씨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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