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빚더미 앉은 日 천년 고도…“정치가 개혁 외면한 결과”
입력 2021.11.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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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시에 있는 유명 사찰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KBS
11월 11일 일본 교토(京都) 유명 사찰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엔 수학여행 온 초·중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일본 내 코로나19 상황이 점차 나아지면서 단계적 일상회복도 서서히 이뤄지는 모습입니다.
일본의 손꼽히는 역사·관광 도시인 교토 역시 그런데요. 기요미즈데라 근처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는 타니구치 유키코 씨는 "그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손님 수도 줄고 힘든 상황"이었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하게 되면 기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코로나보다 무서운 재정 적자
그런데 코로나19 이전에 교토시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온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한 해 수천억원씩 발생하고 있는 재정 적자입니다. 교토시 예산 규모는 약 17조 원대로 일본 대도시 중에서는 6위 정도에 해당하는데요. 교토시는 이 적자를 2005년부터 공채 상환기금으로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금은 '미래 채무에 대비해 적립한 기금'인데요. 불가피하게 사용을 하더라도 나중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하는, 마치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문제는 적자가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겁니다. 기금도 매년 사라지면서 몇 년 내 고갈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교토시가 추산해보니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5천억~6천억원씩, 적자가 총 2조 9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는데요. 일본 언론들은 이대로 가다간 '재정 재생단체'로의 전락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으로 치면 곧 '파산'을 의미합니다.
2000년대 중반 일본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파산한 홋카이도 유바리시(市)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죠.
교토시가 운영하는 지하철 ‘도자이센’. 1997년 개통 후 하루 이용 승객이 예상 목표(18만명)에 이른 적은 없다. KBS
■ 교토시 나락에 빠진 이유는?
재정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시영 지하철 도자이센'이었습니다. 거품 경제가 한창이던 1980~1990년대 공사비가 최고조일 때 건설이 이뤄졌습니다.
1997년 개통했을 땐 하루 승객이 18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후 목표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승객 예측에 실패한 것이죠. 지하철 적자가 매년 수백억원씩 나면서 지금까지 1조원 넘게 쌓인 적자를 시 재정으로 꾸역꾸역 메워 왔습니다.
교토시는 70살 이상 노인에게 사실상 무료로 버스·전철을 이용할 수 있는 '경로 승차권 제도'도 운영해 왔는데요. 문제는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1973년 3억엔 정도 들었던 비용이 2019년 50억 엔으로 17배 가까이 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토시는 한 때 타 지역보다 높은 보육사 처우 수준과 낮은 보육원 이용료를 자랑했는데요. 이런 보육 서비스가 지금은 적자 발생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70살 이상 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토시 경로 승차권. 버스와 전철을 무료, 또는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KBS
■ "이대로라면 10년 내 파산"
카도카와 다이사쿠(門川大作) 교토시장은 지난 6월 "이대로라면 교토시가 10년 내 파산할지 모른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두 달 뒤인 8월엔 '특단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행·재정 개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전체 시청 직원을 상대로 최대 6% 급여를 삭감하고 직원 550명을 감축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로 승차권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 '70살'→'75살 이상'으로 축소하기로 했고요. 어린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의 보육료 부담은 올리고, 교토시가 보육원에 지원했던 보조금은 삭감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반발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습니다. 급여 삭감과 실직의 공포를 한꺼번에 떠안게 된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일부 노인들조차 개혁이라고 하는 게 고작 경로 승차권 빼앗는 일이냐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73살 다부치 케이코 씨는 "경로 승차권이 있어서 노인들이 외출도 하고 쇼핑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면서 "이런 게 갑자기 없어지면 집에서 스트레스 쌓여 세상 떠날 일만 기다리게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 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시 전경. KBS
■ "정치가 개혁 회피한 결과"
교토시의 재정 개혁이 실패해 끝내 재정 재생단체가 되면 그 후는 더욱 암울해집니다.
유바리시처럼 중앙정부 통제를 받으며 구조조정을 통해 빚을 갚아나가야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세금은 오르고 복지는 쪼그라듭니다. 이에 못 견딘 주민들은 타 지역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1960년대 11만 명대였던 유바리시 인구는 결국 현재 7천 명 수준으로 급감했고, 지금도 빚을 갚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코로나19가 위기를 더욱 가중한 면도 없지 않겠지만 교토시에 있어 적자 재정이란 한 두 해 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초반에 문제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인지, 그랬다면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왜 그 때부터 안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모리 히로유키 리츠메이칸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는 "정치가 재정 개혁의 책임을 회피했다"면서 교토시의 재정 위기는 "그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또 "개혁을 미루게 되면 상처가 깊어지고, 빨리 그 구조가 보일 때 용기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초기에 반발을 두려워해 재정 개혁을 외면한 지역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책임이란 지적입니다.
파산의 기로에 선 천년 고도는 과연 어느 쪽으로 나아갈까요.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채무 30조원 시대를 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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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11-23 07:00:23
11월 11일 일본 교토(京都) 유명 사찰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엔 수학여행 온 초·중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일본 내 코로나19 상황이 점차 나아지면서 단계적 일상회복도 서서히 이뤄지는 모습입니다.
일본의 손꼽히는 역사·관광 도시인 교토 역시 그런데요. 기요미즈데라 근처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는 타니구치 유키코 씨는 "그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손님 수도 줄고 힘든 상황"이었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하게 되면 기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코로나보다 무서운 재정 적자
그런데 코로나19 이전에 교토시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온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한 해 수천억원씩 발생하고 있는 재정 적자입니다. 교토시 예산 규모는 약 17조 원대로 일본 대도시 중에서는 6위 정도에 해당하는데요. 교토시는 이 적자를 2005년부터 공채 상환기금으로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금은 '미래 채무에 대비해 적립한 기금'인데요. 불가피하게 사용을 하더라도 나중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하는, 마치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문제는 적자가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겁니다. 기금도 매년 사라지면서 몇 년 내 고갈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교토시가 추산해보니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5천억~6천억원씩, 적자가 총 2조 9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는데요. 일본 언론들은 이대로 가다간 '재정 재생단체'로의 전락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으로 치면 곧 '파산'을 의미합니다.
2000년대 중반 일본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파산한 홋카이도 유바리시(市)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죠.
■ 교토시 나락에 빠진 이유는?
재정 위기의 주범은 바로 '시영 지하철 도자이센'이었습니다. 거품 경제가 한창이던 1980~1990년대 공사비가 최고조일 때 건설이 이뤄졌습니다.
1997년 개통했을 땐 하루 승객이 18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후 목표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승객 예측에 실패한 것이죠. 지하철 적자가 매년 수백억원씩 나면서 지금까지 1조원 넘게 쌓인 적자를 시 재정으로 꾸역꾸역 메워 왔습니다.
교토시는 70살 이상 노인에게 사실상 무료로 버스·전철을 이용할 수 있는 '경로 승차권 제도'도 운영해 왔는데요. 문제는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1973년 3억엔 정도 들었던 비용이 2019년 50억 엔으로 17배 가까이 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토시는 한 때 타 지역보다 높은 보육사 처우 수준과 낮은 보육원 이용료를 자랑했는데요. 이런 보육 서비스가 지금은 적자 발생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 "이대로라면 10년 내 파산"
카도카와 다이사쿠(門川大作) 교토시장은 지난 6월 "이대로라면 교토시가 10년 내 파산할지 모른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두 달 뒤인 8월엔 '특단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행·재정 개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전체 시청 직원을 상대로 최대 6% 급여를 삭감하고 직원 550명을 감축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로 승차권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 '70살'→'75살 이상'으로 축소하기로 했고요. 어린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의 보육료 부담은 올리고, 교토시가 보육원에 지원했던 보조금은 삭감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반발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습니다. 급여 삭감과 실직의 공포를 한꺼번에 떠안게 된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일부 노인들조차 개혁이라고 하는 게 고작 경로 승차권 빼앗는 일이냐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73살 다부치 케이코 씨는 "경로 승차권이 있어서 노인들이 외출도 하고 쇼핑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면서 "이런 게 갑자기 없어지면 집에서 스트레스 쌓여 세상 떠날 일만 기다리게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정치가 개혁 회피한 결과"
교토시의 재정 개혁이 실패해 끝내 재정 재생단체가 되면 그 후는 더욱 암울해집니다.
유바리시처럼 중앙정부 통제를 받으며 구조조정을 통해 빚을 갚아나가야 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세금은 오르고 복지는 쪼그라듭니다. 이에 못 견딘 주민들은 타 지역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1960년대 11만 명대였던 유바리시 인구는 결국 현재 7천 명 수준으로 급감했고, 지금도 빚을 갚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코로나19가 위기를 더욱 가중한 면도 없지 않겠지만 교토시에 있어 적자 재정이란 한 두 해 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초반에 문제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인지, 그랬다면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왜 그 때부터 안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모리 히로유키 리츠메이칸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는 "정치가 재정 개혁의 책임을 회피했다"면서 교토시의 재정 위기는 "그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또 "개혁을 미루게 되면 상처가 깊어지고, 빨리 그 구조가 보일 때 용기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초기에 반발을 두려워해 재정 개혁을 외면한 지역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책임이란 지적입니다.
파산의 기로에 선 천년 고도는 과연 어느 쪽으로 나아갈까요.
지난해 지방자치단체 채무 30조원 시대를 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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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기 기자 rememb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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