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건 호통 뿐…전두환, 사과는 없었다
입력 2021.11.23 (21:10)
수정 2021.11.2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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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골목.
측근들을 뒤에 세운 채 전두환 씨는 언짢은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는 겁니다.
소위 골목 성명을 내놓고 전 씨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향했지만, 이튿날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26년 지난 오늘(23일) 같은 골목, 같은 자리에서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전히 사과 한 마디도, 그날의 진실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안다영 기잡니다.
[리포트]
회고록 내용이 문제가 돼 재판을 받기 위해 32년 만에 광주를 찾았던 전두환 씨.
과오에 대한 사과 요구에 돌아온 답은 호통이었습니다.
[전두환/2019년 3월 :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이거 왜 이래! (광주 시민들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세요? 사과할 생각 없으십니까?)"]
전 씨 태도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전두환/2020년 11월 : "(대국민 사과하세요!) 말 조심해 이놈아!"]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자 백담사로 가면서 한 대국민 사과.
친인척 비리는 사과했지만,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선 비극적인 결과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딱 거기까지로 그쳤습니다.
[전두환/1988년 11월 :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1년 뒤,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서도, 5.18 발포 문제가 자위권 행사로 불가피했다는 변명을 되풀이했습니다.
[전두환/1989년 12월 :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1995년, 내란 등의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집 앞, '골목 성명'에서 색깔론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1995년 '골목 성명'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12.12와 5.18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돼 법적 책임이 인정됐을 때도 역시 사과는 없었습니다.
2003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동'이라 부르며, 계엄군 진압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가족을 통해서나마 광주에 사과의 뜻을 전했고, 그래서 죽음을 계기로 다른 평가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씨는 국민 앞에 사과할 마지막 계기에서도 끝까지 입을 닫았습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골목.
측근들을 뒤에 세운 채 전두환 씨는 언짢은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는 겁니다.
소위 골목 성명을 내놓고 전 씨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향했지만, 이튿날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26년 지난 오늘(23일) 같은 골목, 같은 자리에서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전히 사과 한 마디도, 그날의 진실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안다영 기잡니다.
[리포트]
회고록 내용이 문제가 돼 재판을 받기 위해 32년 만에 광주를 찾았던 전두환 씨.
과오에 대한 사과 요구에 돌아온 답은 호통이었습니다.
[전두환/2019년 3월 :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이거 왜 이래! (광주 시민들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세요? 사과할 생각 없으십니까?)"]
전 씨 태도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전두환/2020년 11월 : "(대국민 사과하세요!) 말 조심해 이놈아!"]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자 백담사로 가면서 한 대국민 사과.
친인척 비리는 사과했지만,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선 비극적인 결과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딱 거기까지로 그쳤습니다.
[전두환/1988년 11월 :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1년 뒤,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서도, 5.18 발포 문제가 자위권 행사로 불가피했다는 변명을 되풀이했습니다.
[전두환/1989년 12월 :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1995년, 내란 등의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집 앞, '골목 성명'에서 색깔론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1995년 '골목 성명'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12.12와 5.18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돼 법적 책임이 인정됐을 때도 역시 사과는 없었습니다.
2003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동'이라 부르며, 계엄군 진압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가족을 통해서나마 광주에 사과의 뜻을 전했고, 그래서 죽음을 계기로 다른 평가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씨는 국민 앞에 사과할 마지막 계기에서도 끝까지 입을 닫았습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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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1-11-23 22: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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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골목.
측근들을 뒤에 세운 채 전두환 씨는 언짢은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는 겁니다.
소위 골목 성명을 내놓고 전 씨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향했지만, 이튿날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26년 지난 오늘(23일) 같은 골목, 같은 자리에서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전히 사과 한 마디도, 그날의 진실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안다영 기잡니다.
[리포트]
회고록 내용이 문제가 돼 재판을 받기 위해 32년 만에 광주를 찾았던 전두환 씨.
과오에 대한 사과 요구에 돌아온 답은 호통이었습니다.
[전두환/2019년 3월 :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이거 왜 이래! (광주 시민들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세요? 사과할 생각 없으십니까?)"]
전 씨 태도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전두환/2020년 11월 : "(대국민 사과하세요!) 말 조심해 이놈아!"]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자 백담사로 가면서 한 대국민 사과.
친인척 비리는 사과했지만,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선 비극적인 결과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딱 거기까지로 그쳤습니다.
[전두환/1988년 11월 :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1년 뒤,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서도, 5.18 발포 문제가 자위권 행사로 불가피했다는 변명을 되풀이했습니다.
[전두환/1989년 12월 :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1995년, 내란 등의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집 앞, '골목 성명'에서 색깔론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1995년 '골목 성명'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12.12와 5.18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돼 법적 책임이 인정됐을 때도 역시 사과는 없었습니다.
2003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동'이라 부르며, 계엄군 진압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가족을 통해서나마 광주에 사과의 뜻을 전했고, 그래서 죽음을 계기로 다른 평가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씨는 국민 앞에 사과할 마지막 계기에서도 끝까지 입을 닫았습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골목.
측근들을 뒤에 세운 채 전두환 씨는 언짢은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정치적 탄압이라는 겁니다.
소위 골목 성명을 내놓고 전 씨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향했지만, 이튿날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26년 지난 오늘(23일) 같은 골목, 같은 자리에서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전히 사과 한 마디도, 그날의 진실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안다영 기잡니다.
[리포트]
회고록 내용이 문제가 돼 재판을 받기 위해 32년 만에 광주를 찾았던 전두환 씨.
과오에 대한 사과 요구에 돌아온 답은 호통이었습니다.
[전두환/2019년 3월 :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이거 왜 이래! (광주 시민들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세요? 사과할 생각 없으십니까?)"]
전 씨 태도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전두환/2020년 11월 : "(대국민 사과하세요!) 말 조심해 이놈아!"]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자 백담사로 가면서 한 대국민 사과.
친인척 비리는 사과했지만,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선 비극적인 결과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딱 거기까지로 그쳤습니다.
[전두환/1988년 11월 :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1년 뒤,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서도, 5.18 발포 문제가 자위권 행사로 불가피했다는 변명을 되풀이했습니다.
[전두환/1989년 12월 :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1995년, 내란 등의 혐의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는 집 앞, '골목 성명'에서 색깔론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전두환/1995년 '골목 성명'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 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12.12와 5.18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돼 법적 책임이 인정됐을 때도 역시 사과는 없었습니다.
2003년 언론 인터뷰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동'이라 부르며, 계엄군 진압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가족을 통해서나마 광주에 사과의 뜻을 전했고, 그래서 죽음을 계기로 다른 평가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씨는 국민 앞에 사과할 마지막 계기에서도 끝까지 입을 닫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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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영 기자 brown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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