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전두환과 악연’ 무등산 충민사의 주인공 전상의 장군

입력 2021.11.2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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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해군 어모장군(경호실장)이던 전상의 인조반정으로 개천군수 좌천
-정묘호란 때 평남 안주성에서 후금과 싸우다 순국, 충신 정려 받아
-순절 358년 만인 1985년 문중에서 무등산 자락에 사당 충민사 건립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 받아 수모...전경환 이름 적힌 공적비도 수난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1월 24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ql78Ydkm6t8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라고 하는 사당이 있고요. 그리고 광주 시내에 구성로라고 하는 도로명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전상의라고 하는 장군이에요. 전상의 장군은 어제 죽은 전두환 씨와도 악연이 있는 분이신데 그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무등산을 오르다 보면 사당 충민사가 있잖아요. 가끔 마주치는 시민 많으실 텐데, 그런데 주인공이 누굴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 노성태: 많은 시민이 낯설어 하시는 분이시지요. 광주를 대표하는 도로명 중에 금남로나 충장로는 주인공이 정충신 김덕령, 아시는 분이 많은데 전상의 장군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인조 5년, 그러니까 후금의 3만 대군을 안주성에서 막다가 장렬히 순절한 분이 전상의 장군이고 그 전상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서 붙여진 도로명이 아까 구성로이고 그분을 기리는 사당이 충민사인데. 전상의 장군은 충신 정려를 받았던 광주의 3충신 중 한 분이기도 하지요.

◇ 지창환: 광주의 3충신은 누구누구인가요?

◆ 노성태: 광주읍지 충신전에 14명의 충신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 그리고 임진왜란 의병총사령관이었던 광주 출신 김덕령, 그리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린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했던 전상의 장군, 14명 가운데 3명만 나라에서 충신 정려를 받았던 분입니다. 그래서 이 3명을 광주의 3충신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지창환: 광주의 3충신 고경명, 김덕령 장군은 잘 알겠는데 전상의 장군 어떤 분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1575년에 태어나셨으니까 16세기 후반에 태어나셨던 분이신데 어디서 태어나냐 하면 광주군 도천면이면 지금 광주광역시 구동 정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태어나셨고요. 그리고 선조 36년, 1603년 29살에 무과에 급제를 해서 훈련원 주부, 변방 만호 첨사, 수군장수로서 무인의 길을 걷다가 광해군 16년 내금위 어모장군에 임명됩니다. 어모장군은 정3품 무관직으로 임금의 호위, 대궐의 경비를 맡는 내금위 최고책임자이니까 오늘로 따지면 청와대 경호실장 정도 되는 매우 중요한 직책까지 오르게 되는 분이지요.

◇ 지창환: 광해군의 어모장군. 청와대 경호실장 급이면 광해군의 최측근인데요? 그런데 광해군이 쫓겨나잖아요.

◆ 노성태: 네. 인조반정이지요.

◇ 지창환: 같은 공동운명체였겠어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광해군이 쫓겨난 사건이 인조반정인데 인조반정으로 전상의 장군의 운명마저 송두리째 바꿔지는 것이지요. 반정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서인입니다. 그런데 서인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안도 개천군수로 좌천되는데 개천군수가 종4품이니까 정3품에서 종4품으로 강등되어서 좌천됐기 때문에 정치 보복을 당한 셈이지요. 구성부사 시절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이 친명 배금정책을 실시했고 그래서 후금이 쳐들어온 것이 정묘호란인데 당시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성 북상로에서 후금을 막다가 순국하신 분이고 그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 지창환: 전상의 장군이 돌아가시자 적장도 예를 표했다면서요?

◆ 노성태: 세가 기울자 임금이 계시는 한양을 향해서 갑옷을 고쳐 입고 그리고 사배를 올린 뒤에 칼을 뽑아서 목을 찔러서 백상로 아래에 떨어져서 자결합니다. 오랑캐 사람들도 쳐다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충열 열사의 시체는 일반 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백상로 앞에 묻어두고 표식을 해두면서 예를 차렸던 것이지요.

◇ 지창환: 정묘호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잖아요. 그런데 사당인 충민사는 300~400년 후에 세워져요. 어떻게 된 것인가요?

◆ 노성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것이지요.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는 광해군의 어모장군으로 최측근이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변방으로 쫓겨났고 그리고 정묘호란 당시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인조는 그가 죽자 예조정랑을 파견해서 예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고 사패지 30리를 하사하여 충절을 기렸고 또 숙종 10년에는 충신 정려가 내려지면서 광주의 3충신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지요.

◇ 지창환: 순절 후에 왕이 충신 정려를 내리고 장사까지 지내줬는데 정치적 박해를 받았단 말이에요. 박해가 심했던 모양이지요?

◆ 노성태: 정치적 박해 그 정도에서 끝났던 것이고요.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것은 사당 건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상의 장군이 돌아가시자 추증하고 사당에 배향했었던 것은 당시 안주성 전투에 참여했던 동급의 장군들, 그러니까 서인 출신의 남이홍이라든가 김준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서인 출신의 남이홍, 김준은 곧바로 임금이 시호도 내려주고 충민사의 주력으로 모시지만 반대편에 섰던 전상의 장군은 밀려나고 시호도 내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79년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그리고 358년 만인가요? 1985년에 무등산 자락에 지금 말씀드린 충민사가 준공이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아까 전두환 씨와 악연이 있다고 했는데요. 전상의 장군은 한동안 어제 사망한 전두환의 조상이고 충민사도 전두환이 건립했다, 그렇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85년도에 충민사가 건립됐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85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씨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을 했었던 전두환과 같은 성 씨인 전상의 사당 건립을 광주 시민들이 오해해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특히 전두환의 동생이 전경환인데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 건립은 광주 시민의 분노를 샀고, 또 공적비가 땅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전경환의 이름이 공적비에 쓰여 있었다. 왜 그런가요?

◆ 노성태: 사연은 이런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서울 인사동에 전상의 장군과 관련된 유물 세트가 나오게 되고 담당자는 그 유품을 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의 동생, 그때 새마을운동 총재였잖아요. 전경환에게 보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품을 확인해보니까 전두환, 전경환은 전주(완산) 전 씨인데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 씨거든요. 그러니까 직접 조상이 아니니까 전경환이 전상의의 유품을 국립민속박물에 기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985년 충민사가 세워지고 충민사에 유물관이 만들어지니까 기증자 전경환의 이름으로 유품 일부가 충민사에 보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품을 기증한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공적비가 세워지게 됐고 광주 시민이 분노하자 땅에 파묻히는 해프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는 전두환의 지원과 관계없이 문중의 노력과 도비, 시비로 건립이 되었지만 건립 시점 공적비 등이 문제가 되어서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연이었던 셈입니다.

◇ 지창환: 충민사 사당 크기가 25평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에피소드가 있다면서요?

◆ 노성태: 처음 크기는 20평 정도로 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의 상징 인물이 충장공 김덕령인데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 충장사가 참고로 말씀드리면 23평이거든요. 당시 광주 시장이었던 분이 전상의 장군을 집권자인 전두환의 조상으로 알고 아부했던 것이지요. 25평으로 하자고 했고, 25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은 파가 다른 전 씨였잖아요. 아무튼 시장의 과잉 충성이라고 할까요? 25평 사당이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지창환: 오해와 박해로 얼룩진 일생을 사셨군요. 광주의 자랑이잖아요. 그래도.

◆ 노성태: 그렇습니다. 전상의 장군은 광해군의 어모장군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핍박을 받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 백상로에서 마지막 화살 한 발까지 쏘면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충신이지요. 서인이 아니라는 정치적 입장 차이로 핍박받고 사당이 세워지면서 당시 권력자였던 전두환과 성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해받아서는 안 될 것 같고요. 이제 전상의 장군은 광주의 자랑이어야 될 것 같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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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4 12: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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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어모장군(경호실장)이던 전상의 인조반정으로 개천군수 좌천<br />-정묘호란 때 평남 안주성에서 후금과 싸우다 순국, 충신 정려 받아<br />-순절 358년 만인 1985년 문중에서 무등산 자락에 사당 충민사 건립<br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 받아 수모...전경환 이름 적힌 공적비도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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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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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라고 하는 사당이 있고요. 그리고 광주 시내에 구성로라고 하는 도로명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전상의라고 하는 장군이에요. 전상의 장군은 어제 죽은 전두환 씨와도 악연이 있는 분이신데 그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무등산을 오르다 보면 사당 충민사가 있잖아요. 가끔 마주치는 시민 많으실 텐데, 그런데 주인공이 누굴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 노성태: 많은 시민이 낯설어 하시는 분이시지요. 광주를 대표하는 도로명 중에 금남로나 충장로는 주인공이 정충신 김덕령, 아시는 분이 많은데 전상의 장군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인조 5년, 그러니까 후금의 3만 대군을 안주성에서 막다가 장렬히 순절한 분이 전상의 장군이고 그 전상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서 붙여진 도로명이 아까 구성로이고 그분을 기리는 사당이 충민사인데. 전상의 장군은 충신 정려를 받았던 광주의 3충신 중 한 분이기도 하지요.

◇ 지창환: 광주의 3충신은 누구누구인가요?

◆ 노성태: 광주읍지 충신전에 14명의 충신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 그리고 임진왜란 의병총사령관이었던 광주 출신 김덕령, 그리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린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했던 전상의 장군, 14명 가운데 3명만 나라에서 충신 정려를 받았던 분입니다. 그래서 이 3명을 광주의 3충신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지창환: 광주의 3충신 고경명, 김덕령 장군은 잘 알겠는데 전상의 장군 어떤 분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1575년에 태어나셨으니까 16세기 후반에 태어나셨던 분이신데 어디서 태어나냐 하면 광주군 도천면이면 지금 광주광역시 구동 정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태어나셨고요. 그리고 선조 36년, 1603년 29살에 무과에 급제를 해서 훈련원 주부, 변방 만호 첨사, 수군장수로서 무인의 길을 걷다가 광해군 16년 내금위 어모장군에 임명됩니다. 어모장군은 정3품 무관직으로 임금의 호위, 대궐의 경비를 맡는 내금위 최고책임자이니까 오늘로 따지면 청와대 경호실장 정도 되는 매우 중요한 직책까지 오르게 되는 분이지요.

◇ 지창환: 광해군의 어모장군. 청와대 경호실장 급이면 광해군의 최측근인데요? 그런데 광해군이 쫓겨나잖아요.

◆ 노성태: 네. 인조반정이지요.

◇ 지창환: 같은 공동운명체였겠어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광해군이 쫓겨난 사건이 인조반정인데 인조반정으로 전상의 장군의 운명마저 송두리째 바꿔지는 것이지요. 반정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서인입니다. 그런데 서인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안도 개천군수로 좌천되는데 개천군수가 종4품이니까 정3품에서 종4품으로 강등되어서 좌천됐기 때문에 정치 보복을 당한 셈이지요. 구성부사 시절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이 친명 배금정책을 실시했고 그래서 후금이 쳐들어온 것이 정묘호란인데 당시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성 북상로에서 후금을 막다가 순국하신 분이고 그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 지창환: 전상의 장군이 돌아가시자 적장도 예를 표했다면서요?

◆ 노성태: 세가 기울자 임금이 계시는 한양을 향해서 갑옷을 고쳐 입고 그리고 사배를 올린 뒤에 칼을 뽑아서 목을 찔러서 백상로 아래에 떨어져서 자결합니다. 오랑캐 사람들도 쳐다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충열 열사의 시체는 일반 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백상로 앞에 묻어두고 표식을 해두면서 예를 차렸던 것이지요.

◇ 지창환: 정묘호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잖아요. 그런데 사당인 충민사는 300~400년 후에 세워져요. 어떻게 된 것인가요?

◆ 노성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것이지요.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는 광해군의 어모장군으로 최측근이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변방으로 쫓겨났고 그리고 정묘호란 당시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인조는 그가 죽자 예조정랑을 파견해서 예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고 사패지 30리를 하사하여 충절을 기렸고 또 숙종 10년에는 충신 정려가 내려지면서 광주의 3충신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지요.

◇ 지창환: 순절 후에 왕이 충신 정려를 내리고 장사까지 지내줬는데 정치적 박해를 받았단 말이에요. 박해가 심했던 모양이지요?

◆ 노성태: 정치적 박해 그 정도에서 끝났던 것이고요.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것은 사당 건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상의 장군이 돌아가시자 추증하고 사당에 배향했었던 것은 당시 안주성 전투에 참여했던 동급의 장군들, 그러니까 서인 출신의 남이홍이라든가 김준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서인 출신의 남이홍, 김준은 곧바로 임금이 시호도 내려주고 충민사의 주력으로 모시지만 반대편에 섰던 전상의 장군은 밀려나고 시호도 내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79년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그리고 358년 만인가요? 1985년에 무등산 자락에 지금 말씀드린 충민사가 준공이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아까 전두환 씨와 악연이 있다고 했는데요. 전상의 장군은 한동안 어제 사망한 전두환의 조상이고 충민사도 전두환이 건립했다, 그렇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85년도에 충민사가 건립됐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85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씨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을 했었던 전두환과 같은 성 씨인 전상의 사당 건립을 광주 시민들이 오해해서 미움을 받게 됩니다. 특히 전두환의 동생이 전경환인데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 건립은 광주 시민의 분노를 샀고, 또 공적비가 땅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 지창환: 전경환의 이름이 공적비에 쓰여 있었다. 왜 그런가요?

◆ 노성태: 사연은 이런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서울 인사동에 전상의 장군과 관련된 유물 세트가 나오게 되고 담당자는 그 유품을 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의 동생, 그때 새마을운동 총재였잖아요. 전경환에게 보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품을 확인해보니까 전두환, 전경환은 전주(완산) 전 씨인데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 씨거든요. 그러니까 직접 조상이 아니니까 전경환이 전상의의 유품을 국립민속박물에 기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985년 충민사가 세워지고 충민사에 유물관이 만들어지니까 기증자 전경환의 이름으로 유품 일부가 충민사에 보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품을 기증한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공적비가 세워지게 됐고 광주 시민이 분노하자 땅에 파묻히는 해프닝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는 전두환의 지원과 관계없이 문중의 노력과 도비, 시비로 건립이 되었지만 건립 시점 공적비 등이 문제가 되어서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연이었던 셈입니다.

◇ 지창환: 충민사 사당 크기가 25평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에피소드가 있다면서요?

◆ 노성태: 처음 크기는 20평 정도로 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의 상징 인물이 충장공 김덕령인데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 충장사가 참고로 말씀드리면 23평이거든요. 당시 광주 시장이었던 분이 전상의 장군을 집권자인 전두환의 조상으로 알고 아부했던 것이지요. 25평으로 하자고 했고, 25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은 파가 다른 전 씨였잖아요. 아무튼 시장의 과잉 충성이라고 할까요? 25평 사당이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지창환: 오해와 박해로 얼룩진 일생을 사셨군요. 광주의 자랑이잖아요. 그래도.

◆ 노성태: 그렇습니다. 전상의 장군은 광해군의 어모장군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핍박을 받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 백상로에서 마지막 화살 한 발까지 쏘면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충신이지요. 서인이 아니라는 정치적 입장 차이로 핍박받고 사당이 세워지면서 당시 권력자였던 전두환과 성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해받아서는 안 될 것 같고요. 이제 전상의 장군은 광주의 자랑이어야 될 것 같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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