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상 후유증 겪다 숨진 채 발견…아물지 않은 5·18 상처

입력 2021.11.24 (21:21) 수정 2021.11.24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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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두환 씨가 사망한 어제(23일), 세상을 떠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5.18 당시 총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던 60대 남성도 숨진 채 발견됐는데, 이 남성, 40여 년의 고통을 유서에 남겼습니다.

이처럼 5·18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만 40명이 넘습니다.

김애린 기잡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광주에 일을 보러 온 20대 청년.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광주에 남습니다.

총탄에 쓰러진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던 청년은 자신도 계엄군의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이 청년은 총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와중에도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등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고 이광영 씨/2019년 5월 : "(헬기가 두 번을 이동하면서) 제가 타고 있는 차량을 집중적으로 사격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다친 사람은 없고..."]

하지만 이광영 씨는 끝내 그날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 씨는 유서에 5·18에 대한 원한이나 서운함은 모두 잊고 가겠다면서 오랜 기간 통증에 시달려 왔다고 썼습니다.

이 씨는 최근까지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통증을 참아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강상원/고 이광영 씨 지인 : "2~3분에 한 번씩 통증이 와요. 그럼 막 몸이 오그라들면서 통증을 이겨내고, 또 이야기하다가 또 갑자기 통증이.."]

5월 단체와 학계 조사 결과 5·18 당시 총상을 입거나 정신적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상자는 확인된 것만 40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박영순/전 5·18부상자회장 : "그때 당시 총상에 의해서 돌아가신 분은 몇 명이고, 또 부상을 당하신 분은 몇명이고, 그 이후에 총상으로 인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전혀 실태 조사가 안 되어 있죠."]

5·18 이후 4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부상자들은 여전히 최초 발포 명령자도 밝히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애린입니다.

촬영기자:박석수 조민웅

[앵커]

전두환 씨 때문에 고초를 겪은 사람들.

광주 시민들 외에도 여럿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기회도 빼앗겼구나"

1984년, 아홉 살의 나이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한종선 씨가 한 말입니다.

아직도 불끄고 잠들지 못할 정도로 악몽같던 그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 동생이) 야구 구경을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침을 뱉었다고 중부경찰서에 첫 사례로 끌려갔습니다...4주 후에 중부경찰서로 갔는데 동생이 저를 몰라봐요”]

삼청교육대 피해자와 가족들 역시 40년 지난 지금까지도 피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생생히 떠오른다는데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사과도 반성도 없는 죽음은 또다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겼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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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상 후유증 겪다 숨진 채 발견…아물지 않은 5·18 상처
    • 입력 2021-11-24 21:21:26
    • 수정2021-11-24 21:35:03
    뉴스 9
[앵커]

전두환 씨가 사망한 어제(23일), 세상을 떠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5.18 당시 총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던 60대 남성도 숨진 채 발견됐는데, 이 남성, 40여 년의 고통을 유서에 남겼습니다.

이처럼 5·18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만 40명이 넘습니다.

김애린 기잡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광주에 일을 보러 온 20대 청년.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광주에 남습니다.

총탄에 쓰러진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던 청년은 자신도 계엄군의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이 청년은 총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와중에도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등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고 이광영 씨/2019년 5월 : "(헬기가 두 번을 이동하면서) 제가 타고 있는 차량을 집중적으로 사격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다친 사람은 없고..."]

하지만 이광영 씨는 끝내 그날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 씨는 유서에 5·18에 대한 원한이나 서운함은 모두 잊고 가겠다면서 오랜 기간 통증에 시달려 왔다고 썼습니다.

이 씨는 최근까지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통증을 참아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강상원/고 이광영 씨 지인 : "2~3분에 한 번씩 통증이 와요. 그럼 막 몸이 오그라들면서 통증을 이겨내고, 또 이야기하다가 또 갑자기 통증이.."]

5월 단체와 학계 조사 결과 5·18 당시 총상을 입거나 정신적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상자는 확인된 것만 40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박영순/전 5·18부상자회장 : "그때 당시 총상에 의해서 돌아가신 분은 몇 명이고, 또 부상을 당하신 분은 몇명이고, 그 이후에 총상으로 인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전혀 실태 조사가 안 되어 있죠."]

5·18 이후 4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부상자들은 여전히 최초 발포 명령자도 밝히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애린입니다.

촬영기자:박석수 조민웅

[앵커]

전두환 씨 때문에 고초를 겪은 사람들.

광주 시민들 외에도 여럿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기회도 빼앗겼구나"

1984년, 아홉 살의 나이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한종선 씨가 한 말입니다.

아직도 불끄고 잠들지 못할 정도로 악몽같던 그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 동생이) 야구 구경을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침을 뱉었다고 중부경찰서에 첫 사례로 끌려갔습니다...4주 후에 중부경찰서로 갔는데 동생이 저를 몰라봐요”]

삼청교육대 피해자와 가족들 역시 40년 지난 지금까지도 피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생생히 떠오른다는데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사과도 반성도 없는 죽음은 또다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겼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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