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100년 전 사라진 광주읍성…광주에도 읍성과 4대문이 있었다

입력 2021.12.01 (11:54) 수정 2021.12.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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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주읍성 1378년(고려 우왕 4년) 축조,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철거
-읍성 둘레 약 2.5Km, 순천 낙안읍성보다 크고 동래읍성보다는 작아
-˹해동지도˼ 등 18,19c 제작 옛 지도에 읍성 지리와 4대문 위치 기록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2월 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fqGa3h9MRA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노성태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원장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100년 전 광주에 읍성이 있었고 4대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읍성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광주 읍성이 왜 언제 건립되었는지, 그리고 왜 허물어졌는지, 오늘 많은 광주 사람들이 광주읍성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광주읍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광주읍성이 100년도 더 지난 시절에 사라졌는데 1910년대까지 있었다고 하셨으니까. 실물을 보신 분들은 지금은 없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아마 없겠지요. 광주읍성은 단종 2년,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라고 하는 책에 처음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1453년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서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2002년도에 광주읍성 유허 지표 조사 보고서가 나왔고. 그리고 2008년도에 광주읍성보고서가 간행이 됐는데 두 보고서에 의하면 읍성은 1378년, 그러니까 고려 말 우왕 4년대에 축조가 되었고요. 1916년도에 완전히 일제에 의해서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문인 서원문동문인 서원문

◇ 지창환: 우리 지역 읍성하면 오늘 말씀하신 광주읍성과 나주읍성 그리고 순천부 읍성은 들어봤거든요. 이들 읍성 말고도 순천 낙안읍성은 실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잖아요. 그러면 낙안읍성과 비교해서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 노성태: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72보(步)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253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이런 이야기가 이후에 호남 읍지라든가 광주 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 지창환: 8253척이라고 했는데요. 이것이 조선시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였던 모양이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일반인들 아마 감이 잘 안 오실 것이에요.

◇ 지창환: 지금은 미터를 사용하다 보니까 8253척하면 길이가 감이 잘 안 옵니다.

◆ 노성태: 네. 조선시대 때 사용됐던 1척은 지금으로 계산하면 31cm 정도 되거든요. 이것을 환산해 보면 읍성의 둘레가 2.5km, 높이가 2.8m 정도에 해당되는 읍성이었습니다. 부산에 동래읍성이 있는데 이것이 둘레가 5.4km였으니까 절반 정도의 크기였지만 앵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낙안읍성, 우리 지금 자주 가잖아요. 1.4km이고, 그리고 고창에도 남아 있는 고창읍성이 1.7km이니까 여기에 비교하면 큰 규모였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고요.

◇ 지창환: 낙안 읍성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실제로 광주 읍성은 전주 읍성, 남원, 나주 읍성과 함께 호남의 4대 읍성으로 꼽혔던 읍성이었지요.

◇ 지창환: 지금 광주 읍성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잖아요. 읍성의 당시 모습 확인 할 길 없나요?

19c ‘지방도’ 광주읍성19c ‘지방도’ 광주읍성

◆ 노성태: 남아 있습니다. 200여년 전에 제작된 옛 지도 속에 읍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라고 하는 지도를 보면 평지에 직사각형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4개의 성문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문 가까이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 자나 궐 자를 새겨서 위패를 모신 객사가 남아 있었고요. 그리고 목사가 근무하는 관청이 동헌인데 객사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읍성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1871년 간행된 지방도라고 하는 지도인데요. 이 지도에 보면 남쪽문 진남문에서 북쪽문 공북문도 이렇게 큰 길이 나 있고. 또 동쪽문인 서원문에서 서쪽문인 광리문을 관통하는 교통로가 똑같이 붉은 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 남북으로 났던 문과 동서로 났던 문이 십자형이잖아요. 그것이 만났던 지점이 당시 가장 북적대는 번화가였는데 지금 그 자리가 어디냐 하면 아마 광주 시민이 대부분 알 것이에요. 광주 우체국이 있는 자리, 우다방으로 불렸던 우체국 앞 사거리가 당시 번화가였는데 지금도 번화가인 것이지요.
◇ 지창환: 읍성 안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충장로 광주우체국이 있는 곳 십자로가 읍성의 중심지였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당시 읍성의 안쪽은 어디인가요?

◆ 노성태: 구시청 옛날 사거리 부분이 광산동이잖아요. 광산동을 포함하고 있고 금남로 1가에서 3가, 충장로 1가에서 3가. 그리고 황금동, 금동 일대가 옛 북성 안쪽에 해당되는 그러니까 읍성 안이었던 셈이지요.

◇ 지창환: 광주의 현재, 과거 번화가가 그 당시에도 중심이었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읍성하면 목사라는 사또도 살았을 것이고.

◆ 노성태: 네. 지금 같으면 시장님이시지요.

◇ 지창환: 목사 말고 또 어떤 분이 살았을까요?

◆ 노성태: 읍성 안에는 말씀드린 것처럼 객사나 동헌을 비롯한 많은 관청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고을 수령을 비롯해서 수령을 보좌했었던 아전이라든가 군졸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고요. 읍성 안에 살았던 자들은 이들 만은 아니었겠지요. 19세기 말 광주를 왔다 간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분, 그들이 광주 4대문 안에 살았던 진정한 주인공 읍민이었다는 것이지요.

◇ 지창환: 일반 백성들이 주로 많이 살았네요. 그러면 읍성 밖의 모습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북문 밖에 공북루라는 루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요. 서문 밖에는 향교가 있었고 사직단이 있었고 의열사가 표기되어 있는데 향교와 사직단은 남아 있고요. 의열사는 서구 벽진동에 있었던 사당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회재 박광옥, 충장공 김덕령을 모셨던 사당이었습니다. 남문 밖에는 경렬사라고 하는 사당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당시 동명동에 세워졌던 경렬로의 주인공이지요. 고려 말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인데 지금은 망월동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문 밖에는 지금 동신고 정문 근처라고 생각이 되는데 옛날 광주역 그때는 경양역이라고 했잖아요. 경양역이 북문 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 지창환: 아까 말씀하신 해동지도, 지방도 이런 지도를 보시고 광주 읍성의 모습을 말씀해주고 계시잖아요. 이 지도 한 장이 대단한 보물창고 같습니다. 그러면 광주 읍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각각의 이름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광주 4대문의 공식 명칭은, 동문 이름은 서원문이고요. 남문 이름은 진남문, 그리고 서문 이름은 광리문, 북문 이름은 공북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잘 아시는 것처럼 서울에 숭례문도 있고 돈의문도 있잖아요.

◇ 지창환: 네. 한양에도 사대문이 있었지요.

◆ 노성태: 그것 이름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북문의 이름 공북문은 군왕에 대한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이는 북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왕도였던 곳과 관련이 있었고 이에 반해서 남쪽을 수호한다는 뜻을 지닌 남문의 이름이 진남문이었잖아요. 진남문은 남도의 오랜 걱정거리였던 왜구 격퇴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광주 중심부에 성을 쌓게 된 것도 고려 말 왜구가 네 차례나 침입을 받았던 것이 배경이 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요.

◇ 지창환: 그래서 진남문이 여러 지역에 있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남쪽을 진압한다, 수호한다. 지금 학동에 전남대의과대학 교정에 느티나무 옆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 비석 이름도 진남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다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 지창환: 동문과 서문의 이름도 풀어주시지요.

◆ 노성태: 동문은 아까 서원문, 서문은 광리문이라고 했는데요. 주역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동문은 주역에서 하늘을 건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원형리정이라는 말 속에서 원 자를 취했고요. 그리고 광주가 옛날에 서석고을이었잖아요. 서석산. 그래서 서석고을에서 서 자를 취해서 서원문이라고 했고요. 서문은 서쪽에 해당되는 아까 주역의 리 자를 취한 후에 광주나 광산의 앞자를 따서 광리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 지창환: 4대문 이름에 다 각각 의미가 있었는데, 그러면 4대문 각각의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 노성태: 동문인 서원문은 옛 광주문화방송국 옆 사거리 자리에 위치했고요. 서쪽문 광리문은 황금동 콜박스라고 불렀던 사거리에 위치했고 남문 진남문은 광산동 옛 광주시청을 지나서 전남대의대 가는 사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문인 공북문은 금남로 4가에 충장치안센터가 있잖아요. 그 앞 사거리에 위치했던 곳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1916년경에 사대문이 전부 헐리고 없고요. 지금 전남여고 후문 부근, 그러니까 옛 광주문화방송 부근에 서원문 터 비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충장치안센터 앞에는 공북문 터 비만이 세워져서 100여년 전의 모습을 그려보게만 할 뿐이지요.

옛 전남도청의 광주읍성 유허옛 전남도청의 광주읍성 유허

◇ 지창환: 1916년경에 헐렸으면 100년도 넘었는데 금방 광주읍성 이야기 쭉 해주시다가 원장님 역사 전공하셔서 그런지 말씀 중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광주 읍성에서 보듯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광주 읍성의 옛 흔적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섰고 아시아문화전당도 언젠가는 광주의 위대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새로운 것만큼 저는 오랜 것도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년고도 광주에서 천년 역사를 일깨워줄 만한 흔적은 광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잖아요.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 가치가 공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무튼 사라진 광주읍성은 과거 가치의 폐기 처분 같은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아쉬움이 큽니다.

◇ 지창환: 말씀하신 대로 과거 가치와 미래 가치가 공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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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100년 전 사라진 광주읍성…광주에도 읍성과 4대문이 있었다
    • 입력 2021-12-01 11:54:04
    • 수정2021-12-01 17:30:17
    광주
-광주읍성 1378년(고려 우왕 4년) 축조,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철거<br />-읍성 둘레 약 2.5Km, 순천 낙안읍성보다 크고 동래읍성보다는 작아<br />-˹해동지도˼ 등 18,19c 제작 옛 지도에 읍성 지리와 4대문 위치 기록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2월 1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fqGa3h9MRA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노성태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원장님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100년 전 광주에 읍성이 있었고 4대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읍성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광주 읍성이 왜 언제 건립되었는지, 그리고 왜 허물어졌는지, 오늘 많은 광주 사람들이 광주읍성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광주읍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광주읍성이 100년도 더 지난 시절에 사라졌는데 1910년대까지 있었다고 하셨으니까. 실물을 보신 분들은 지금은 없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아마 없겠지요. 광주읍성은 단종 2년,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라고 하는 책에 처음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1453년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서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2002년도에 광주읍성 유허 지표 조사 보고서가 나왔고. 그리고 2008년도에 광주읍성보고서가 간행이 됐는데 두 보고서에 의하면 읍성은 1378년, 그러니까 고려 말 우왕 4년대에 축조가 되었고요. 1916년도에 완전히 일제에 의해서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문인 서원문
◇ 지창환: 우리 지역 읍성하면 오늘 말씀하신 광주읍성과 나주읍성 그리고 순천부 읍성은 들어봤거든요. 이들 읍성 말고도 순천 낙안읍성은 실제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잖아요. 그러면 낙안읍성과 비교해서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 노성태: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렇게 나옵니다.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72보(步)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253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이런 이야기가 이후에 호남 읍지라든가 광주 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 지창환: 8253척이라고 했는데요. 이것이 조선시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였던 모양이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일반인들 아마 감이 잘 안 오실 것이에요.

◇ 지창환: 지금은 미터를 사용하다 보니까 8253척하면 길이가 감이 잘 안 옵니다.

◆ 노성태: 네. 조선시대 때 사용됐던 1척은 지금으로 계산하면 31cm 정도 되거든요. 이것을 환산해 보면 읍성의 둘레가 2.5km, 높이가 2.8m 정도에 해당되는 읍성이었습니다. 부산에 동래읍성이 있는데 이것이 둘레가 5.4km였으니까 절반 정도의 크기였지만 앵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낙안읍성, 우리 지금 자주 가잖아요. 1.4km이고, 그리고 고창에도 남아 있는 고창읍성이 1.7km이니까 여기에 비교하면 큰 규모였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고요.

◇ 지창환: 낙안 읍성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실제로 광주 읍성은 전주 읍성, 남원, 나주 읍성과 함께 호남의 4대 읍성으로 꼽혔던 읍성이었지요.

◇ 지창환: 지금 광주 읍성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잖아요. 읍성의 당시 모습 확인 할 길 없나요?

19c ‘지방도’ 광주읍성
◆ 노성태: 남아 있습니다. 200여년 전에 제작된 옛 지도 속에 읍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라고 하는 지도를 보면 평지에 직사각형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4개의 성문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문 가까이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 자나 궐 자를 새겨서 위패를 모신 객사가 남아 있었고요. 그리고 목사가 근무하는 관청이 동헌인데 객사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읍성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1871년 간행된 지방도라고 하는 지도인데요. 이 지도에 보면 남쪽문 진남문에서 북쪽문 공북문도 이렇게 큰 길이 나 있고. 또 동쪽문인 서원문에서 서쪽문인 광리문을 관통하는 교통로가 똑같이 붉은 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 남북으로 났던 문과 동서로 났던 문이 십자형이잖아요. 그것이 만났던 지점이 당시 가장 북적대는 번화가였는데 지금 그 자리가 어디냐 하면 아마 광주 시민이 대부분 알 것이에요. 광주 우체국이 있는 자리, 우다방으로 불렸던 우체국 앞 사거리가 당시 번화가였는데 지금도 번화가인 것이지요.
◇ 지창환: 읍성 안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충장로 광주우체국이 있는 곳 십자로가 읍성의 중심지였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당시 읍성의 안쪽은 어디인가요?

◆ 노성태: 구시청 옛날 사거리 부분이 광산동이잖아요. 광산동을 포함하고 있고 금남로 1가에서 3가, 충장로 1가에서 3가. 그리고 황금동, 금동 일대가 옛 북성 안쪽에 해당되는 그러니까 읍성 안이었던 셈이지요.

◇ 지창환: 광주의 현재, 과거 번화가가 그 당시에도 중심이었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읍성하면 목사라는 사또도 살았을 것이고.

◆ 노성태: 네. 지금 같으면 시장님이시지요.

◇ 지창환: 목사 말고 또 어떤 분이 살았을까요?

◆ 노성태: 읍성 안에는 말씀드린 것처럼 객사나 동헌을 비롯한 많은 관청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고을 수령을 비롯해서 수령을 보좌했었던 아전이라든가 군졸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고요. 읍성 안에 살았던 자들은 이들 만은 아니었겠지요. 19세기 말 광주를 왔다 간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분, 그들이 광주 4대문 안에 살았던 진정한 주인공 읍민이었다는 것이지요.

◇ 지창환: 일반 백성들이 주로 많이 살았네요. 그러면 읍성 밖의 모습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북문 밖에 공북루라는 루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요. 서문 밖에는 향교가 있었고 사직단이 있었고 의열사가 표기되어 있는데 향교와 사직단은 남아 있고요. 의열사는 서구 벽진동에 있었던 사당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회재 박광옥, 충장공 김덕령을 모셨던 사당이었습니다. 남문 밖에는 경렬사라고 하는 사당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는데요. 당시 동명동에 세워졌던 경렬로의 주인공이지요. 고려 말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인데 지금은 망월동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문 밖에는 지금 동신고 정문 근처라고 생각이 되는데 옛날 광주역 그때는 경양역이라고 했잖아요. 경양역이 북문 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 지창환: 아까 말씀하신 해동지도, 지방도 이런 지도를 보시고 광주 읍성의 모습을 말씀해주고 계시잖아요. 이 지도 한 장이 대단한 보물창고 같습니다. 그러면 광주 읍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각각의 이름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광주 4대문의 공식 명칭은, 동문 이름은 서원문이고요. 남문 이름은 진남문, 그리고 서문 이름은 광리문, 북문 이름은 공북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잘 아시는 것처럼 서울에 숭례문도 있고 돈의문도 있잖아요.

◇ 지창환: 네. 한양에도 사대문이 있었지요.

◆ 노성태: 그것 이름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북문의 이름 공북문은 군왕에 대한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이는 북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왕도였던 곳과 관련이 있었고 이에 반해서 남쪽을 수호한다는 뜻을 지닌 남문의 이름이 진남문이었잖아요. 진남문은 남도의 오랜 걱정거리였던 왜구 격퇴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광주 중심부에 성을 쌓게 된 것도 고려 말 왜구가 네 차례나 침입을 받았던 것이 배경이 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요.

◇ 지창환: 그래서 진남문이 여러 지역에 있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남쪽을 진압한다, 수호한다. 지금 학동에 전남대의과대학 교정에 느티나무 옆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 비석 이름도 진남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다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 지창환: 동문과 서문의 이름도 풀어주시지요.

◆ 노성태: 동문은 아까 서원문, 서문은 광리문이라고 했는데요. 주역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동문은 주역에서 하늘을 건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원형리정이라는 말 속에서 원 자를 취했고요. 그리고 광주가 옛날에 서석고을이었잖아요. 서석산. 그래서 서석고을에서 서 자를 취해서 서원문이라고 했고요. 서문은 서쪽에 해당되는 아까 주역의 리 자를 취한 후에 광주나 광산의 앞자를 따서 광리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 지창환: 4대문 이름에 다 각각 의미가 있었는데, 그러면 4대문 각각의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 노성태: 동문인 서원문은 옛 광주문화방송국 옆 사거리 자리에 위치했고요. 서쪽문 광리문은 황금동 콜박스라고 불렀던 사거리에 위치했고 남문 진남문은 광산동 옛 광주시청을 지나서 전남대의대 가는 사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문인 공북문은 금남로 4가에 충장치안센터가 있잖아요. 그 앞 사거리에 위치했던 곳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1916년경에 사대문이 전부 헐리고 없고요. 지금 전남여고 후문 부근, 그러니까 옛 광주문화방송 부근에 서원문 터 비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충장치안센터 앞에는 공북문 터 비만이 세워져서 100여년 전의 모습을 그려보게만 할 뿐이지요.

옛 전남도청의 광주읍성 유허
◇ 지창환: 1916년경에 헐렸으면 100년도 넘었는데 금방 광주읍성 이야기 쭉 해주시다가 원장님 역사 전공하셔서 그런지 말씀 중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광주 읍성에서 보듯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광주 읍성의 옛 흔적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섰고 아시아문화전당도 언젠가는 광주의 위대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새로운 것만큼 저는 오랜 것도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년고도 광주에서 천년 역사를 일깨워줄 만한 흔적은 광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잖아요.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 가치가 공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무튼 사라진 광주읍성은 과거 가치의 폐기 처분 같은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아쉬움이 큽니다.

◇ 지창환: 말씀하신 대로 과거 가치와 미래 가치가 공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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